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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말라

마태복음 3:1-12

1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3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4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11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태복음 3:1-12) 
 
오늘 말씀은 세례 요한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퍼부은 독설(毒說)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무슨 특권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말끝마다 말하는데, 하나님은 이 돌멩이 하나를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아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이 돌멩이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최고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칭호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향하여 최고로 자부심을 갖는 말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마태복음 1:1-2) 마태는 유대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거든요. 그래서 그는“내가 전하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여러분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입니다.”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유명한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리고의 세관장이었던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키가 작았던 그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어서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사람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일 누구의 것을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입에서 놀라운 말씀이 터져나왔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내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여리고에 가면 삭개오가 올라갔던 뽕나무를 제일 보고 싶어한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두리번 두리번 하면 유대인들이 “그 뽕나무 저기 있습니다.” 그런답니다. 우리의 관심은 삭개오가 올라갔던 뽕나무에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잃어 버린 한 영혼의 구원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날 예수님은 삭개오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리고에 가셨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한 수많은 잃어 버린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차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에 대한 말씀이 또 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나 축제로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 집 앞에 거지 나사로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가 먹고 버린 것을 주워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거지 나사로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부자도 죽고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음부(지옥)에 들어갔습니다.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네가 세상에 살던 때를 생각해 보아라. 너는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다 가져 보았으나 나사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서 위안을 받고 있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와 너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아무도 여기서 그리로 가려고 해도 가지 못하고 이리로 건너오지도 못한다.”(누가복음 16:25-26, 현대어 성경)
 
여러분,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이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사람이 있다면 우리 말고 누가 있겠는가? 이렇게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당연히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어야 할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불법을 자행해서 돈을 벌고,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고, 남을 속여 사기를 치고,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한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본문 말씀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모습을 보십시오. 약대 털옷을 입었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그리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몰려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좋은 옷을 입었고, 좋은 음식을 먹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세요. 좋은 옷과 음식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말로 하면 좋은 차, 좋은 집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왜 그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겠습니까? 왜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겠습니까? 독사는 독이 있는 뱀입니다. 이빨에 독이 있어서 물리면 죽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아무 일 없다는듯이 잘 먹고 편안하게 산다고 하지만 너희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 말에 독이 있고, 너희 행실에 독이 있어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돈 내가 쓴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너희가 정당하게 돈을 벌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은 없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너희는 너희의 삶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살고 있지만 네 자신에게 후한 것처럼 하나님의 일에도 그렇게 후한 삶을 살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네 돈을 가지고 네 자신을 위해서는 후하게 쓰면서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일에는 인색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너희가 속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것입니다. 길에 널려 있는 돌멩이만도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요한은 말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불에 던져 탈 것입니다. 이제 내 뒤에 한 사람이 오실 것입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그의 말에 긴장감이 있습니다.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저 내가 교회에 나오고 있으니까, 내가 성경을 믿고 있으니까, 내가 기도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어 주시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긴장감을 느끼고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어저께 아침 새벽기도에서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마음에 큰 충격을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지금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라. 너희의 일상생활을 되돌아보아라. 도둑질과 살인, 간음과 거짓 맹세, 바알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너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방의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며 섬기는 아주 더러운 생활이 아니냐? 그러면서도 이제는 나의 성전으로 들어와 뻔뻔스럽게 내 앞에 나서서 `우리에게는 성전이 있고 이 성전에는 주님이 계셔서 우리는 언제나 안전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계신데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 하고 성전에서 나간 다음에는 여전히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온갖 짓을 저지르고 있지 않느냐? 그러므로 내가 이제는 실로의 성전과 마찬가지로 나의 성전마저도 부수겠다. 너희가 나의 성전을 의지하고 죄만 짓기 때문이다. 이 성소는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가까이 와서 함께 있으려고 마련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나는 때려 부수어 땅바닥과 똑같은 곳이 되도록 하겠다.”(예레미야 7:8-14)
 
여러분, 하나님이 자기 성전을 때려 부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집을 때려 부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깨끗하고 정직하지 않으면, 우리가 정말 회개하고 속 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성전도 때려 부수는 마당에 아무 것도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것?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헌금하는 것?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봉사하는 것?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기도는? 성경공부는? 그 어느 것도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회개해야 합니까? 어떻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다시 이 질문을 바꾸어서 말하면,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난 주간에 윌리암 버클리(William Berkley)가 쓴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었다. 유대인으로서 주고 받는 최고의 찬사는 저 사람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유대 사람들의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참된 아브라함의 아들은 세가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좋은 눈과, 겸손한 머리와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이다.”
 
대단한 통찰력(insight)입니다. 자기들의 오랜 전통에 대한 반성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좋은 눈이라는 것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시력이 좋은 눈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남을 헐뜯고 비판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칭찬하는 눈을 말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오늘 우리에게 이런 눈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서로 교인들끼리 바라 볼 때, 목사가 교인들을 바라보고, 교인들이 목사를 바라볼 때,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고, 자식이 부모를 바라 볼 때, 친구를 바라 볼 때, 이런 눈이 없지 않습니까? 비판거리를 찾는 눈은 바리새인들의 눈입니다. 이런 눈을 가지고는 아브라함의 아들이 될 수가 없다네요.
 
그렇다면 우리 눈부터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알아채는 민감한 눈, 이것이 좋은 눈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모두 이런 눈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식당에서 서브(serve)하는 웨이터나 웨이터리스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손님이 필요한 것을 빨리 알아채야 합니다. 손님이 식사 중에 목이 말라 물을 달라고 말하기 전에 빈 컵에 물을 채워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봉사자입니다.
 
그리고 좀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너그러운  눈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 말씀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사도행전 17:30)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때에는 우리의 무지를 일일이 다 갚지 않으시고 그냥 덮어 주신 것입니다. 좋은 눈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관용의 눈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때가 가까올수록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립보서 4:5)고 했습니다.
 
둘째로, 겸손한 머리가 있어야 합니다. 머리는 우리의 지성(知性, intelligence)을 말합니다. 내가 다 안다는 오만한 지성이 아니라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한 지성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오만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선생(랍비, rabbi)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태복음 23:8) 또 야고보서에도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3:1)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성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좀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아는 것이 매우 부분적이고 제한된 적은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비록 자기의 전문 분야라고 할지라도 내가 아는 것이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그 분야에서 계속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마치 성경의 모든 진리를 다 통달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천박하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은 이렇게 겸손한 머리를 가져야 합니다.
 
셋째로,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겸손의 핵심은 자기가 가진 마땅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항상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의 겸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8-9절) 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삶 속에 잘 적용하십시오. 겸손은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입니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나에게 겸손이 있는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을 가까이 하신다.”(야고보 4:6)고 했고,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베드로전서 5:5) 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지만 사람들도 겸손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은 사람들이 싫어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에게는 자꾸 대적자들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거지 나사로였습니다. 끝내 자신의 삶에 대한 통찰력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던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지 못했습니다. 우리 크리스찬의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좋은 눈을 갖지 못했습니다. 겸손한 지성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그는 하나님을 믿는 일에도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는 마음이 교만했을 것입니다. 못가진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 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허위의식과 안일한 생각이 산산히 부서져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겉 모습이 세련되어가기 보다는 교회 구석 구석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지체들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우리의 목소리를 높이기 보다는 조용히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성결을 추구하는 지체들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