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과 불평은 가장 무서운 범죄는 아니지만 우리 인간들이 가장 많이 범하고 있는 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신앙 생활을 잘한다는 이들도 툭하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이 수없이 많습니다. 지난 한 주간을 생활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며 생활한 시간보다 원망과 불평하며 생활한 시간들이 더 많지
않았습니까? 원망은 나의 환경과 처지가 기대했던 것처럼 되어지지 않을 때 일어나는 감정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서
바로왕에게 해방되어 가나안에 가기까지 광야 생활에서 제일 많이 범한 죄가 원망과 불평의 죄입니다. 원망은 불평을 가져오고 불평은 나중에 불신앙에
이르게 했습니다. 본문 1절에서도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건을 고전 10:10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옮겨놓았습니다. 이 원망과 불평의 죄는 신앙을
갖지 못한 불신자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죄인데 이것을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린 요셉의 생애를 보세요. 엄청나게 불행한 환경에서도 그에게선 조금도 원망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의 원인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어는 성경학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을 망각하고 망각해야 할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에겐 기억을 관리하는 두 개의 주머니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식이라는 주머니요, 또 하나는
무의식이라는 주머니입니다. 잊어버리고 싶은 것은 무의식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야 하고, 기억하고 싶은 것은 의식의 주머니 속에 넣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반대로 살아갑니다.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지 않아도 될 것은 곧 잊어버려서 원망이 나오고
불평이 나옵니다. 여러분 중 지난주일 설교 제목을 기억하고 있는 분들은 한번 손들어보세요. 지난주일 설교 제목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한 주간 동안 나를 슬프게 하고 섭섭하게 했던 언짢은 일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러한 점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애굽을 나오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홍해를 기적같이 건너게 해주신 하나님의
역사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금 눈앞에 나타난 고난을 자꾸 생각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가지를 망각함으로 원망의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지금 내 자신의 원망과 불평의 원인을 바로 발견하여
여기에서 돌이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과거에 날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오늘의 어려운 현실만 보게 될
때, 우리는 원망하게 되고 불만과 불평을 가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현재 당하는 어려움만 생각하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안 돌봐주신다고, 어려움을 보고도 가만히 계신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불평과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과거에 어떻게 지켜주시고 돌봐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간 애굽의 종살이를 하다가 누구의 도움으로 출애굽 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모세를 통해 그 완악한 바로 임금을 꺾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뒤쫓아오는 애굽 군대를 전멸시키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말라 할 때, 반석을 쳐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셔서 배불리 먹게 해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면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 원망하거나 불만하지 않을 텐데 그들은 이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03편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변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시니 잊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찬송가
405장 3절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다같이 두 번 부릅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잊어도
좋은 것은 잊지 않고 잊어선 안 될 것은 망각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 생활에서의 아주 시시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자기들을 건져주시고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진짜 은혜는 잊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은 잊어버리고 시시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기에 현재
원망과 불평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도 하도 정치가 죽을 쒀서 어떤 분들은 박정희 군사 독재 시대를 자꾸 말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소련도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민주주의와 자유 경제 시대로 옮겨가는 과도기에서 여러 가지 복잡하고 어려워서 다시 옛날 공사주의
시절을 향수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이 죄악에서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셔서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을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데, 지난 날 예수님을 떠나 내 맘대로 방종하고 방탕했던 생활을 더 좋게 기억하고
있다면 이것은 잘못 생각해도 보통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돌아왔으면 날 죄와 사망과 사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주신 우리
주님의 큰 은혜를 늘 기억하면서 오늘의 고통과 시련을 잘 이기시고 견디어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시시했던 과거는 다 잊어버리시고 하나님의
구원시켜주신 큰 은혜를 기억하면서, 현재 나에게 닥쳐오는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 시킴으로 더 큰 축복과 은혜를 주시려는 과정으로 알고
원망과 불평의 죄를 범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현재 주시는 축복의 은혜를 자꾸 망각하고
있기에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먹을 것이 없어 몹시 배가 고플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출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만나를 먹는 순간 그 만나맛이 꿀맛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처음의 맛있던
만나를 계속 먹게 되니 입맛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본문 8절에서는 만나 맛이 꿀맛이 아니라 기름 섞은 과자 맛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꿀맛이 기름 맛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민 21:5에 보면 그 만나를 싫어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 왜 만나만 주시느냐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이 간사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꿀맛이 시간이 갈수록 자꾸 변질되더니 이제는 만나가 싫어지기까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그들은 다시 원망과 불평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장에 에베소 교회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사도요한은 에베소 교인들이
신앙의 첫사랑을 잃어가고 있음을 개탄하면서 '너희들이 첫사랑을 다시 회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촛대를 옮기겠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신앙도 첫사랑의 감격이 살아있습니까? 오래 믿어오고 있는 동안 내 안에 주님을 향한 첫사랑의 감격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부부간에도 결혼 초기에 가졌던 감격과 설렘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꾸 사라져서 이것도 못마땅하고 저것도 못마땅해서
서로 트집잡고 서로 단점만 가지고 다투게 됩니다. 너무 부부간에 권태기가 오래 지속되면 결혼 생활마저 지겨워지고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한 때가 90년 12월 첫 주일이었습니다. 그 때, 큰 각오를 가지고 이 강단에 서서 한 나의 첫 설교가
'새벽을 깨우자'는 설교였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저를 기쁘게 맞아주시고 큰 기대와 의욕을 가지고 저를 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벌서
11년이 지나가고 있는 동안 우리의 첫 감격과 첫 각오가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배고팠을 때 주신 만나의
꿀맛이 변질되어 가니깐 만나를 주신 것도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만나만 주신다고 불평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계속 벼농사의 풍년을
주셔서 쌀 재고가 늘어간다는 즐거운 걱정거리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할 것은 지난 날 배고팠던, 보리 고개가 있던 시절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쌀이 남아돈다고 술이나 만들면 안 됩니다. 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계속적인 풍년에 감사하며 더 정신차려야
합니다. 삼중고(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함)의 고통 속에서도 기적과 감동의 삶을 살은 헬렌 켈러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많은 것을
갖고도 감사하지 못하며 불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할 수 있다면 이런 3일간의 경험을 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루는 나처럼 아무 것도 못 보도록 눈먼 채로 살도록 하고 또 하루는 아무 것도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자로 살도록 하고 도 하루는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처럼 살게 한다면 사람들은 진정한 감사의 의미를 알게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한번만 저
아름다운 무지개를 볼 수 있다면, 내가 한번만 낙엽과 시냇물을 바로 볼 수 있다면, 그리고 날 사랑해주시는 설리번 선생님의 미소를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와 감격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의
작은 고통과 아픔도 못 견디고 여전히 불평과 원망을 하고 있음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로, 앞으로 인도해주시고 지켜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과 불평을 하고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고 광야 생활을
통과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도록 목표를 주시고 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눈앞에 나타난 어려움만 보고 미래에 올
목표와 비전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축복은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 2장의 가나 잔칫집처럼 처음보다 나중을 더 좋게 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청교도들은 대서양을 건너 미개척지인
미국에 들어가 살면서 항상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살이를
세상에 울고 태어나서 마지막에 울면서 마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울면서 태어나지만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사는 영생의 축복이 있기에 마지막엔 승리요, 기쁨의 삶이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믿으시면 아멘합시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여호수아나
갈렙같은 이들은 현재의 광야 생활만 보지 않고 미래에 정복할 가나안을 생각하며 희망적으로, 긍정적으로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일하게 가나안의 정복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어렵고 힘든 현실만 보면 우리도 매일 원망하고 불평하며 짜증스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원망과 불평의 죄에서 놓임 받아야 합니다. 과거에 날 건져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구원의 진짜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사실 자체를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으시고 한결같이 지켜주신, 위대한 가나안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갈 때, 내 속에 원망과 불평과 짜증스러움이
물러가고 고마움과 감사와 감격의 삶을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유대의 어느 랍비의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가 나와 여러분의 기도가
됩시다. '오! 하나님은 나에게 참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만 더 주십시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얼마나 멋진 기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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