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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위하라

삿 7:9-18

어제 저녁,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의 8번째 맞는'샤론의 밤'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해가 갈수록 다양한 장르와 첨단 시설들을 사용해 가면서 더 세련되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신앙고백적인 내용을 담은 '가스펠송'을 많이 불렀는데, 최근에서 C.C.M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더 많이 애창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샤론의 밤 순서 중 사회자가 소개하는 것을 보니까 'Contemporary Christian Dance' C.C.D, 라는 새로운 장르가 선을 보여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앞으로는 별 것이 다 나오겠다. 'C.C'만 붙이고 뒤에 뭐든지 다 붙이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여간 우리의 중심이 중요합니다.
댄스를 해도, 노래를 해도, 그림을 그려도, 무엇을 해도 중심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세속적인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어떤 모양이든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려고 하는 그러한 우리의 목표가 분명하다면 우리가 순수하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사회적으로 진행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바로 그런 순수한 목적으로 되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지난 시간에 300명의 용사들을 선택하신 후에 진행된 과정입니다. 이 기드온에 관한 말씀은 범위가 꽤 넓기 때문에 몇 주에 걸쳐서 나누어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300명을 선택할 때의 기준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담대함"이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은 돌아가야했습니다. 전쟁에서 두려움을 지닌다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휘관들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부대의 사기가 얼마나 높은가?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기가 떨어지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만, 전방의 대대장이 월북한 일로 인하여 최전방을 지키던 한 부대가 후방에 있던 저희 부대와 긴급히 교대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최전방의 한 부분을 완전히 비운채 이동하는 일이라 극도로 위험을 감수하는 극비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23년이 넘은 옛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부대를 교대한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대대장이라고 하는 중견 지휘관이 북한으로 넘어가 버렸기 때문에 같은 소속이었던 저희부대 10,000여명의 장병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전방을 지킬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후방의 최정예 부대로 평가받던 저희부대와 교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사기가 떨어지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기란 군인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은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통하여 군대를 모았을 때 무려 32,000명이라는 많은 숫자가 모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자들이 있음을 아시고 기드온을 통해서 그런자들은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300명을 선택할때의 두 번째 기준은 "절제된 모습"이었습니다. 뜨거운 퇴약볕아래에서 훈련을 받다가 물을 먹게 되었으니 얼마나 고대하던 시간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시간에 그들의 절제된 모습을 보기 원하셨습니다.
물을 먹는 태도를 보니 참으로 다양한 모습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모습은 바로 골짜기 건너에 미디안 연합군이 진을 치고 있음을 의식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물을 떠마시는 자세였습니다.
아무리 뜨거운 중동지역이라고 해도 전쟁에 임한 군사가 시냇가에 텀벙텀벙 뛰어 들어가도 안될 것이고, 머리를 쳐박고 물을 핥아먹어도 안될 것입니다.

한 손에 창을 들거나 아니면 창을 옆에 꽂아두고 두 손으로 물을 뜨면서도 앞을 경계하는 긴장감 속에서 물을 마시는 사람들을 따로 구별하라고 하셨고 그들이 300명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과 절제되고 훈련된 모습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평소 교회를 다니는 분들을 모두 '성도'라고 부르지만, 사실 알고보면 성도들도 여러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맨 처음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를 출석하는 분을 우리는 '원입인'이라고 정의합니다. 그 다음에 1년 이상 교회생활을 한 분들 중에서 신앙고백적 삶을 살기 원하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는데 그분들을 '세례인" 이라고 하며, 만 18세 이상이 되면 "입교인"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만 3세 이하의 어린이들도 세례를 받을 수 있는 데, 이때는 부모님의 신앙과 책임에 의거하여 세례를 베풀게 되며, 이들을 유아세례인이라고 합니다.

교회 임원이 되는 일도 보편적으로, 세례 입교한 지 2년 후부터 집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며, 30세 이상이 되면 권사, 35세 이상이 되면 장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적인 단계가 높아질수록 요구하는 단계도 점점 높아집니다. "주일을 성수하십시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봉사생활을 하십시오" 내년부터 우리 평안의교회 집사님이 되시려면 성가대나 교회학교에서 섬기는 봉사생활의 현직에 있는 분이여야 합니다. "나는 내년부터 집사가 되면 봉사합니다" 그것도 안됩니다. 올해에 이미 봉사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평안의교회에서 집사가 되는 일은 하늘의 별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권사가 되는 일은 또 다릅니다. 거기에 베델성서대학 2년 과정을 해야 되겠고, 많은 사람들을 권면하고 기도해 줄 수 있는 영적인 성숙한 사람들이어야 하겠고, 전도의 열매가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저의 친구 목사님 교회는 장로가 되려면 먼저 자기의 전 재산을 교회에 기증하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장로 추천을 해준다고 그래요. 잘하는 일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만큼 장로는 자기의 전 삶을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작정하는 거예요. 아무나 장로되려고 마음 먹지 마세요. 꿈에도 꾸지 마세요.

이렇게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서 요구하는 절제와 훈련의 단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급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숙도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더 헌신을 요구하고 더 신앙의 온전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급처럼 생각해서 내가 교회 다닌지 5년이 되었는데 집사를 안시켜준다느니, 내가 집사 된 지가 10년이 되는데 권사를 안시켜준다느니 이런 철없는 이야기는 평안의교회에서 사라진지 오래되었어요. 그것은 계급이 아니고 진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 목에 걸고 있는 이 스톨은 곧 멍에입니다. 목사는 평생토록 이 멍에를 메고 삽니다. 소의 멍에를 매어야 짐도 싣고 논밭도 갈 듯이 목사는 평생을 하나님이 주신 멍에를 메고 살겠다고 이것을 하는 것이지 멋있게 보이라고 코디한 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목사는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다른 직업을 갖지 않습니다. 때때로 생활이 어렵다고 이것 저것 하는 분들이 있지만 성경적인 정신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오직 여호와를 위하여 살든지 죽든지 여호와 만을 위하여....." 기드온 300명의 용사들은 그렇게 선택이 되어진 것입니다.

오늘 그 선택되어진 300명, 그런데 기드온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좀 남았습니다. 말끔히 가시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오늘 본문 말씀 12절에 보니까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사람 연합군들을 정찰해 보니까 그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메뚜기의 중다함 같이 많고 그들이 타고 오고 끌고 온 약대의 숫자가 해변의 모래의 숫자만큼 많더라" 좀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얼마나 많았는지를 잘 알려주는 것이지요. 그 상대방을 보고 또 나를 보니까 너무 작게 보이는 거예요. "300명 가지고 될까?"

제가 예배 나오기 직전에 한 책을 보았는데 비교에 대한 책을 보았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비교합니다. 목회자도 비교합니다. 옆의 큰 교회의 성장하는 교회가 있으면 늘 그 교회 바라보면서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뭐가 잘났길래 저렇게 큰 교회를 하고 교회가 부흥하나? 나는 도대체 뭐가 부족하길래 맨날 이렇게 미자립인가?"
사업을 하는 사람도 상처를 받습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잘난 것도 없는데, 배운 것도 떨어지는데 사업은 날마다 날마다 평수를 늘려가는데 나는 맨날 이렇게 1년 지나면 또 폐업하고, 또 다른 곳에 장사하러 물색하러 다니고 나는 왜 그런가?"
다른 집의 가정을 바라봅니다. "저 집은 별것도 아닌데 행복해서 하하호호 하는데 우리 집은 모든 것을 갖추었는데 왜 맨날 이렇게 우거지상인가?" 그저 사업도 비교, 가정도 비교, 교회도 비교 온통 비교 비교하면서 늘 상처를 받고 기쁨이 없어요. 그러면 비교는 나쁜 것인가? 여러분 비교는 나쁜 것입니까? 문제는 비교가 비교 자책 문제가 아니지요. 비교를 어떻게 우리가 적용하는가가 나쁜 것이지요.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를 뽑을 때 뭐라고 그랬습니까?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 그 얘기는 뭐예요? 그 3,000명이나 되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누가 지혜로운지, 누가 더 성령이 충만한지 비교해서 뽑았을 거 아니예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비교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자기비하적인 그런 평가는 늘 상대방과 자신 모두에게 불행한 거예요. 우리의 두려움의 대부분은 비교에서 오는 것입니다.

미디안 연합군을 보니까 메뚜기처럼 많은데, 그리고 우리를 보니까 300명 밖에 안돼요. 기드온의 마음속에 잔잔한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 갖고 될까?" 그 마음을 주님께서 아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철저하게 알고 계신지 몰라요. 우리의 작은 시련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작은 일이라고 해서 우리 하나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기드온을 새롭고 강하고 담대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배려를 하셨습니다. 13절 이하의 내용은 기드온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입니다. 기드온에게 "네 부하 한 사람과 함께 적진으로 한번 가보아라" 표가 나지 않도록 변장을 했거나 여러 가지 나름대로 애를 썼겠지요. 부하 부라라는 장수를 데리고 갔을 것입니다.

적진에 가까이 가서 그들의 장막 근처에 도달했을 때 그들 중에 서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야, 어젯밤에 내가 꿈을 꾸었는데 이상한 꿈을 꾸었다" "무슨 꿈이냐?" "글세, 저쪽 진영에서 보리떡 한 덩어리가 우리 진으로 막 굴러오더니 우리 장막을 다 무너뜨리더라. 이게 무슨 꿈일까?" 그 얘기를 듣던 동료 군사가 말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일거야. 그가 300명이라고 하는 사람을 추리고 추려서 용사를 만들었다는데 그들이 우리와 싸워서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 아닐까?"

해석까지 다 해놓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기드온은 "아, 이거구나. 하나님께서 내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이곳으로 가보라고 하셨구나" 기드온은 즉시 자기의 진으로 돌아와서 300명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일어나라"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보고 일어나라고 한 것이 아니겠지요.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이제 일어설 때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이제 두려움에서 걷어차고 일어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지요. "일어나라. 일어나라.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우리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기드온이 달라졌습니다. 확신을 가진 기드온이 달라졌어요.

요한일서 4장에 보면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이긴 것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라" 믿음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우리의 삶에 승리를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믿음을 통한 확신과 신뢰가 가득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의심이 있으면 안됩니다. 조그마한 의심도 안됩니다.

기드온을 향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큰 용사여,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기드온이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자기에게 감당되어지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내가 큰 용사라니요? 나는 지금 포도즙 틀에다가 벼이삭을 까먹는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이고 집안이나 모든 가정에서도 낮은 자요, 작은 잔데 제가 큰 용사라니요?" 그렇지요. 현재적인 기드온의 모습은 큰 용사의 모습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서 쓰실 때 큰 용사가 될 것이고 네 마음속에 신뢰와 믿음을 줄터이니 그 믿음 가지고 큰 용사가 되라고 하는 미래지향적인 말씀인 줄 믿습니다. 기드온의 마음속에 이제 믿음이 생겼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큰 사람입니까? 믿음을 가진 자가 큰 사람인 줄 믿습니다. 믿음의 분량만큼 일할 수 있어요. 그래서 주님도 우리에게 믿음이 없는 자와 믿음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고, 믿음이 있는 자를 향해서도 믿음이 적은 자와 믿음이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이 큰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평안의교회를 출입하는 여러분들은 들어올 때는 믿음 없는 자로 왔으나 나갈 때에는 믿음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들어올 때는 믿음이 적은 자였고, 의심하는 자였으나 나갈 때는 큰 믿음을 가진 큰 용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보리떡 한 덩어리가 굴러왔다고 미디안 용사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보리떡은 뭘 말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4장이나 누가복음 9장에 보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의 비유가 나옵니다. 자세히 보면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라고 그랬어요. 요한복음에 가보니까 요한복음 6장에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라고 보다 정확하게 표현을 해놓았습니다. 보리떡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반인이 먹는 양식입니다. 곧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김치'하면 한국의 음식을 상징하고, '햄버거'하면 서양 사람들의 양식을 의미하듯이 '보리떡'하면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보리떡 같이 별 것 아니지만 하나님이 쓰시면 연합군 메뚜기떼처럼 많은 연합군들을 승리할 수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숫자를 바라보고 숫자가 적음으로 인해서 염려하는 이들에게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믿음을 통해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새로운 사실을 우리 마음속에 새기고 담대해 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기드온은 돌아왔습니다.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적군의 꿈을 통해서라도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의 신뢰와 용기를 주기를 원하셨던 하나님, 이제 우리는 더 나아가서 우리의 좋은 믿음의 동역자들을 통해서 용기와 믿음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좋은 동역자를 두고 있다고 하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여러분, 선교회의 여러분 속회에 좋은 동역자가 있다고 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지지해 주고, 격려해 주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세워주고 높여주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자꾸 헐어내리고, 자꾸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 사람들은 가까이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이 세상의 풍파 때문에 힘들어하는데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지지하고 격려해주기를 원합니다. 하물며 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허는 자가 되지 마시고 세우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문제예요. 그저 말이 나오면, 대화가 시작만 되면 허는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지요. 깎아 내리는 말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어요.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자기가 깎지 않았다고 같이 옆에 있는 사람 같은 사람이지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 분명하셔야 합니다.
"그런 얘기 자꾸 하시려면 저는 가겠습니다. 이 모임에 오시려면 그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 분명하고 단호해야지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항상 중간에서 양발을 딛고 나서 좋은 쪽으로 기우는 기회주의자 되지 마십시오.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는 "하나님을 위하여" 언제나 분명해야 됩니다.

300명, 처음에 기드온에게 300명은 너무 작아보였어요. 그런데 이제 믿음과 신뢰가 생기고 나서는 300명이 많아 보였습니다. 본문 말씀 16절을 보니까 300명을 3대로 나누었다고 했어요. 300명을 3대로 나눌 수 있는 기드온, 그전에는 300명을 모아도 안되는데 이제는 3대로 나눌 만큼 여유가 생겼어요.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요즘에는 300명 그 용사들에게 기관총이라도, 수류탄이라도 주어야 할 판인데 그들에게 준 세 가지 무기는 아주 이상한 것들이었어요. 성경 말씀에 16절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와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추게 했습니다. 전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었어요. 횃불이 전쟁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불화살이면 모를까.. 빈 항아리는 또 무엇입니까? 배낭이면 몰라도.. 나팔은 또 무엇입니까? 신호하면 나팔수 하나면 되는데 모두에게 나팔을 주고 빈 항아리 속에 횃불을 감추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한가지 분명하게 정리하고 지나가야 합니다. 다윗이 고백했듯이 전쟁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 말은 곧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면 당신의 방법대로 할 수 있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인생의 전쟁에서 늘 내 방법대로 하지요.

제가 지난 주에 읽은 책 가운데 아주 재미있는 제목이 하나 있어요. "하나님은 언제나 3등이십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나서 읽어보았어요. 내 삶에 문제가 생길 때 나는 제일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지혜와 모든 자금을 동원해서 해결하려고 하지요.
그래도 해결이 안되면 친구와 이웃과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힘있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해결하려고 하지요. 그래도 안되면 그때서야 하나님을 찾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내게 언제나 3등이십니다. 내 사업에 문제가 생겨도 언제나 나는 제일 먼저 내 방법대로 해보지요. 내 경험, 내 노하우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안되면 그 다음에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지요. 그래도 안되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 구한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게 언제나 3등이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나, 가정이나, 자녀나, 부부나, 사업이나 무슨 문제든지 간에 하나님을 늘 3등의 자리에 놓아두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외롭게 만들지 마세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 1등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하나님은 1등이어야 합니다.

기드온의 머리 속에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하나님이 1등이 된 그런 가치관으로 바뀌고 나니까 300명도 많아요. 3대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사가 필요한 창이나 칼이 아니라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을 가졌으나 이제 300명, 어느 누구도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말들이 많아지는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훈련되지 않은 공동체지요. 500명, 1,000명 많이 모인 자리에서 회의를 하면 어떤 안건을 하나 내놓으면 그거 하나 가지고 설명하는데 만도 한 시간이 넘어요. 이 사람이 나와서 딴 소리 하지요, 저 사람 나와서 딴 소리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대표라고 모인 사람들이지만 그 모임에서 늘 하는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결국 전문가 몇 사람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이 일을 맡깁시다. 전형 위원이나 상임 위원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일을 맡기게 됩니다. 그 공동체가 늘 여러 가지 다양한 생각들로 마음에 일치를 보지 못하지요. 하지만 훈련되고 준비된 공동체는 의사가 분명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통하여 지금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되 나와 나의 쫓는 자가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나팔을 불고 내가 소리를 지르면 너희도 소리를 질러라" 다른 소리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일사불란하는 것입니다. 훈련된 공동체, 분명하게 절제된 공동체는 일사불란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선교회에서 회장님이 무슨 일을 하려고 안건 하나 내놓으면 "요즘에 그런 장사 해가지고 몇 푼이나 벌려고 그런다고, 요즘에 다 직장생활하느라고 시간이 없는데 누가 장사하느냐고.." 그저 이런 저런 얘기하느라고 안건을 내놓은 회장님 마음만 상하지요. "다시는 내가 일하나 봐라" 마음에 상처만 안고 돌아서게 되지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합니까? 아니면 "회장님이 올해에 1년동안 임기 중에 마음껏 일할 수 있도록 무슨 일이든지 우리가 돕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 거예요. 얼마나 차이가 있어요?

오늘 하나님께서 300명의 용사들에게 전쟁과는 상관없는 것 같은 그런 것들을 세 가지 준비하라고 했을 때 그들은 말없이 준비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소리지를 때 소리지를 뿐 아니라, 횃불을 들을 때는 들어야 하고, 나팔을 불때는 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도자의 리더쉽에 한마음이 되는 게 중요하는 것입니다.

역대하 20장 20절에 보면 모압과 암몬이 유다를 침공했을 때 여호사밧 임금이 놀랐습니다. 군사적으로는 싸움이 될 수 없는 그런 국가였습니다. 그때에 여호사밧 임금이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자기의 삶의 중심을 바꾸었습니다. 그전에는 바빴지요. 왕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시간을 내시라고 하면 얼마나 바빠서 시간을 내기가 어렵잖아요. 심지어는 주일 예배조차도 시간들을 못내고 다른 일에 여러분들 시간 쓰는 경우가 있잖아요. 기가 막힌 일이지요. 하나님과 인격적인 약속의 시간조차도 자기 인간을 위해서 쓰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쁘고, 그렇게 힘들고, 그렇게 죽어도 시간을 못내겠다고 하는 그 직장이 감기 몸살만 걸려도 과감하게 결근하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중심이지요.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만 하나님을 향해서 헌신하고자 한다면 환경,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오늘 우리는 말씀의 제목처럼 "여호와를 위하여" 지금 나팔을 들었으나, 빈 항아리를 들었으나, 횃불을 항아리 속에 감추었으나 그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너희들이 소리를 외칠 때, 여호와를 위하여 라고 부를 때 너희들이 같이 해야 한다" 전쟁의 목적이 분명하고, 싸움의 목적이 분명하고, 그들의 행동의 동기가 분명한 거예요.

"여호와를 위하여" 여호와를 위한 것이면 빈 항아리를 들면 어떻고, 나팔을 들면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의 모습에 있어서 방법은 신경쓰지 마세요. 제가 늘 여러분에게 주보에도 표현되어 있지만 늘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 "사람은 방법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신다" 방법, 방법 찾지 마세요. 방법에 있지 않고 승리는 하나님에게 있는 줄 믿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분이 하시는 일은 그분에게 맡기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을 따라가는 일입니다. 순종하는 일이예요.

오늘 이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다 지식이 많아요. 모든 사람들이 경험이 많습니다. 아는 것이 많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아는 것을 가지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를 들어서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나님을 귀하게 여긴다면 그가 세우신 주의 종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새로운 여러분의 삶에 방향이 잡히고 그리고 그 잡혀진 방향대로 믿음을 가지고 신뢰를 가지고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허락하신 귀한 말씀을 통해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이제 새롭게 결단하는 귀한 시간 되기를 원합니다. 평안의교회를 출입하는 이들, 들어올 때 발걸음과 나아갈 때의 발걸음이 달라지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