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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들 II

(레18:24-30)

I.들어가는 말

성경을 통해 말씀된 가증한 삶에 대한 경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들보다 먼저 가나안 땅에 살았던 거주민들이나 주위에 있는 이방인들은 그들을 충분히 가증하게 만들 수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이방인들 가운데 거하면서 구별된 무리로 거룩하게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그 구별된 위치를 망각한다면 그들은 곧 그 주위의 가증한 족속들을 따라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가증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가증함들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실 것이었다.

마찬가지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모임이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과 동화되지 않고, 세상의 가증함을 따라가지 않는 주님에 의해 구별된 모임이다. 주님은 오늘날 이 교회를 향해 세상의 가증함을 따라가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께 가증한 점들이 있다면 우리 역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이미 지난 시간에 우리는 신앙적인 가증함에 대해 몇 가지 살펴보았다. 예배 드리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예배가 주님께서 보이신 방법대로 되지 않을 때, 그것은 주님께 가증하다. 기도 역시 우리 신앙에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사악함을 버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주님께 가증한 것이다. 주님께 봉헌물을 드린다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 봉헌물이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상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적절하게 가리기 위한 종교적 쇼라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께 가증한 것이다. 적절한 헌금생활은 중요하다. 그러나 순수하게 벌지 않은 돈, 자기에게로 돌아올 영광을 생각하고 바치는 돈은 주님께 가증하다. 우상숭배와 이교도의 풍습과 뒤섞인 신앙,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는 배교 등은 모두 주님께 가증한 것이다.

만일 이런 가증함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비젼이 없다. 교회의 부흥이나 우리 개인의 생명이 풍성해지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가증함의 요소들이 있어서 신앙적인 진보를 방해하지나 않는 지 살펴보자.

오늘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우리의 삶에 나타날 수 있는 가증함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한 아홉가지 정도를 짧게 짧게 소개하려고 한다. 하나님께 가증한 이것들은 영적으로 진보하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아당길 것이며 실족케 할 것이고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것이다.

II.하나님께 가증한 것들

1.유니섹스

남자가 남자답고, 여자가 여자답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의 창조 질서이다. 서로의 의복을 바꾸어 입는 것도 옳지 않다. 여자가 남장을 하는 것이나, 남자가 여장을 하는 것, 이미 코메디나 게그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재미있는 소재라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류의 일들을 가증히 여기신다. 만일 어떤 남자가 여자이길 원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분을 여자로 만드셨을 것이다. 상황이야 어떻든 그가 하나의 남자로 표현되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에 그는 남자로 태어난 것이다. 남자가 여자가 되는 것(트랜스 젠더)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실수하셨어요. 나를 여자로 만드셔야지 왜 이렇게 하셨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고전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속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성화된 남자나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욕하는 자나 착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생각이 없는 청소년들은 그런 일에 대한 기준도 없이 우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모호하게 하는 유니섹스적인 형태의 일들은 주님께 가증한 것이다. 남자가 여자 흉내를 내려고 할 때 시도하는 일은 무엇인가? 첫 번째로 가발을 구할 것이다. 왜냐하면 긴머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치마를 두르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 여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긴머리나 치마는 여자의 상징이다. 세계의 모든 화장실 표시를 보면 글자를 읽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여자 화장실인지, 남자 화장실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해놓았다. 두상이라든지, 치마나 바지 표시를 써서...

[고전11:14] 만일 남자가 긴 머리를 가지면 자기에게 수치가 되는 것을 본성 그 자체도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이 하는 역할, 여자들이 하는 역할이 다르다. 사람들은 고정관념 속에 역할의 의미를 계급의 의미로 해석하려고 한다. 그래서 여자의 역할은 낮은 계급에서 나오는 행동들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남자들의 역할과 여자들의 역할이 따로 있으며 그들은 모양새에서도 구분되고 있다. 그것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원리이다. 모두가 남자이기를 원하셨다면 다 남자로 만들면 될 것을 왜 여자로 만드셨겠는가? 남자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처럼 보인다든지, 여자가 남자처럼 보이는 것은 주님의 의도가 아니다. 그런 모습들은 주님께 가증한 것이다.

[신22:5] 여자는 남자에게 속한 것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지니라. 이같이 하는 자는 주 네 하나님께 가증한 자니라

2.음행

[겔22:11] 어떤 자는 자기 이웃의 아내와 더불어 가증한 짓을 행하였으며 어떤 자는 음탕하게 자기 며느리를 더럽혔으며 어떤 자는 네 안에서 자기 누이 곧 자기 아버지의 딸을 비천하게 하였으며

이웃의 아내와 더불어 음행을 행하는 것은 가증한 짓이다. 자기 집안의 형제나 친족과 성적인 부정을 저지르는 것도 주님께 가증한 짓이다. 오늘 본문 말씀의 앞부분 곧 레위기 18장 전체를 보면 어떤 것이 가나안 사람들이 행하던 가증함이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레18:24-30] 너희는 이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이 모든 민족들이 이 모든 것에서 더럽게 되었고 그 땅도 더럽게 되었으므로 내가 그 불법을 그 땅위에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자기 거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그런즉 너희 곧 너희 민족에 속한 자나 너희 가운데 거하는 타국인이나 내 법규와 내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들 가운데 하나라도 행하지 말지니라. (너희 전에 있던 그 땅의 사람들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럽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도 그 땅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전에 있던 민족들을 통해냄 같이 너희를 토해낼까 하노라. 누구든지 이런 가증한 일들 가운데 하나라도 행하는 자 곧 그런 것들을 행하는 혼들은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키고 너희가 있기 전에 그들이 행하던 이 가증한 풍속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행하여 너희 자신을 그 안에서 더럽히지 말라.

성경은 우리에게 근친상간(레18:6-19)이 가증한 것임을 알려준다. 또 이웃의 아내와 불륜을 갖는 간음(레18:20) 역시 가증한 것임을 가르쳐준다. 동성연애(레18:22), 혼전성관계(신22:20,21), 에니멀 섹스(레18:23) 등, 비정상적인 성관계의 가증함을 알려준다. 사실 가나안의 족속들이 쫓겨난 까닭은 거기에 있었다. 주께서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시고 이스라엘을 들이실 때, 분명히 그런 가나안의 가증함을 따라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레18:22] 너는 여자와 함께 눕는 것같이 남자와 함께 눕지 말라. 이것은 가증한 것이니라.
[레20:13] 남자가 여자와 눕듯이 남자와 함께 누으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너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그들에게로 돌아가리라.

동성연애는 주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동성연애를 반대해야만 한다. 미국에서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교회가 세워지고 있는데 동성연애를 하는 사제나 목사들을 인정하는 것은 주님께 분명히 가증한 일이다.

오늘날 많은 영화들은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들을 소재로 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우주인과 인간과의 성적인 관계라든지, 이웃의 아내와의 부정, 가족, 친족간에 일어날 수 있는 근친상간, 동성연애, 혼전 성관계를 자연시 하는 풍조....그것이 가증한 일임을 안다면 그런 것들을 보고 즐기는 것은 가증한 것들을 보고 즐기는 것과 같다. 우리가 즐긴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물으실 수도 있다. "너는 어찌하여 그런 가증함에 매료되느냐?" 주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가나안의 가증함을 쫓지 말도록 하셨듯이 이 세상의 가증함을 따라가는 일에서 멀어져야 할 것이다.

3.이혼과 재혼에 있어서 가증함

[신24:1-4] 남자가 자기 아내를 취하여 결혼 한 뒤에 그녀에게 부정함이 있음을 발견하였으므로 자기 눈으로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녀의 손에 주고 자기 집에서 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있느니라. 그런데 나중의 남편도 그녀를 미워하여 이혼증서를 써서 그녀의 손에 주고 그녀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혹은 그녀를 아내로 취한 남편이 죽었으면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녀를 내보낸 남편이 그녀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주 앞에서 가증한 것이니라. 너는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소유로 주시는 땅에서 범죄하지 못하게 할지니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혼은 용납될 수 없다. 만일 목사가 이혼한다면 그는 더 이상 목회직을 할 수 없다. 그는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 것이며, 한 아내의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도 이혼 경력이 있는 분들은 중요한 일들을 할 때, 신중하게 검토되어야만 한다. 이혼한 경력이 있는 목사를 보면서 성도들이 어떻게 가정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겠는가? 독립침례교회라고 하는데이 이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그룹들이 있다. 이는 조심해야할 것이다.

성경은 이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을 더럽혀지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만일 이혼을 했더라도 바로 원래의 그 남편과 다시 화합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남자에게 간다면 먼저 남자와는 다시 만날 수 없을 만큼 더럽혀진 여자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두 번째 남편과 이혼을 하든 사별을 했을 때, 다시 첫 번째 남편이었던 사람과는 절대 재혼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다. 이런 가증히 여김에 빠지지 않으려 한다면 여러분은 첫 번째 만난 남편과 아내에게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4.속이는 일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주의하자. 부당하게 속여서 많이 받지 않도록 해야한다. 다른 저울추를 사용하는 것, 다른 되를 사용하면서 보여주는 것, 부정직한 거래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다. 주님은 정직한 자를 사랑하시며 그리스도인들이 정직하게 일하는 것을 원하신다. 어떤 사람에게는 큰되를 쓰고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되를 쓰듯이,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말해서 속이는 것 역시 부당한 것이다. 이런 일들은 한결같음이 없는 가증함, 정직하지 않은 가증함이다.

[잠11:1] 거짓된 저울은 주께서 가증히 여기시나 꼭 맞는 추는 그분께서 기뻐하시느니라.
[잠20:10] 서로 다른 추와 서로 다른 자는 둘 다 주께 가증한 것이니라.
[잠20:23] 서로 다른 추는 주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요, 거짓된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

[신25:13-16] 너는 가방에 다른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다른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너는 완전하고 공정한 저울추와 완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지니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들이 길게 되리니 이는 그런 일을 하는 자들 곧 불의하게 행하는 자들이 다 주 네 하나님께 가증함이라.

5.비뚤어진 자

[잠3:32] 이는 비뚤어진 자는 주께서 가증히 여기시거니와 의로운 자에게는 그분의 은밀한 일이 함께 함이니라.
[잠11:20]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자들은 주께서 가증히 여기시나 자기 길에서 곧바른 자들은 기뻐하시느니라.

이 "비뚤어지다"라는 말은 "고집세다", "심술궂다"의 의미이다. 이 비뚤어진 자는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고집센 것을 마치 자랑처럼 이야기할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 이것은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지나쳐서 하나님보다 그 자신이 더 지혜로운 것처럼, 그 자신이 더 똑똑한 것처럼, 그 자신이 더 많은 경험을 한 것처럼, 그 자신이 더 뛰어난 것처럼 보이는 교만의 함정에 빠질 수가 있다. 그런 사람의 고집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다. 믿음을 지키기 위한 고집이 아닌 이상, 일반적인 삶에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고집은 자랑할 게 못된다. 이 고집이 지나쳐서 자기의 고집대로 하지 않는 자들에게 심술궂게 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비뚤어진 자들은 모든 면에서 자기가 옳은 것처럼 간주하고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 남들에 대해 심술궂게 굴 때도 있다. 톡톡 쏘는 말과 반대되는 생각들을 서슴없이 내던지면서, 상대방의 입장이나 생각은 아예 고려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려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뚤어진 자를 가증히 여기신다.
목사가 비뚤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내 생각을 많이 이야기하게 될 때다. "내 생각은 내 생각은..".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변론을 늘어놓게 되면 그는 비뚤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도가 비뚤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내 중심으로 모든 것을 보려고 할 때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 곧 가르침보다도 내 생각의 잣대에 목사나 성도들을 놓고 판단하게 될 때에 그렇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경우, 톡톡 쏘아붙이는 말이나 예의에 어긋나는 태도들을 할 때, 그것은 비뚤어지고 있는 증거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신다.

[잠8:7,8] 내 입이 진리를 말하리니 사악함은 내 입술이 가증히 여기는 것이로다. 내 입의 말들은 다 의로운 즉 그 중에 비뚤어지거나 뒤틀린 것이 없나니

우리들의 언어와 이런 지혜자의 언어를 비교해보자.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비뚤어짐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개인의 영적인 진보는 기대할 수 없다. 우리 교회 안에 그런 것이 가득하다면 이 교회의 영적 부흥은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큰 기도제목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가증함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허공을 울리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6.거짓말하는 입술

[잠12:22] 거짓말하는 입술은 주께서 가증히 여기시나 진실히 행하는 자들은 그분께서 기뻐하시느니라.

주님 앞에 헌신한 사람들에게도 이 거짓말은 나타난다. 창세 이후로 사탄이 인간을 넘어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사탄을 거짓의 아비라고 한다(요8:44).

사도행전 5장을 보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께 땅값을 바쳤다. 그러나 그들이 바친 것은 전부가 아니었다. 전부가 아닌 것이 문제가 되어 베드로가 왜 이렇게 하였느냐고 물었다면, 그들이 땅값의 전부를 바치기로 했던 것이 분명하다(행5:3).
그러나 아나니아는 땅값을 바치면서 교회로부터 주어질 영광을 생각했다. 자기의 헌신, 자기의 희생을 통해 자기에게 돌아올 영예를 생각했던 것이다.
"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 땅값 전부를 바쳤단 말야? 대단한 믿음이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이 땅판돈을 갖다 바쳤다는 소식..., 아나니아는 그들로부터 주어질 영광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속인 자가 되었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행세했으나 실상은 무언가 움켜쥐고 있는 사람, 아나니아의 모습은 그것이었다. 실상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 같으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돌아올 영광과 좋은 이미지를 구하는 사람, 그것이 삽비라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속인 자들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거짓을 가증하게 여기신다.

[행5:3,4]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님께 거짓말을 하고 땅값의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도 네 땅이 아니며 판 뒤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아니하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 속에 두었느냐?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한 것이로다, 하니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다. 마치 우리가 외형적으로는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지만 내면에서는 내게 돌아올 이익을 계산하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가증함에 빠진 것이다. 이런 가증함은 오래 못간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곧 성령 앞에서 들통났고 그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곧 박탈당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증한 사람들을 사용하실 수가 없었다. 그런 가증한 사람들이 주님의 교회에서 버젓이 존경받는 것을 용납하실 수 없었다.

열왕기하 5장을 보자. 엘리사를 모시고 사는 종 게하시가 있었다. 어느 날 아람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와 나병을 고침받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은혜가 고마워 무언가를 답례로 주려고 했건만 엘리사는 끝끝내 사양했다. 그런데 고국을 향해서 나아만이 얼마쯤 갔을 때, 허겁지겁 쫓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엘리사의 종 게하시였다. 그는 나아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하5:22] ....내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보라, 지금 대언자들의 아들들 가운데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에서부터 내게 왔으니 원하건데 당신은 그들에게 은 일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하라 하시더이다." 무슨 뜻인가? 그가 그렇게 말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결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게하시는 마치 엘리사가 그렇게 말한 것처럼 속여서 그들의 물건 중에 필요한 것을 얻어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엘리사는 이미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지금이 어찌 돈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올리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라고 야단쳤다. 그러므로 게하시는 그 동안 엘리사 밑에 있으면서 그 주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이름을 빌어서 많은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 드러났다. 마침내 게하시는 나아만에게 있던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가증히 여기신다. 그들에 대해서는 거기에 합당한 보응을 받도록 하신다. 비록 성도라 하더라도 구원은 잃어지지 않겠지만 하나님은 징계하시며 그 거짓말에 대한 대가를 알게 하실 것이다.  

7.마음이 교만한 자

[잠16:5] 마음이 교만한 자는 주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그가 손에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사탄이 타락하게 된 것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자기 위치를 지키지 못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의 자리를 두고자 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탄과 그 추종자들을 가증스럽게 여기신다.
진정한 겸손은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엎드리는 것이다. 그분이 원하면 원하는대로, 그분이 금하시면 금하는대로, 그분이 가라시면 가라는대로, 그분이 있으라면 있으라는대로, 그렇게 움직일 줄 아는 것이 겸손이다. "나는 못해요"하고 무조건 빼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는 것이 겸손이다.

성도들은 오랫동안 성경을 배우다보면 지식적으로는 대단히 많은 것들을 알게 되지만 정작,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입술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예수님께서 나의 주라고 하시지만 이것저것 모든 것들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실행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것은 주님께 가증한 것이다.

8.판결을 굽게 하는 자

[잠17:15] 사악한 자를 의롭다 하는 자와 의인을 정죄하는 자는 둘 다 주께서 가증히 여기시느니라.

무죄한 자를 죄인처럼 죽여야 했던 빌라도, 살인자 바나바를 풀어주고 무죄한 예수님을 사형대로 넘겨주었던 빌라도는 하나님 앞에 가증하다.
주님은 용서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의를 끌어안고자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옳든지 그르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참되든지 거짓되다. 물론 거짓된 것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좋다 나쁘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옳다 그르다를 말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무엇이 옳은가? 주님은 주님의 눈에 사악함을 그냥 덮는 것은 용납하실 수가 없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악함을 그냥 덮으시려고 했던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피를 요구하셨고 목숨을 요구하셨다. 그래야만 우리의 사악함을 덮겠다고 하셨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피흘리셨고 그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 때문에 비록 우리의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대속의 은혜 아래서 정죄받지 않는 합당한 판결을 받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 판결을 흐리게 하려고 한다. 이 시대의 조류를 탓하면서 판결을 흐리게 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받게 될 것을 두려워해서 판결을 흐리게 하려고 한다. 그러한 것들은 다 가증한 것이다.
우리 교회만큼은, 우리 개인만큼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옳지 않은 것이 들어오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우리 교회나 우리 개인만큼은 이 시대가 다 그런 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시대의 조류에 편승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옳게 판결하는 우리들의 삶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9.사람들 앞에 높게 평가받는 것

[눅16:15]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들의 눈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들 가운데 높게 평가받는 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과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돌아보자. 똑같이 좋은 말을 하고, 똑같이 베풀기를 좋아하고, 똑같이 선행을 하며, 똑같이 열심히 하더라도 그 목적은 다를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정말로 자기에게 돌아올 좋은 영광을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주님의 이름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다.
만일 사람들로부터 높게 평가받기 위해 교회에 열심히 출석한다면 그것은 가증한 일이다. 만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생활을 꼼꼼히 챙겨준다면 그것은 가증한 일이다. 만일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 위해 성경을 부지런히 보고, 연구하고, 배운다면 그것은 가증한 일이다. 만일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기 위해 선행을 하고 열심히 무언가를 한다면 그것은 가증한 일이다. 더 이상 교회출석이나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일, 성경을 가까이 하는 일, 열심, 선행 등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동기가 무엇인가를 솔직히 살펴보자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고자하는 속임수는 늘 있다. 어떤 목사님은 그런 것을 지적하셨다. 첫째, 거룩하지 않으면서도 거룩한 체, 둘째, 행하지 않으면서도 행하는 체, 셋째, 하고 있으면서도 하지 않은 체, 넷째, 미우면서도 사랑하는 체, 다섯째, 마음이 없으면서도 마음이 있는 체 등,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가증하다. 이런 가증함을 안고 있으면서 어떻게 내 개인의 영적 진보를 갈망하는가? 이런 가증함들을 품고 있으면서 어떻게 이 교회의 부흥을 원하는가?

"이는 덮어둔 것 중에서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숨겨둔 것 중에서 알려지지 아니할 것이 없음이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너희가 어둠 속에서 말한 것이 빛 가운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공포되리라 '(눅 12:2-3)

그 동기가 순수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이렇게 점검해보면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지만 그분을 거절한 어떤 사람들을 대적하시거나 괴롭히시기로 하지 않았다. 멸망으로 가는 그들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주의 종들이 부지런히 복음 전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베푼 사랑이 거절당할 때, 악한 생각을 품고 미워하며 방해하며 도전한다. 왜 그런가? 그가 쏟는 사랑은 돌아올 것을 생각하는 계산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5:46]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보상이 있겠느냐? 세리들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느냐?
[눅6:32-35]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너희에게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받기를 바라고 사람에게 빌려주면 무슨 감사의 말을 듣겠느냐? 죄인들도 준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들에게 빌려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비려주라. 그리하면 너희 보상이 클 것이요..."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예배만 드리고 달아난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그 사람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무도 내가 하는 수고에 대해 알아주지 않아요!"
우리는 진정으로 서로의 수고에 대해 인정해주고 칭찬해야만 한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칭찬받기 위한 목적으로 일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실족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골3:22,23]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단일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기 위하여 그들의 평안에 대해 말하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편이 되기를 포기할 때, 그는 하나님께 가증한 사람이 된다.

III.맺는 말
일곱가지 가증한 것

이 외에도 성경에는 여러 가지 가증함에 대해 말하고 이다. 적그리스도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했다. 잠언에 보면 일곱가지 가증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잠6:16-19] 주께서 이 여섯 가지를 미워하시며 참으로 일곱가지를 가증히 여기시나니 곧 교만한 눈빛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피를 흘리는 손과 사악한 꾀를 꾸미는 마음과 신속히 악으로 치닫는 발과 거짓들을 말하는 거짓 증인과 형제 사이에 불화를 뿌리는 자이니라.

주님은 교만한 눈을 가증히 여기신다. 가장 높은 위치에서 바라보는 눈이다.
주님은 거짓된 혀를 가증히 여기신다.
주님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손을 가증히 여기신다.
사악한 꾀를 꾸미는 마음을 가증히 여기신다.
신속히 해악으로 치닫는 발을 가증히 여기신다.
거짓들을 말하는 거짓증인을 가증히 여기신다.
형제 사이에 불화하도록 하는 자들도 가증히 여기신다.  

가증한 자에게 처해지는 결말

가증한 세상 사람들은 결국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계21:27). 그러나 성도 역시 가증함의 위험은 배제할 수 없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가증한 생활을 하지 말도록 경고되었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가증한 생활을 지속한다면 이스라엘이 당해야 했던 징계와 패망을 맛볼 수밖에 없다.

우리 개인이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원하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 있는가?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배우지만 그렇지 못한 원인이 어디 있는가? 우리 안에 가증함의 요소가 있다면 아무리 종교적인 열정으로 많은 것에 매달린다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가증한 것들을 버리기까지 우리들을 사용하실 수 없다. 그릇 안에 가증한 것들이 가득 들어 있는데 어떻게 거기에 새롭고 좋은 것들을 담을 수가 있는가?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성장하고 부흥해서 주 앞에 크게 쓰임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만일 우리 안에 버리지 못한 가증함들이 있다면, 그래서 모이기는 열심히 모이고 말씀도 잘 배우지만 늘 그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교회는 비전이 없다. 오늘 우리는 가증한 것들을 버리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