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생활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소리 높여 찬양하며, 소리 높여 부르짖어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는
부르짖어 간구하라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소리 높여 찬양할 때는 찬양해야 합니다. 소리 높여 부르짖어 간구할 때는 간구해야 합니다. 막
9장에 소경 거지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보지는 못한 채, 예수님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길가에 서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부르짖었습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 멈추시고 바디메오를 불러들여서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바디메오가
부르짖지 않았다면 바쁘신 예수님은 그냥 지나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바디메오는 일생동안 소경거지로 살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꼭 부르짖을 때 부르짖음으로 구원도 받고, 기적도 받고, 은혜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13절에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에는
우리가 흔히 하는 소리내어 부르짖는 통성기도나 합심기도가 있는가 하면 소리내지 않고 고요하게 기도하는 묵상기도나 침묵기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통성기도도 들으시고 묵상기도도 들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통성기도도 할 수 있어야하고 묵상기도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통성기도하는 분들을 이렇게 비난합니다. 하나님이 귀가 잡수신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소리를 버럭버럭 지른다고
흉을 봅니다. 또 어떤 분은 침묵기도가 기도냐고 조용히 있다보면 잡념이 생기기 때문에 묵상기도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당시에 유대 민족을 바벨론 포로 생활을 70년 하고나니깐 조국에 돌아와보니 모든 것이 폐허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6.25사변을 치루고 난 그당시 서울은 완전히 폐허 상태였던 것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도 다 무너지고 솔로몬의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의욕을 잃고 소망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여기저기서 절망과 고통속에서 사람들은 극도의 이기주의로 아우성을 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때 스가랴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혈기 있는 자'란 살아있는
백성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 그리해야 하나님께서 일어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외침이나 아우성이나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인간의 소리는 잠잠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느때 잠잠해야
합니까?
첫째로 원망과 불평이 일어날 때에 잠잠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일어나십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00여년 만에 해방되었습니다. 노예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자유인으로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큰 홍해가 가로놓이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더 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뒤로 돌아가자니 애굽의 잔인한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앞과 뒤가 꽉꽉 막힌 것입니다.
잠잠했던 사람들이 술렁거립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더니 모세를 향해 원망한 후에는 모세를 때려 죽이기 위해 돌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하실 수 있느냐고 소리쳐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모세도 우리를 애굽에 감나 내버려두지 이곳까지 끌고와서 죽게 하느냐고 원망과 불평의
돌을 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때 거기 있었다면 원망의 소리를 했을 것입니다. 이 때, 모세가 외칩니다. 출 14:13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사람을 또 다시는
여원히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모세의 말을 듣고 잠잠해진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홍해를 가르셔서
유대 민족을 무사히 건너가게 하셨고 애굽의 군대는 홍해속으로 수장시켜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보통때는 잠잠하다가도 어려운 위기가 오면
인간들은 원망의 소리, 불평의 소리로 요란합니다. 아우성을 칩니다. 이런 소리침으로 위기가 해결됩니까? 결코 해결이 안됩니다. 위기일수록 조용히
엎드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자세입니다. 보세요, IMF가 터지고 기업이 어려울 때 기업주는 기업주대로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자기 소리만 지르고 흥분하고 아우성치면 칠수록 그 기업은 점점 더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울수록 서로 자신을 돌아보는 잠잠함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 자신을 반성하는 잠잠함이 있어야 그 기업은 다시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 37:7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약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찌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가 가로높이고
애굽의 군대가 뒤쫓아오는데 하나님 원망하고 지도자 모세 원망한다고 해결되었습니까? 원망과 불평소리가 크면 클수록 문제는 더 복잡해집니다. 일은
더 꼬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원망과 불평의 소리로 아우성치고 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고요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일어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짜증스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매사를 원망하고 불평이 터져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평과 원망의 소리는 서로의 불화만 가져오고
다툼만 가져오게 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원망과 불평을 잠재우고 잠잠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둘재로 낙심과
절망이 올 때에 잠잠해야 합니다. 왕상 19장에 보면 갈멜살에서 대 승리를 한 엘리야에게 큰 위기가 왔습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러 옵니다.
엘리야는 브엘세바로 도망쳐서 하나님의 사람이 절망에 빠져 살 의욕을 잃어버리고 도리어 하나님께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시라고 절망적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서 나만 혼자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는데 결국 내게 돌아온 것은 이세벨의 위협뿐이라고 하나님마저 불신하고 절망에 처해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이런 엘리야에게 어떻게 일어나서 역사 하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간신히 일으켜서 호렙산으로 이끌어가서는 거기서 아주
작은 세미한 음성을 들려 주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절망 직전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음성을 듣게된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다시 힘을 얻고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위기가 오니깐 더 많이 허우적거리고 더 많이 힘을 빼다가 그대로 죽고만다는 것입니다. 한
때, '아버지'란 제목으로 소설을 써서 많은 사람들을 울리게 하고 감동을 준 책이 있었습니다. 그작가가 바로 김정현 소설가인데 그가 이번엔
'어머니'란 소설을 써서 지금 장안의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주간 그 소설을 보았습니다. 그 소설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IMF가 터지고 가정의 아버지와 남편들이 젊은 나이에 직장에서 명퇴를 당했습니다. 소설에 나온 아버지도 명퇴한 후 몇몇사람과 사업을
시작했다가 쫄딱 망하고 태산같은 빚더미에 앉게 되어 아버지는 하루 아침에 도망 다니는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살고있던 집과 모든 가구는 차압당하고
경매당하여 얌전한 어머니와 18세의 딸과 어린 막내 아들이 길가에 나앉게 된 것입니다. 남편의 도움으로 곱게만 살아온 어머니는 살 길을 찾아
중학교 동창생인 친구각 있는 울산으로 간 사이에 두 남매가 살 길이 없게 되자 어린 아들은 시립 어린이 집에 맡기고 공등학교 2학년 생인
18세의 딸아이는 침식제공하는 단란 주점으로 빠져 그만 몸과 맘을 다 망치는 창녀까지 되어버립니다. 아버지는 피해다니다가 어느날 친구로부터 당신
딸이 강남 어디에 단란 주점에서 있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찾아가 딸을 만나는 순간 딸은 도망가고 아버지는 더 절망에 빠집니다. 가정이 하루
아침에 풍비박산이 된 것입니다. 그 때 그렇게 약하게 지내온 어머니가 다시 서울에 올라와 삐뚤어진 딸을 다시 돌아오게 하고 어린이 집에 맡기
어린 아들을 찾아서 장사 한번 안해 본 이 어머니가 포장마차 집을 하면서 무너진 가정과 가족을 일으켜 세웁니다. 결국 나중에 거리롤 방황하다가
교통사고를 만난 아버지를 병원에서 만나 처음엔 의식을 잃어버린 남편을 끈질기게 간호하면서 남편이 다시 의식을 돌아오게 하면서 무너진 가정을 다시
세우는 눈물겨운 한 어머니의 소리 없는 사랑과 인내를 그려낸 감동깊은 소설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쓴 작가는 그의 소설 서문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위기에 처해 황당해 어쩔 줄 모르는 아버지와 남편들에게 그리고 그런 위태한 울타리에서 지레 도망치려는 아들과 딸들에게 아직 거지지
않는 불씨가 되고 있는 어머니와 아내의 모습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큰 소리치는 아버지도 반항하는 젊은 자녀도 묵묵히
인내하며 살아가려는 연약한 한 어머니가 가정을 다시 회복한다는 소설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여자는 약하는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위기가 올수록 절망의 순간이 내게 올지라도 우리는 더욱더 잠잠한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믿음과 인내가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유대 민족이 바벨론 포로 이후 나라도 도시도 다 폐허가 되고 가정도 무너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에게 '너희가 잠잠하면 내가 다시 일어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느혜미아를 통하여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였고
학개와 스가랴를 통하여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여 유대 미족을 다시 일으키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무슨 일이 잘되어가고
형통함으로 우리 속에 교만해지려고 할 때 더욱 겸손하며 잠잠해야 합니다. 인간은 무슨 일이 잘되거나 성공하게 되면 그것이 자기 힘으로 된
줄 알고 떠들어 댑니다. 그리고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고전 10:12에는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교만해지려는 자는 꺾으셔서 잠잠케 하신 후 하나님이 들어쓰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 보세요. 애굽
궁중에서 잘 나갔습니다. 모세는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장담하다가 사람을 죽인 살인자로 몰려 미디안 광야에서 40여년간이나
숨어서 잠잠하였습니다. 이런 잠잠하던 모세를 하나님이 40년만에 호렙산 불꽃 가운데서 불러내어 이스라엘의 대 지도자로 쓰셨습니다.
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놀랍고 신비한 체험을 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바울을 바로 쓰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쓰셨다면
바울도 교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울을 3년간이나 아라비아 사막으로 보내서 경건의 훈련을 시켜 아주 겸손케 하신 후에 그를 사도로
전도자로 크게 쓰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죄인중위 죄수다'라고 고백하면서 잠잠했습니다. 이런 바울 앞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큰 선교의 역사를 일으키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70년대부터 경제 부흥을 일으키게 하셨는데 우리가 이것을 겸손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고 떠들다가 97년도에 IMF를 만나게 함으로 아직도 여기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중국을 보세요. 중국은 '잠자는 사자'라고 했는데 이 중국이 지금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습니다. 벌써 경제 성장이
놀랍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중국 농산물과 중국 공산품 때문에 한국의 기업이 큰 위기에 처하고 있지 않습니까? 잠잠하던 중국이 일어난
것입니다. 도리어 잠잠하지 않고 성급하게 떠들어 댄 우리가 지금 위기에 처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겸손한 맘으로 잠잠해야 합니다.
뭐 좀 잘된다고 뭐 좀 잘났다고 떠들고 교만하면 우리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꺾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 하시는 분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내 속에 때때로 미움과 증오와 분노가 치밀어 올라올 때 잠잠해야 합니다. 요 8장에 보면 현장에서 간음하던
한 여인을 바리새인들이 증오하고 분노하면서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이들 모두는 손에 돌을 들고 있었습니다. 구약 율법에 보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죽이라는 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증오와 분노로 소리를 칩니다. 이 여인을 돌로 치리이가 말리이까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도 소리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침묵하고 잠잠히 계셨습니다. 그리고 땅에다가 무슨 글을 쓰셨습니다. 잠잠하던 시간이 계속 되다가 드디어
예수님이 아주 무거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들이 이 여인을 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잠잠해지면서 예수님
말씀 앞에 자기들을 비춰보니 이 여인에게 돌을 들 수가 없게 되자 모두들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아우성치고 떠들어댄 자리가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드디어 그의 곁에 가서 '나로 너를 정죄하지 않을테니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용서의 말씀을 조용히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잠잠하신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큰 도전이 되었는지 그 후 이 여인은 회개하고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소리와 모두가 정죄하고 심판하는 소리만 들려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평화도 깨지고
질서도 깨져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우리 책임이요, 모두가 우리 잘못인데도 우리는 나는 잘했고 너는 몹쓸놈이라고 규탄만 하는 소리만 들리니 이
사회가 잘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잠잠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이 다시 일어서시게
됩니다. 하나님이 일어나서 도우시면 무엇이 어려울 것이 있습니까? 그동안 한국 교회는 너무 떠들어대기만 하지 않았는지요? 선교 100년
역사에 한국 교회가 가장 많이 부흥되었다고 전인구의 25%의 기독교 인구가 증가되었다고 자랑만 하면서 떠들고 자기 도취에 빠져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잠잠해야 합니다. 그렇게 부흥하던 한국 교회가 90년대에 들어와서 정체되고 침체되고있느지를 냉철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이 사회가 교회를 바라보는 저들의 소리가 무엇인지 조용히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 교회가 다시 회개하고 다시 거듭날 때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다시 들어쓰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어느 교회가 은혜스런 교회입니까? 인간의 소리는 잠잠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교회가 은혜있는 교회입니다. 지금 여러 가지로 시련과 고통속에서 원망과 불평과 절망의 소리는 잠잠케 하십니다. 교만과 남을 미워하고 규탄하는
소리는 잠잠케 합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일어나 말씀하시고
역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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