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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여리고를 무너뜨리려면? 여호수아 6 : 1 - 27 [1]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2]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3]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 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6]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7]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지니라 [8]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10]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1]여호와의 궤로
성을 한 번 돌게 하니라 무리가 진에 돌아와서 진에서 자니라 [12]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니라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13]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니라
[14]그 제 이 일에도 성을 한 번 돌고 진에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15]제
칠 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날 뿐이었더라 [16]일곱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18]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19]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20]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21]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22]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23]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
[24]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25]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26]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27]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여호수아 6장은 오랫동안 오해되어 온 말씀입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이 본문을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말씀으로 해석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이 말씀을 근거로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무장하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 분들은 주로 여호수아의 믿음을 강조하고 그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고 설교합니다. 물론 여호수아의 믿음은 본받을만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믿음은 소위 사회에서 말하는 적극적인 사고방식과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또 일단의 군사전문가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군사전략을 다루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군사학 교수였던 Faris Kirkland 중령은 어느 날 자신이 들었던 군사학 강의시간에 여호수아를 군사적인 천재로 묘사하는 어떤 강사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강사는 한 군사전략의 천재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이 장군은 적군의 영토의 심장부를 급습한 다음 그의 군사력을
양분하여 남쪽과 북쪽을 공격하는 작전을 벌였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심리전의 기술은 속도, 기습, 공포의 요소로 구성되었습니다." 그 강사는
"그렇다면 이 군사적인 천재는 과연 누구일까요?" 하고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학생들은 유명한 역사 속의 장군들을 떠올렸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쥴리어스 시이저 등을 언급했습니다. 그 때 그 강사는 그가 다름 아닌 성경에 나오는 여호수아라고 말했습니다. 한 때 화려한
명성을 떨친 영국의 야전군 사령관 Edmund H. Allenby도 여호수아를 연구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의 전략이야말로 1차 세계대전당시에
팔레스타인을 성공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는 좋은 작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앨런비는 여호수아서를 연구하여 여호수아의 작전을
모방하여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여호수아 6장은 이와 같이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나 군사전략을 소개하는 책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해석이나 적용이 성경이 강조하는 포인트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장애물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적이고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지 단순히 세상에서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더욱이 군사작전을 설명하기 위해 쓰여진 책도
아닙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종종 장애물을 만납니다. 어떤 장애물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만 어떤
장애물은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통과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육신의 질병과 더 나아가 죽음의 문제는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의 제약을 입고 사는 동안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패기만만하게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갑자기 질병이나 사고와 같은 암초에 부딪쳐 좌초하는 예를 우리는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강하게 무장하여 탱크처럼 추진력있게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역시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암초를 만나면
좌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그런 장애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리고 성이라는 장애물입니다.
1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1]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여리고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의 성격을 가진 아주 큰 성입니다. 지금 그 성이 굳게 닫혀 있는 것입니다. 이
성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후방을 확보하지 않은 채로 전쟁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굳게 닫혀 있기 때문에 이 성을
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잘 조직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들은 애굽의 노예로
있다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그렇게 오합지졸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굳게 닫힌 큰 성인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어렵다기보다 불가능한 일로 보입니다. 우리도 종종 이와 같은 경우를 만납니다.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여리고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CCC의 설립자인 빌 브라이트 박사는 "신앙생활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힘으로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예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와 같은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도저히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처럼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제 생각으로는 그 사람이 그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만
하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기적의 연속이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1 + 1 = 2'라는 등식만으로는 신앙생활의 즐거움을 맛볼 수 없습니다. 산이 무너지고 굳게 닫힌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세상을 지으신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기쁨인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서 기쁨을 빼앗아가고 있는 여리고는 과연
무엇입니까? 또 과연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 여리고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연약한 인간으로서 육신의 제약을 입고 사는 동안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여리고를 어떻게 하면 무너뜨릴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런 문제에 관하여 아주 실제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장벽을 만났을 때, 여리고와 같이 큰 성을 만났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의 인생에서 여리고를 만났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굳게 닫힌 여리고성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3-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3]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 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하나님은 모든 군사들에게 매일 성을 한 번씩 돌라고 명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칠일 째, 마지막 날에는 성을 일곱 번 돌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면 모든 백성이 다 함께
함성을 지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전쟁을 하려면 작전을 짜고 군사를 보내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그런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전쟁을 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저 성을 돌라고 명하셨습니까?
그것은 이 전쟁의 승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쟁수행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성의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번을 돌라고 명하신 것을 자세히 주의해서 보시면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언약궤입니다. 본문에 있는 행군에 관한 말씀을 주의해서 보시면 그 행군의 중심에는 언약궤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제사장들은 언약궤 앞에서 행하라고 했습니다. 6절을 보시면 좀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일곱 제사장이
언약궤의 앞에서 행군을 하고 다른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갑니다. 9절을 보시면 언약궤의 뒤에는 후군이 있습니다.
13절에는 이 모든 상황을 잘 종합해서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13]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니라 성을 도는 행군의 대형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를 중심으로 앞뒤에 제사장들과 군인들이 늘어선
대형으로 행군을 하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중심에 놓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앞뒤로 대열을 이루어서 행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약궤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중심에 놓고 행군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앞이 막혀서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여호수아 5장에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리고성을 돌 때도 그 행군의 중심에는 법궤를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리고성을 도는 상황을 볼 때 두 번째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일곱이라는 숫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총
7일 동안 여리고성을 돌았습니다. 그리고 일곱명의 제사장들이 일곱 양각 나팔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제 7일에는 모두 일곱번 성을 돌았습니다.
계속해서 7이라는 숫자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숫자 7은 완전수이고 하나님의 수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 숫자 7이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전쟁에 개입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룰 것을, 그래서 그
백성들이 완전한 승리를 얻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언약궤와 7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것을 통한 완전한
구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아주 극심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주 큰 성인 여리고가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 성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앞으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힘으로는 이 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법궤를 중심에 놓고
일곱이라는 숫자를 반복해서 상기시키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깨우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지내온 것은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애굽군대가 추격하는 절체 절명의 위기에서 홍해가 열려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40년간의 광야생활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주셔서 지금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요단강물이 멈추어서는 기적 가운데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수없이 많은
위기를 하나님의 역사로 건너왔으면서도 새로운 위기를 만나면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망각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에는
완전한 승리가 있을 것임을 약속해주는 메시지를 던져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앞을 여리고가 가로막고 있습니까?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앞이 막혔을 때는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처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 한 번이라도 여러분 힘으로 살아오신 적이 있습니까? 어느 것 하나 내 힘으로 한 것이
없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지금 당한 위기 속에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십니까?
우주 만물을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내 삶의 중심에 계심을 왜 깨닫지 못하십니까? 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완전한 승리와 완전한 구원이
있을 것임을 왜 확신하지 못하십니까? 오직 우리와 함께 하신 그 분을 바라보십시오.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삶의 위기에 처했을 때 기억해야 할 첫 번째 메시지인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인생에서 여리고를 만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침묵하는 것입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0]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여러분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모두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면서 성을 돌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울려 퍼지는 것은 나팔소리뿐입니다. 나팔소리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나팔소리를 하나님의 행동개시 명령으로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사건을 성경이 어떻게 설명합니까?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크게 울려 퍼지고 있는 나팔소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 사건에 개입하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침묵하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나팔소리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유롭게 말하면서 성을 돌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대부분이 나팔소리를 듣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혹시 그 나팔소리를 들었다 하더라도 그 나팔소리에 담긴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13번에 걸쳐서
성을 돌았습니다. 돌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굳게 닫힌 성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더 절망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도저히 열릴 것 같지
않은 그 높고 굳게 닫힌 성을 볼 때 인간적으로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자유롭게 말하도록 두었다면 그들은 나팔소리를
듣는 것보다 그들 스스로 절망에 찬 말을 서로가 주고 받아서 오히려 서로 낙심시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침묵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침묵이 필요합니다. 침묵하면서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경건 생활에도 적용이
됩니다. A.W.토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의 훈련이다. 왜냐하면 침묵을 배우지 않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기도의 영성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어왔습니다. 한 가지는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간절한 기도제목을 놓고 간구할 때 필요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침묵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전통가운데 오늘날 개신교는 침묵기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실 오늘날 개신교인들은 너무 시끄럽습니다. 이것은 기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적으로 예를 들어 말하면 카톨릭 계통의 장소에 가면 아주 조용합니다.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 책을 사러 가끔
카톨릭 서점에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갈 때마다 느낀 것이 그 곳은 너무나 조용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꼭 필요한 말은
아주 조용하게 다가가서 소곤소곤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아주 조용합니다. 음악을 틀어도 아주 조용한 음악이 나오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조용한 가운데, 침묵하는 가운데 조용히 책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개신교 서점에 가면 갑자기 서점에 온 것인지 시장에 온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시끄럽습니다. 너도나도 소리 지르고, 책을 찾는다고 소리 지르고, 서로가 큰 소리로 멀리 있는 사람을 부르고, 그렇게
시장과 같이 아주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이는 단지 서점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삶의 모습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성직자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하라고 하면, 천주교 신부들에 대해서는 조용한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개신교 목사들에 대해서는 큰 목소리, 고래고래
고함치는 것, 그런 것들을 연상합니다. 목회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을 떠올릴 때도 사람들은 그렇게 떠올립니다. 그만큼 우리가 침묵을
잃어버렸습니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하면서 삽니다. 말을 많이 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게
됩니다. 서로가 자신의 이야기만 합니다. 그런데 대화의 첫 걸음은 조용히 듣는 것입니다. 조용히 듣고 그 후에 상대방에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너무 많은 말을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일수록 떠들지 말고 조용히 침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만났을 때 모세를 통해서 들려준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 14:13) "너희는 가만히 서서" 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는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조용히 침묵해야 나팔소리를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벌이고 있는 이 행진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성을 돌고 있습니다. 오직
울려 퍼지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리는 나팔소리뿐입니다. 그들은 조용히 침묵하는 가운데 눈으로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보고 귀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알리는 나팔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국은 승리케 하실 것임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막다른 골목에 있습니까? 도저히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절망에
처했습니까? 그렇다면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음성 속에 여러분의 살길이 있습니다. 절망을 헤치고 일어설 수 있는 새 힘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말이나 하지 말고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의 인생에서 여리고를 만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15-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5]제 칠 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날 뿐이었더라 [16]일곱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20]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이 말씀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언제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까? 성을 매일 매일 한 번씩 돌았습니다. 마지막 날에
일곱 번을 돌았습니다. 일곱 번을 돌 때까지도 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일곱 번을 돌고 나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
모든 백성이 함성을 질렀습니다. 소리를 지르는 그 순간까지도 여리고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소리를 지른 직후에 성이 무너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마지막 순간까지 성을 돌아야 했습니까? 그것이 온전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왜 성을 돈 이후에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소리를 지를
때까지 성이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온전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몇 번 하다가 중단하는 것은 온전한 순종이 아닙니다. 진정한 순종은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대로 소리를 질렀을 때 무너졌습니다. 무너지는 것을 보고 기뻐서 함성을 지른 것이 아닙니다.
굳게 닫혀 있는 성을 보고 함성을 지른 것입니다. 그랬을 때에 그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저 명령에 따라 소리를 질렀을 때 무너졌습니다.
지금까지는 침묵했지만 이제는 말씀대로 소리를 지를 때인 것입니다.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때가 있고 소리를 질러 간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지금까지 침묵했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제는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순종입니다. 그렇게 온전히 순종했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기적을 그들은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여리고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리고를 만났을 때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이 있습니다. 인생의 여리고를 만났을 때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물리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안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그 분의 명령에 따라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달성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입니다. 근본적으로 이기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그 사실을 절대로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죄의 본성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내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일을 하다보면 결국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일을 진행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일이 성취되면 자만에 빠지고, 그 일이 성취되지 못하면 절망에 빠집니다.
신앙생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분 앞에 조용히 엎드려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삶의 중심에 놓고 그 분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침묵하며 그 분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순종의 결과로
우리 앞에 있는 여리고가 무너질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여리고는 과연 무엇입니까?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여리고가 지금 여러분의 앞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아직도 부모님께서 마음을 열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자녀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자녀가 하나님께 돌아올 것 같은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직장에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를
맡았습니까? 학위과정을 밟고 있는데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습니까? 아내와 혹은 남편과 오랫동안 싸우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도 다른
사람처럼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싶은데 그 일이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육신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는데 도저히 치유될 것 같지 않은 절망감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와 좋지 않은 관계를 맺은 것이 괴로워서 화해하고
싶은데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명절 때마다 믿지 않는 친척들과의 관계 때문에 힘이 드십니까? 나도
명절이 되면 온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이루고 싶은데 그 일이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절망하고 있습니까? 과연 지금 여러분의 앞을 막고 있는 여리고는 무엇입니까? 지금 그 여리고 때문에 절망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앞을
막고 있는 여리고를 바라보던 눈을 들어서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그런 모든 고통과 절망을 친히 체휼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히브리서 4:15-16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어떤 문제이든, 얼마나 그 절망이 깊든 그 속에서 압도당하여 주님을 놓치지 마십시오. 문제는 너무나 크고
심각하며, 그에 따른 절망은 너무 고통스러워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소망을 품고 매일 기도로 자신을 바로 세우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저 그 모습 그대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서 나를 살리셨고 지금도 나와 함께 살아계신 그리스도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 분 앞에 나아가서 우리 삶의 현실가운데 함께 하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침묵하는 가운데 그 분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 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순종하십시오. 순종하다가 중단하지 마십시오. 위기가 있을 것입니다. 절망스러워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지막 날까지 성을 돌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소리를 질렀을 때 그 성이 무너진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순종하십시오. 나아만
장군은 일곱 번 몸을 씻을 때까지 전혀 문둥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곱 번 씻고 올라왔을 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그 살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왔다면 끝까지 순종하십시오.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그 순종이 여러분의 믿음을 온전하게
성숙시킬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육체로 계실 때에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 5:8-9).
마지막까지 순종하면 여러분의 앞에 있는 여리고가 무너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을 막고 있는 여리고가 무너지고 우리 새누리 교회를 막고 있는
여리고가 무너지는 기적이 우리 가운데 일어날 것입니다. 이 확신을 갖고 살아계신 주님, 우리 가운데 지금도 살아 계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주님을 바라보고 소망을 갖고 힘을 얻어서 새로운 한 주를 사시는 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