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 주간만 지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셉과 마리아 부부 사이에 아기로 태어나신, 주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성탄절이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빌2:6에서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라 하였고,롬9:5에서는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 하였고, 히1:2 이하에는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가 지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했으며,
요일5:20에는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하신 분이 왜 이 세상에 오셔야 했을까요? 영광과 위엄의
모습으로 화려하게 등장하신 것도 아닌,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당시 가장 가난한 가정 중에 한 가정인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을 통해 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일까요? 온갖 조롱과 수치와 모욕과 고난을 다 받으시고, 결국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그리고 당신을 가장 잘 믿는다고
떠버리던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당하시게 됨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께서, 왜 굳이 이 땅에 오셔야 했는가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환영받지도 못하는 이 땅에 왜 오셔야 했을까요? 그분이 오시지 않으면 안될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요?
성탄절을 한 주간 앞두고, 강림절 셋째 주일을 맡은 오늘, 주님이 이 땅에 오셔야만 하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만물의 창조자로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이전, 아직 마리아의 배에 잉태되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그 분명한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자이심이라' 그렇습니다.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죄'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죄'라는 덫에 걸려 사망과 저주에 던져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의 가장 근본이 되며, 인간이 당하는 모든 재앙과 재난의
근원이 되고, 인간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게 하는 원인은 바로 '죄'입니다. 모든 사람은 바로 이 '죄'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3:17에도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랬고, 12:47에서 예수님은 직접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딤전1:15에서도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죄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길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갖 조롱과 모욕과 고난, 그리고 결국은 죽으심을 당하시기까지 하시면서도 이 땅에 직접 오셔야 했던
것일까요? 죄가 어떠한 것이기에 이 세상에 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가 없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하는 것이었을까요? 죄는 인간에게 어떠한 것이기에 꼭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만 하는
것이었을까요? 신앙의 역사에는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야, 다니엘 등 뛰어나고 탁월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사람들가지고도 해결 안되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신앙의 역사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다 모아 놓아도 '죄'의 문제는 조금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지난 2000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상
모든 성인들을 다 모아 합해놓아도 '죄'의 문제는 조금도, 해결될 아주 작은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죄'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고 엄청난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류의 왕노릇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죄란 어떠한 것인가? 이시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좋은 것을 막고 도적질 해 갑니다. 렘5:25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움과 평화와 행복의 상징이 되는
에덴을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함으로 그 좋은 천국을 잃어버렸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수백년 전 그 조상들에게 약속해 주셨고,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고난을 당하던 열조들이 꿈에도 그렇게 그리던 그 가나안 땅을, 이제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바로 그 시대에 살아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로 인도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그들은 그 좋은 축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다 죽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에게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더구나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삼손을 하나님께 받쳐진 나실인으로 구별하셨으며, 태어나자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사기13:24에는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라고 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사랑가운데 삼손은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그 놀라운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를 지키고 순종하면 그 왕권이
영원토록 그 후손에게 이어질 것이라고 까지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죄를 범함으로 그 크고도 놀라운 영화의 자리와 하나님의 약속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죄는 이렇듯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모든 것을 막고 도적질 해 갑니다.
어제 일자
동아일보를 보니 20세기 최대의 핵참사라는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완전 폐쇄식에 대한 뉴스가 실려 있었습니다. 14년전인 1986년
4월 발생했던 원자로의 화재사건으로 인근 2600평방 키로미터의 지역(서울의 5배가량 되는 지역이라고 합니다.)이 오염되었고 수백명이 죽었던
사건이었지요. 그리고 사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일로 인해 330여만명이 피해를 보았고 해마다 암 등으로 2500여명이 죽어간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 사건 이후에 그 지역은 완전히 '죽은 도시'가 되었고, 그 후에 태어난 아이들은 그 사건을 정확히 아는지 모르는지 대부분이 기침과 감기를
달고 살며, 갑상선질환과 저혈압, 천식 등을 앓고 또 키가 자라지 않는 등 신체적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끔찍한 일이
바로 화재사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화재 사건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입니다. 죄도 이와 같습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엄청난
결과를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따먹은 죄가 그처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그 모든 후손에게까지 죽음이라는 사망의 유산을
남겨주는 줄 알았더라면 아담과 하와는 결코 그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까지 되는 줄은 심각하게 생각도
해보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의 결과는 얼마나 큽니까? 인류에게 주어진 그 좋은 모든 것은 다 잃어버리고 고통만 남겨
주지 않았습니까?
둘째, 죄는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큰 고통과 재앙을 안겨 줍니다. .사실 인간은 하나님께 복받은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를 보면, 창1:27-28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분명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 - -
-'하십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인 창3:17-19을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합니다. 분명 죄를 범한 이후의 아담에 대해 하나님은 '저주를 받고'라고 말씀하시며 저주를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는 이렇듯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복을 빼앗아 가고 큰 저주를 준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이 바로 이
'죄' 때문인 것이지요.
.죄로 인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일까요? 애굽에서 약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느 날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인도해 내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왕 바로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
주려하지 안았지요. 그때 하나님은 열 가지의 재앙을 그 애굽 온 땅에 내립니다. 그 중에 가장 끔찍하고도 비참한 재앙이 열번째 재앙이었습니다.
강퍅하고 고집스러웠던 애굽의 왕 바로도 이 열번째 재앙에는 굴복하고 말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는 것을 허락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열번째 재앙은 애굽의 모든 사람들 중에 장자는 다 죽음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열번째 재앙이 닥치던 날 밤, 죽음의 신은 애굽의 온 땅
구석구석, 그리고 집집을 다니며 장자라면 위로는 애굽의 왕 바로의 가정에서부터 아래로는 옥에 갇힌 사람의 가정에까지, 애굽인으로서 장자라면
하나도 남김이 없이 그 생명을 빼앗아 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날 밤, 그 통곡과 울부짖음 소리가 애굽 전국에 얼마나 가득찼고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슬픔이 얼마나 컷겠습니까? 난데없이 나타나 생명을 빼았아 가는 죽음, 이러한 죽음은 왜 이 세상에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애굽의 왕 바로가 강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를 범하였기에 애굽에 내려진 재앙이었던 것입니다. 애굽에 내려진
열번째 재앙이라는 큰 재앙은 애굽의 왕 바로의 죄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죄가 얼마나 무섭고 끔찍스러운 것인지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말씀을 지키지 않음으로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로 인해
죽음이라는 고통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겪는 육신의 죽음은 바로 이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 '죄'로
인한 죽음의 고통을 가장 끔찍스럽게 경험할 때가 아무 죄도 없이 질병이나 사고로 죽음을 당하는 어린 아이들의 죽음입니다. 아무 죄도
없는 어린 아이가 알 수 없는 질병이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음을 당할 때, 그 부모가 겪는 고통과 슬픔은 세상의 그 어느 것으로도 상쇄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왜 죄없는, 천사와 같은 곱기만한 어린 생명이 죽어야 하는가? 죄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 아이의 죄가 아니라, 그 부모의 죄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죽음이라는 형벌 때문에 모든 사람은
죽음을 맡아야 하는 것이고, 어린 아이의 죽음도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마음 아픈 일이 올 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생후 5개월이었던 이종현 아기와 생후 70일이었던 조하준 아기입니다. 이종현 아기는 생후 5개월이였으며, 조하준 아기는 생후
70일었던 아기였으니, 그 아빠와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아마도 온 마음이 갈갈이 찢겨지고 산산조각이 나는 고통보다도 더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한 비극적인 일이 이 하늘 아래에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이종현 아기가 그렇게 되던 날, 그
연락을 받고 광명시에 있는 성애병원으로 달려가서였을 때입니다. 의사도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어이가 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담당하던 그 의사에게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러 일이 얼마나 일어납니까? 그랬더니 그 담당의사가 하는 말이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린 아기들의 죽음'이 한 달이면 한 두 번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굉장히 놀랬습니다. 종합병원이라고 하지만
광명시에 있는 그 한 병원에서 한 달에 한 두 번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전국적으로 평균 그러한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저는 거기서 다시 한번 죄의 끔찍함과 무서움을 다시 한 번 깊이 체험하고 몸서리를 치게 되었습니다. 수천년, 아니 그 이상도 더 되는,
모든 것이 다 잊혀질 때가 지나고도 남을 만큼 긴 세월이 지난 지금, 인류의 태초에 아담이 지었다는 바로 그 '죄'로 인해 인류에게 주어졌다는
죽음이 아직도 기세등등하게 활개를 피며 다니고 있다니 말입니다. 그만큼 '죄'가 부리는 죽음의 권세는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결코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요, 약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로마서5:12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합니다. 그렇게 죄는 무섭습니다. 함부로 과소평가할
것이 아니랍니다. 그리고 또한 죄는 그 계산에 있어 결코 손해를 보는 적이 없습니다.
어느 분이 죄의 계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죄의 더하기/ 죄는 문제를 더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오히려 점점 더 얽히고 설키 며
골치아파집니다. 죄의 빼기/ 죄는 우리의 영혼을 빼앗습니다. 죄가 깊어 갈수록 우리의 영혼은 참된 생 명을 잃고 영적 무기력과 무감각과
무관심에 빠집니다. 죄의 곱하기/ 죄는 그 아픔을 곱합니다. 죄된 생활이 마취제가 될 때가 있으나 깬 뒤의아픔은 이전보다 더 하게
됩니다. 죄의 나누기/ 죄는 모든 것을 나눕니다. 죄는 자기 자신을 쪼개고, 가정을 쪼개고, 이웃을 쪼개고, 국가를 쪼개며, 자연마저도
쪼갭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자신의 영혼까지도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질 때 하나님에 의해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비참하게 멸절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이스라엘은 BC587년 바벨론에 의해 비참하고 참혹하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거룩한 성이라는 예루살렘은 불타고, 하나님의 성전은 무너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엄청난 고통과 재앙을 겪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죄를 범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죄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큰 재앙을 줍니다. 죽음의 고통뿐만이
아니라, 분열, 증오, 파괴 등의 고통과 재앙도 줍니다.
셋째, 죄는 장차 우리를 영원한 멸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는 영벌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 인줄 아십니까? 성경은
로마서1:29-31에 그 죄목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러니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러한 죄목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로마서3:23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는 롬3:10의 말씀처럼 모든 사람은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마저도 스스로
말하기를 딤전1:5에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랬고 다윗은 시편22:6에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멸망을 선물로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정리해
본다면, 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좋은 것을 막고 도적질 해 갑니다. 죄는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큰 고통과 재앙만을
가져다 줍니다. 죄는 장차 우리를 영원한 멸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의 종입니다. 죄의 덫에 걸려 있는 한 마리의
연약한 짐승에 불과 합니다. 다윗이 시편51:5에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고백처럼,
모든 사람은 이미 죄 가운데 잉태되었고 죄 가운데 출생하였습니다. 또한 그뿐만이 아니라 그 다윗이 시편51:3에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는 고백처럼 모든 사람은 죄의 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소망이 있고,
미래가 있으며,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합니다. '인간은 한
번 빠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수천길 깊은 우물의 나무 뚜껑 위에서 춤추고 즐거워하는 존재다. 그 밑은 한 번 빠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수천길
깊은 어둑컴컴한 우물이라는 것도 모른체, 그리고 그 나무 뚜껑은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다 썩은 나무뚜껑이라는 것도 모른체 그저 그 위에서
즐거워하며 신나 춤추고 있는 어리석은 존재다.' '인간은 가파른 내리막 길을 달려 내려가고 있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버스 안의 승객과 같다.
브레이크가 고장났으니 그 버스에서 뛰어내리라는 고함을 치는데도,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안은체, 자신들의 즐거움과 쾌락에 취해 그저 즐거워
춤추고 떠드는 승객과 같다. 버스는 이미 수천 길의 낭떠러지에 다 도달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영적으로 건강하다고
교만하지 마십시오. 죄가 그렇게 쉽게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아무리 건강한 물고기라도 썩은 물 속에서는 죽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살 수 있는 길은 죄라는 썩은 물 속에서 나오는 방법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심각하고 중요하며, 긴급히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어느 것이 아닌 '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류를 이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모든 조롱과 모욕과 고난, 그리고 죽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기에 져야할 모든 고통과 재앙, 그리고 멸망을 다 혼자 맡아지시고 우리를 죄의 그 멍에 아래서 벗어나게 하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갈1:4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라고 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몸을 드림으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그 감사와 감격의 날이 바로 성탄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인간의 '죄'가 전제되어 있는 감사와 감격의 절기입니다. 인간을
종으로 삼아 주인 노릇하는 '죄'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시고 자유케 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오신
날이기에, 성탄절의 진정한 감사는 '죄'에 대한 바른 이해와 깊은 깨달음,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오시는 주님을 온 몸을
다하여 감사로 영접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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