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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실인이 될 자 삿 13:1-7현대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를 우리는 고립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간섭을 원치 않는 그런 비간섭주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말해주는 것을 권면해 준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참견한다고 생각하고 간섭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지요. 그런 극단의 비간섭주의는 가정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코미디의 내용이 되었던 아내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지금은 실제적으로 가정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옷을 차려입는 아내에게 "여보, 어디 가오?"라고 물을 때 그렇게 묻는 남편을 간 큰 남자라고 코미디는 말했는데 요즘은 사실상 "내가 어디 가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요?"라고 쏘아붙이는 냉소적인 그런 모습들을 부부 사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간섭하지 말라"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다 보니까 사회적인 분위기가 극도의 개인주의가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잘했든, 혹은 부족해서 좀 이야기 해주고 싶어도 아예 관심을 갖지 않아 버리는 그러한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6절에 보면 마노아의 아내가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을 듣고 감격하고 흥분해서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부부의 모습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일들을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가정, 삼손의 부모의 모습들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들이 참으로 원만한 부부였고, 자녀가 없어서 안타까워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정말 하나님이 축복하신 가정이라고 하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가정이라고 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부부였고 기도의 부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게 나와 간절히 구하기를 원하는 주님, 우리가 주님 앞에 간절히 구할 때에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을 그들이 신뢰하기에 아마도 그들 부부는 오래도록 잉태하지 못하면서도 잉태를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삼손의 가정, 이 가정을 참으로 하나님이 축복하신 순수하고 복된 가정이라 그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비교를 굳이 한다면 사사기 다음에 나오는 사무엘서의 사무엘 가정보다도 더 복된 가정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무엘의 부친이었던 엘가나, 그리고 그 유명한 기도의 어머니 한나, 하지만 사무엘에게는 또 다른 어머니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말은 아버지 엘가나가 두 명의 부인을 두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삼손의 가정에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당시에 여러 명의 부인을 두어도 별 흠이 되지 않는 그런 시대에 오직 한 사람의 부인, 한 사람의 남편의 가정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대적인 흐름과 시대적인 유행을 따라가지 않았던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행따라 하지 않기가 굉장히 어렵지요. 여러분, 머리 칼라로 물들이지 않은 분 계신가요? 아마 여성이면 열 중의 아홉은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좀 진하냐, 덜 진하냐 그런 차이는 있어도 거의 하셨을 거예요. 우리 집사람도 했어요.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가 멀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작은 예로 든 것뿐입니다. 정말 유행을 우리가 외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남성들 겨울철 되면 꺼내 입는 양복, 잘 드라이클리닝해서 두었다가 입는데 그 사이에 유행이 바뀌어서 작년에 했던 양복은 깃이 좁았는데 갑자기 올해에 깃이 넓은 양복이 유행해 버리면 새 것인데도 불구하고 입으면서도 뭔가 좀 떨떠름하지요. "요즘 유행은 지나간 옷인데.." 그렇다고 또 새 양복을 구입할 수도 없고.. 이런 일들이 우리의 생활에 비일비재합니다 만은 그런 것들은 우리가 따라한다고 해서 크게 흠이 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를 더 두거나 아내가 남편을 더 두거나 하는 이런 문제는 사실 심각한 일입니다. 유행이라고 하지만 시대 풍조라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 대단한 결단이 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삼손의 가정은 그런 면에서 참으로 순수한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고 있는 그런 가정이라 안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 삼손 부친의 부부의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오늘 이 말씀을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삼손이 태어날 때에 시대적 배경, 참으로 안타까운 배경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사기를 지금 13장까지 오면서 이제 사사기하면 머리 속에 전형적인 패턴을 우리는 이제 암기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더라" 두 번째 모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노하셔서 어느 나라의 손에 붙이셔서 몇 년동안 그들이 고통을 받더라" 그들이 고통을 견디다 못해서 "여호와 앞에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누구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더라" 전형적인 패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1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께 범죄하고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통해서 40년동안이나 그들을 채찍하셨지만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패턴이 깨져버린 거예요. 대단히 충격적인 부분입니다. 그전에는 잘못을 했다가도 그것을 알든지 모르든지 잘못된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채찍하시면 "아야!"하고 그들이 깜짝 놀라면서 "이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구나" 눌물, 콧물 흘리면서 회개하는 모습이 있었어요. 그러면 아무리 그들의 잘못이 컸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불문에 붙이시고 사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서 다시금 평안으로, 은혜로, 축복으로 인도하셨는데 이제 이스라엘은 부르짖는 일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이게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앙 일간지 시사 만화 중에 '광수생각'이라는 만화가 있어요. 아주 히트를 쳤던 만화인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축구 시합을 하는데 한 팀이 5:0으로 지고 있었어요. 아무리 뛰어도 상대의 적수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5:0으로 졌어요. 선수들이 분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감독이 울고 있는 선수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울어라. 분해하지 않으면 다음에 이길 수 없다. 지금 흘린 눈물은 후일에 우리에게 약이 될거다" 만약에 5:0으로 진 선수들이 "그래. 졌다. 잊어버리자. 잊자" 그리고 툴툴 털고 나왔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지금 졌다고 잊자고 잊어버리자고 그리고서 아주 담담하게 무감동으로 운동장을 나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블레셋에 또 우리 졌구나. 또 우리 얻어 터졌구나. 이제 우리 지배당하고 살지 뭐"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졌다. 그러니까 잊어버리자" 이게 아니잖아요. 정말 분해하고 억울해야 하지 않습니까? 받은바 사명을 능력으로 감당하지 못하고 한해를 살아와서 벌써 11월 셋째주, 분해하고 억울해 하고 눈물 철철 흘려야지요. 가슴을 쥐어뜯어야지요. "하나님께서 내게 사명을 주셨는데 그 사명 제대로 감당 못하고 벌써 한 해가 왔으니 주님 어떻하면 좋습니까?" 데굴데굴 굴러야지요. 그런 눈물, 그런 사람의 몸부림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까? 신명기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억하라'입니다. 신명기 8장2절에 보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광야에서 40년동안 너희를 인도하신 것을 기억해라"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잊자"가 아닙니다. "실패했으니까, 실수했으니까 잊자"가 아니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은 은혜도 쉽게 잊고, 아픔도 쉽게 잊어버리는 거예요. 이제는 부르짖는 것조차 잊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말씀에 영적인 배경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배경을 여러분이 마음속에 두시면서 이 말씀을 들으셔야 됩니다. 삼손이 등장한 시기는 그러므로 영적으로 암흑 시기입니다. 캄캄한 시기입니다. 부르짖음조차도 없는 시기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단지파 가운에 마노아라고 하는 가정을 선택하셨습니다. 아이가 없어서 늘 기도하고 호소하던 그의 가정에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아내에게 나타나서 "너에게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할텐데 그 아들이 보통 아들이 아니다. 그 아들을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구원할 자로 아들을 주실테니 그 아들을 이렇게 이렇게 키워라" 그리고 세 가지의 내용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게 하라. 두 번째는 부정한 것을 먹지 말게 하라. 세 번째는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게 하라" 사실 이 말씀은 민수기 6장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에서 가나안으로 출발하게 하실 때 모세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예요. "나실인의 규례는 이러이러하니라" 세 가지가 특징입니다. 우선 외형적으로는 머리를 길게 해서 외모로 구별이 되게 했습니다. "아, 저 사람은 나실인이구나" 지금 이스라엘의 정통 유대인들이 그 나실인의 외형을 본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외형적인 나실인의 모습보다도 내면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우선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포도주는 야인입니다. 야인이라고 표현된 이 포도주는 발효된 포도주를 말합니다. 포도와 설탕을 넣어서 담궈두면 맛있는 포도즙이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잡수셔도 큰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이것인 1년, 2년 오래가기 시작하면 발효가 되어서 알콜 도수가 높은 포도주가 됩니다. 그때는 아무래도 우리 크리스챤이 먹기는 부담이 되지요. 왜냐하면 이미 발효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독주는 쉐칼입니다. 쉐칼이라는 독주는 도수가 높은 술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의 소주, 중국의 빼갈, 러시아의 보드카 같은 것입니다. 독주입니다. 이 독주를 즐겨먹는 사람들은 주로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북한의 지역의 사람들, 중국 북부, 러시아의 사람들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 독주를 많이 마셔요. 술에 대해서는 자문에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술 먹은 사람의 삶의 상태가 마치 배 위에, 돛단배 위에 올라가서 그 돛대 위에서 잠자는 사람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그 돛대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어도 떨어지기 십상인데 그 돛대 꼭대기 위에 잠자는 사람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위급한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까? 술취한 사람의 상태, 독주를 즐겨 찾는 사람의 상태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여기서는 만지지 말라고 하는 말씀도 표현이 됩니다. 부정한 것의 대표적인 것은 사체입니다. "죽은 것들, 사람이든 짐승이든 죽은 것들은 만지지 말라" 이 죽은 것들은 또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정한 것은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레위기 11장에 보면 정결법에 여러 가지들이 나오지요. 광야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특별히 정결된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우선 네 발 달린 짐승이어야 했습니다. 소나 양이나 돼지나.. 그리고 한 단계 더 들어가서 네 발은 달렸으되 되새김질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거기서 돼지는 탈락을 합니다. 네 발은 가졌지만 되새김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또 구별합니다. 굽이 갈라진 짐승이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에게 남은 것은 소와 양과 염소 같은 것들이 그들의 주된 음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 생선 같은 경우는 비늘이 없어야 우리는 정력제라고 좋아하지만 성경은 반드시 비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늘이 없는 생선은 먹지 말지니라" 이것은 광야시대에 특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훈련을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훈련소 음식이라는 말입니다. 훈련소에서 음식 아무거나 먹을 수 있나요? 딱 지정한 것, 정해진 것, 정해진 시간에 먹지요. 사회생활하면서는 아침에 늦잠 자면 아침 거를 수도 있고, 점심을 두배나 먹을 수도 있고, 저녁 안 먹을 수도 있고, 밤 11시에 먹을 수도 있지만 훈련소에 가면 그런 법은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정확하게 7시에 식사하고, 12시에 점심 먹고, 5시에 저녁 먹고, 먹든지 말든지 시간은 딱 정해져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 나오지 않아도 내가 싫어하는 것 나와도 먹어야 됩니다. 한 두번 거부해 보지만 결국은 다 먹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식생활이 규칙적이지 않는 사람들이 군에 가서 1년쯤 지나고 오면 얼굴에 살이 쪄서 오잖아요. 규칙적인 식생활을 하다 보니까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훈련소 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정결법의 그 모든 조항들은 훈련소에서 먹어야 하고, 구별해야 할 그런 내용들입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느니라" 이제 우리가 먹는 것에 있어서 굉장히 자유스러워졌어요. 비늘이 없는 것도 여러분 다 잡수시잖아요. 돼지고기 다 잡수시잖아요. 그것 먹으면서 "앗, 이거 정결법에 걸리는데.." 이러고서 부담스러워 하는 분은 없어요. 이제는 먹는 일에 대해서 굉장히 자유스러워졌습니다. 단, 그것이 하나님께서 감사할 수 있느냐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음식을 놓고서 기도해야지요. 아이들 기도하는 것 보면은 우리 꼬마들 교회학교 애들 보면은 잠깐 감고 뜹니다. 기도했다는 거예요. 1초도 안 걸려요. 그래도 그 마음에 기도한다고 하는 그 마음인데 가능하면 조금더 가르쳐 주면 좋겠어요. 아무리 급해도 "하나님 아버지, 이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이거 5초 밖에 안 걸리는데 그 정도는 해야 되잖아요. 눈 질끈 감았다 떠버리면 도대체 무슨 기도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아이보다도 못한 어른들이 많아요. 주변에 친구들이 있어서, 주변에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것조차도 못하고 눈치 보다가 얼른 집어먹는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도 있어요. 감사하지 못하고 먹을 것은 먹지를 마세요. 감사하지 못하고 먹는 것.. 어떤 분은 그래요. "목사님, 술은 어떤가요?" "그렇게 드시고 싶어요? 그럼 감사하고 드시지요" 제가 먹지 말라고 그러지 않았아요. 그것 잡수시고 싶으면 "하나님 아버지, 술을 주셔서 막걸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막걸리 먹고 주의 영광 위해서 일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거리낌이 없으면 감사하고 잡수세요. 그런데 술은 어떻게 됩니까? 술은 먹으면 우리의 삶에 절제를 풀어주지요. 절제된 삶을 해야 되는데 절제된 삶을 풀어주니까 이게 문제가 생기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어요? 이것은 바울 사도가 굉장히 폭넓고 자유롭게 하신 말씀하신 것 같아도 굉장히 지혜롭게 말씀하신 거예요.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을 먹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삼손을 그 가정에 주시면서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날까지 나실인이 될지라" 이런 나실인을 가리켜서 영원한 나실인이라고 말합니다. 나실인은 일시적인 나실인도 있어요. 어떤 특별한 사명을 위해서 머리를 자르지 않고 독주를 마시지 않고 그리고 부정한 것을 먹고 만지지 않으면서 일정한 기간동안 나실인으로 봉사하다가 그것을 마치고 나면 다시 돌아가서 머리를 자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시적인 나실인도 있지만 지금 삼손의 경우에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동안 나실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삼손과 더불어서 사무엘이나 세례 요한이 영원한 나실인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을 가리켜서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는가요? 이웃들이 뭐라고 부릅니까? 여러분의 주변의 사람들이 뭐라고 부릅니까?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지. 교회 다닌다며?" 여러분 돌아가시면 묘비에다가 뭐라고 써야 됩니까? "성도 아무개 지묘" 여러분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아멘! 여러분들 주변에 다른 사람들을 부를 때 그건 "성도 아무개" 사실 집사 아무개, 권사 아무개 이렇게 얘기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가 성도 아무개입니다. 그런데 이 성도라고 하는 말이 이게 보통 표현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가리켜서 성도라고 할 때 그 말은 곧 영원한 나실인이라는 말입니다. 자, 나실인에 대한 설명을 잠깐 드리겠습니다. '나지르'라고 하는 말이 '나실인'이라는 뜻인데 이 말은 '나자르'라고 하는 말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구별하다'고 하는 '나자르'에서 '나지르'라고 하는 '나실인'이 파생된 말이 나왔습니다. '구별되고 거룩한 자' '거룩하게 구별된 자' 이것이 나실인입니다. 성도가 뭔가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부르심에 응답한 자' 이게 성도예요. 여러분들은 21세기의 나실인인 줄 믿습니다. 그것도 잠깐 일시적인 나실인이 아니라 여러분께서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그날부터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시는 날까지 영원한 나실인인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영원한 나실인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 말씀 4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누구보고 하는 말씀입니까? 삼손의 어머니가 될 분에게, 마노아의 아내에게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 어머니들 잘 들으셔야 됩니다. 자식이 하나님께서 구별하시고 거룩하게 한 나실인을 낳을 사람들은 그 어머니도 나실인 수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가질 때에 그래서 가족 계획을 해야 합니다. 술 잔뜩 취해서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부부생활을 통해서 아이를 가지면 그 아이의 꼴이 뭐가 되겠어요. 그 아이가 복을 받겠습니까? 지금 이 세상에는 그런 식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아요. 그리고 그 아이가 잘 되기를 기도합니까? 아이를 가질 때에는 계획을 해야 돼요.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에 자녀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셔야 합니다. 아이를 가질 때부터, 그리고 이 아이가 태중에서 자랄 때부터 하나님이 이 아이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구별하셔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축복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꼭 주의 종을 세우는 것만이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된다고 하는 것이 목사가 설교하는 일만 영적인 일이 아니예요. 여러분이 직장에서, 여러분이 가정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그 모든 일들이 영적인 일들이고 거룩한 일이예요. 자녀를 가질 때 얼마나 신중하고 하나님 앞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자녀를 가져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자녀를 낳고 나서 엉뚱한 소리 하면 안돼요. "야, 너는 안 가지려고 했는데 어떻게 생겼어" 이런 무식한 얘기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그 아이의 자존감을 완전히 깨뜨려 버리는 이 기가 막힌 살인 행위를 어떻게 아이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거예요? 이거 모르니까 하는 얘기겠지요. 아이를 죽이는 얘기 아닙니까? "너는 내가 원치 않았는데 생겼어" 이게 말이 되는 얘기예요? 심지어는 어떤 사람들은 "내가 너를 지우려고 약까지 먹었는데 너 낳았다" 이 무지함은 용감하다는 것이 여기서 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얘기를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건가요? 정말 실수해서 그랬더라도 그 얘기는 무덤까지 그 얘기는 하면 안되는 것이지요. "너는 정말 하나님이 축복한 아이야. 엄마, 아빠가 정말 너를 축복하고 하나님이 축복해서 너 생겼어. 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아이야" 이렇게 축복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살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말이 가능합니까? 과거에 우리 부모들이 무지해서 그런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두 번 다시 그런 어리석음과 무지의 모습을 반복해서는 안돼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 '나자르' 하나님의 백성 나실인을 삼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가 영원한 나실인이 된 줄로 믿습니다. 나실인이 된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사명, 여러분 성경에 보면 약 일곱 명의 사람들이 탄생 때부터 기사가 나와 있어요. 아담은 어릴 때는 아니지만 생명을 창조하시면서 그 창조의 과정이 나와있기 때문에 그를 포함한다면 7명, 그를 뺀다면 6명입니다. 성경에 이삭, 야곱, 그리고 오늘 본문의 주인공 삼손, 그 다음에 사무엘, 신약에 가서는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 그분들은 탄생 기사가 나와 있어요. 그런데 이 탄생 기사가 나와 있는 이 7명, 아담을 포함하면 이 7명의 사람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가운데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일은 반드시 그 시대에 역사적인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이 시대의 풍조를 바꾸어 가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라는 거예요. 21세기, 첨단 과학 시대입니다. 물질적 풍요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음이 없는 시대인 것처럼 영적으로 극도의 암흑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을 나실인으로 불러 주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요. 이 시대의 도덕적 타락을, 이 시대의 영적인 타락을 이 패러다임을 새롭게 바꾸어 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계절로, 하나님의 세계로 바꾸어 가는 일입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오늘 평안의교회가 이 역사적 부름에 응답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21세기에 나실인으로 부름받은 여러분들이 이제 여러분들이 감당해야 할 분명한 역사의식이 분명해져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가진 줄로 믿습니다. 이제 그 눈을 가지고 이 13장을 계속해서 바라보시면 보일 것입니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거룩한 백성 나실인이 어떤 길을 가야 하고, 어떤 길을 갈 때 주님이 원하지 않고 분노하시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나실인이 될 자, 삼손에게 허락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그의 가정을 통해서 실천되어 가듯이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여러분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원합니다. 21세기의 나실인으로 우리를 부르신 주님, 나실인답게 살아가게 하시고, 나실인의 능력을 소유하고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