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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만을 통해 주시는 교훈!
왕하 5 : 1 - 14

오늘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나아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태도와 방법을 취하였는가를 살펴봄으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그는 사람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사고자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은 십달란트와 금 육천개, 의복 열 벌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의 가치가 있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① 은 십달란트는 -- 60,000 드라크마와 같은데 여기서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값이므로 60,000 드라크마는 노동자가 약 165년간 일하여서 번 돈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하루에 만원만 쳐도 6억이며, 3만원을 치면 18억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② 뿐만 아니라, 그는 금 육천개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무게를 달아서 화폐의 가치를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무게를 사용하는 기본적인 단위가 세겔이였는데, 나아만은 바로 금 6천 세겔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여기서, 한 세겔은 일반 노동자의 60일의 품삯입니다.
그러므로, 6,000세겔은 약 986년간 일해서 번 돈에 해당하며, 돈으로 환산하면 하루에 3만원을 쳤을 경우, 약 108억이라는 돈입니다.
③ 그리고 그는 의복 열 벌을 가져갔습니다.
당시에는 의복이 비싸다기보다는 굉장히 귀하여서, 그는 좋은 의복 10벌을 구하여 가져간 것입니다.
..왕의 친서, 그리고 수백 억이라는 어마 어마한 돈과, 의복을 가지고,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오는 이 거대한 광경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덕교회에 어떤 사람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는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까, "이 사람은 내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므로, 신덕교회에서 받아들이고, 그의 병을 꼭 고쳐 주시오....." 이러한 친서를 가지고 200억이라는 현금을 들고 벤츠를 타고 여러 수행원들과 함께 이 교회 앞에 등장한 이 사람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집사님들이 어떻게 영접할 것인가?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병을 고치러 오는 사람이 이런 거창한, 인간적인 과시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그는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이 잘못된 생각....
그러나, 이 웃지 못할 얘기는 사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헌금을 많이 하니까, 하나님이  나를 잘 봐주어서 나를 천당에 보내 주시지 않겠는가!"하는 의식이, 우리의 마음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가 이만큼 교회에서 활동하고, 이만큼 봉사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어여쁘게 봐주지 않겠는가?.....
다분히 인간적인 신의에서 자기를 과시하고, 구원을 호소하고있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는 없습니까?
사람들은 때로, 선행이나 공로를 통하여 구원이나 은혜를 살려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에 끊임없이 우리에게 강조하시는 말씀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하나님 앞에 내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는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사64:6 - "...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롬3:23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엡2:8-9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수 있는 그 어떤 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을 축복하시고 은혜를 부으시며, 그들을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① 모세를 부르실 때, "나는 말주변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바로 앞에 갑니까!" 고백하였습니다.
② 기드온을 부르실 때, 그는 고백하기를 "나의 집은 므낫세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6:15)라고 고백했습니다.
③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에도 그는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1:6)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다는 자기 중심의 사람은 사용치 않습니다.
부족하지만,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기에, 주님이 시키시면 하고요, 주님이 가라시면 가겠습니다! 고백하는 사람을 주님은 사용하십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겪는 갈등, 특히 목회자의 입장에서 안타까운 것은 무엇입니까?
속은 하나도 변화되지 않은 채, 세상 적인 방법을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와서 세상 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추진하려는데 오늘 교회가 가진 문제입니다.
① 교직 생활을 하던 사람은, 교회에 와서 말하기를 "학교 식으로 교회를 이끌어보자!"합니다.
② 사업을 하던 사람은 사업하는 방법으로 교회일 을 하자고 주장합니다.
③ 정치를 하던 사람은 정치적인 방법에 의해서, 교회 문제를 이끌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시길,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지음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시도하는 오류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아만 장군의 이러한 생각, 이러한 오해는 바로 나 자신의 오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없으며, 인간의 공로와 열심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살 수 없습니다.

둘째로 나아만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은, 나아만은 자기의 문제 해결보다는 자기 신분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먼저 이스라엘에 당도하자마자, 왕을 찾아가 아람 왕의 친서를 전해 주었습니다.
아람 왕의 친서를 펴든 이스라엘 왕은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나니 이 글을 받는 즉시 그 문둥병을 고치시오"라는 내용 이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 글을 읽고 옷을 찟으면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이관대 어찌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가, 이것은 분명 아람 왕이 우리에게 시비를 걸려 함이라!"하면서 분개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 선지자는 자기의 집으로 나아만을 보내라 하였습니다.
교만에 찬 나아만이 이제 엘리사 선지자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엘리사 선지자는 자기 종 하나를 내어 보내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몸을 씻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나아만은 크게 날뛰면서 분노하였습니다.
그 분노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서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나아만은 병고치러 왔다는 이 중대한 목적을 지금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인정을 받는데, 더 커다란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질문 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나는 교회에 나오는가?".....
우리는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각자각자  다른 동기를 가지고, 다른 배경을 가지고  교회에 출석하기를 시작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목적에 초점이 없다면, 그 사람은 교회에 나오는 동기가 대단히 잘못 된 것입니다.
그 초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믿고, 구원받아, 변화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감사와 감격 때문에 오늘도 그 분을 찬양하며, 괴롭고 힘들고 어려워도 저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오히려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 목적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가 나를 알아주는가, 안 하는가, 나를 인정해 주는가, 안 하는가, 목사님이  나를 알아주시나 안 알아주시나, 이것에 더 커다란 관심을 갖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오늘 나아만의 얘기는, 요나의 이야기가 요-나의 이야기 인 것처럼,
나아만의 이야기는, 나-만의 얘기, 내 자신의 얘기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인정받기를 원하시면, 우리는 장소를 잘못 택한 것입니다.
사회의 라이온스 클럽이나 로타리클럽 같은 곳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거기서 인정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진실하고, 가장 중요한 목적이 있다면,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를 믿어 구원받고, 변화되어서, 새사람이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여기 성경에 나타난 나아만이 정말 들어야할 소리는 어떤 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를 들어서),"장관님! 어떻게 이토록 먼길까지 행차 하셨습니까? 이 누추한 교회를 찾아 주셔서 참으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장군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아만이 들어야 할 소리입니까?
나아만이 들어야 할 진정한 소리가 있다면, "당신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이렇게 이렇게 하시오!"라는, 소리를 나아만은 들어야 합니다.
나아만이 들어야 할 소리는 자기를 인정하고, 자기를 필요 없이 칭찬해 주는 그런 아첨의 소리가 아니라, 이 사람의 아픈곳을 지적해서 새롭게 하라는 메시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아만의 잘못은, 자기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내가 인정받고 있는가"....라는데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시간, 당신이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는데 관심을 두고,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 즉 나는 예수 믿고 내 생활이 얼마나 변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넘어지기 쉬운 문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동기가 잘못 되지 않았는가를,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가슴 아프게 지적 받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나아만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보다도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목사님보다도 선포하는 그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나아만은 자기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렸지만, 하나님보다는 인간 엘리사에게 더 커다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나와서 나를 영접할 줄 알았는데, 나오지 않았다고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내가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치료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사명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 엘리사를 보여 주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앨리사 목사님은 이 진리의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말을 해야 할텐데, 하나님의 말씀, 그 메시지에는 관심이 없고, 그 사람이 나를 어떤 태도로 맞이했는가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사람은 메시지(설교) 보다, 메신저(전하는 사람)에 더 커다란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기대를 갖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에게 더 커다란 관심을 갖고 계십니까?

엘리사는 전하기를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몸을 씻으시오, 당신의 몸이 나을 것이요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에는 관심이 없고,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어떤 태도로 나를 영접했는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꼴도 보기 싫어 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전한 메시지(설교)까지도 거부한 것입니다.
만약에 끝내 요단강에 가서 그 몸을 씻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문둥병이 점점 악화되어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사람들과 단절된 집에서 고통 가운데서 혼자 지내며, 구멍으로 넣어주는 주먹밥을 타서 먹다가 결국, 죽어 버리는 비참한 신세가 아닙니까?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으며,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능력 있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요15:7 -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했습니다.
 요5:25 -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행20:32절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과 작별인사를 할 때에, "내가 너희를 주님과 그리고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말하는 것 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이나 권력자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부탁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말씀하기를,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든든히 세우는 것은, 세상의 물질이나 권력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행18:5절에도 보면, 바울이 그 말씀에 붙잡혀 담대히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붙잡힌 삶, 이것이 오늘날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삶인 것입니다.
나아만은 인간 엘리사에게 더 큰 관심이 있었지만 그러나, 말씀을 전하는 자 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네 번째, 나아만을 통해서 주시는 주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방법에만 민감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외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몸을 씻으라".... 이 방법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태도에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지금 불평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마중 나와서 나를 영접할 줄 알았는데,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목욕하라고?"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나아만의 불평과 투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내 생각에는"... (따라서 합시다.) "내 생각에는... "
이 사람이 지금 누구 앞에서 누구의 방법을 고집하고 있습니까?
자기의 방법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하나님의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방법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2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이 말을 풀어서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고향엘 가면 다메섹 강도 있고, 아마나와 바르발, 이 강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강보다 훨씬 아름다운데 하필이면 요단강이냐?"
그러면서, 이 사람은 그 방법을 비판하면서, 이 방법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아만으로 하여금 그 요단강에서 일곱 번이나 몸을 씻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주셔도 그 사람이 믿는가!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해도 그 명령 앞에 순종하는가!.....
이 사람의 믿음과 순종을 하나님은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각보다 전혀 다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기 위해서 전혀 엉뚱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 하신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살인 행위입니다. 당시 제사 법에도 맞지 않습니다. 사람을 잡아 바치는 것, 이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위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삭을 잡아 번제물로 바치라 하십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전혀 엉뚱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가를 하나님은 보시길 원 하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전능의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한마디 불평도 없이 다만 그 말씀에 순종했더니, 이삭을 죽으려 내리치던 칼을 멈추게 하셨으며, 뒤를 보니 수양을 준비 해 놓으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주님이셨습니다. 준비하시는 하나님, 예비하시는 하나님, 이런 멋진 하나님을 여러분도 체험하시길 축원합니다.

교회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들도 참으로 다양합니다.
제각기 옳은 주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생각하기를, 자신의 방법이 가장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흥하는 교회일수록, 자기 방법에 대해서 철저하게 깨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신덕교회가 그런 교회인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자기의 방법보다도 하나님의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옳다고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내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 이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믿음과 순종에 대해 얼마나 강조 하셨습니까?
성경에서 믿음과 순종이라는 두 가지 단어만 뺀다면 아마도, 성경의 내용은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2:20절에서 자신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듯이 이제 우리의 죄된 모든 과거, 자기의 고집과 방법도 십자가에 철저하게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부활하신 것처럼,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금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말씀 하셨습니다.
주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그 방법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래서, 고침 받고, 치료받고, 구원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무거운 외식과 겉치레, 그리고 허영의 옷은 다 벗어 던지고,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빈손 들고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옵소서!   십자가의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죄사함 받아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 합니다.
하나님! 우리 가정을 구원해 주옵소서!
이 결단, 이 회개, 이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나아만의 신앙의 모습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교훈을 찾아,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나의 신앙을 돌아보고, 새롭게 다짐하여서, 우리의 생활이 좀더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권속이 되시길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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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합시다. 소리를 내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나를 위해 흘리신 보배로운 피를 바라보고 그 피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결단의 시간, 지금이 바로 회개의 시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나아만을 통하여 우리에게 귀한 교훈의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아만의 잘못이 오늘 나의 잘못임을 깨닫고, 가슴을 치는 아픔으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빕니다.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돈으로 은혜를 살려고 했던 나아만의 모습이 바로 나였습니다.
진정한 문제는 잊어버리고, 나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교만했던 모습들,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말씀을 전하는 이의 허물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깊은 뜻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보여지는 환경과 사건들만을 바라보며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는 나아만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 이였습니다.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원하옵기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가슴깊이 깨닫고, 두 주먹을 꼭 쥐며 결심했던 일들이 우리의 행함으로 연결 될 수 있도록, 성령님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