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14;12-14. 행27;14-26.
막6:48-52
오늘의 우리들이 걷는 인생의 길이나 삶의 자리들은 참으로 어려운 상황들이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런 상황들을 해결하여야 하는 방법이 성경이 제시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일년동안 사도행전을 묵상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 2~3회에 걸쳐서 사도행전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행전 23장에서 하나니은 바울에게
말씀을 하시기를 이제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인도를 하십니다. 그것이
24장에서 26장의 내용입니다. 24장에서는 벨릭스 앞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25장은 바울이 베스도 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26장은
아그립바 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27장은 바울이 예루 살렘의 여정을 끝내고 로마를 향하여 가는 과정을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로마를 향하여 가는 과정이 저와 여러분들이 인생을 항해하면서 달음질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에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행전27;1절을 하께 봅니다. "우리의 배를 타고 이달이아로 갈 일이 작정되매" 이제 바울이 배를 타고 목적지에 갈
일이 작정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로마로 가게 됩니다. 로마의 항해는 오늘날의 우리들이 항해를 하는 것처럼 그리 쉽게 갈 수
있는 여정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여정은 276인이 하께 하는 커다란 여정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여정에 인간적인 방법들을 다 동원하여
행해를 시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슬림을 피하여 구보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바람이 일어나서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은 일을 이루어 갑니다. 그런데 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나도 맞은편에 이르러" 항해는 그들의 이야기처럼 쉽게 만들어가지 않습니다.
계속하여서 9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은 그 항해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선주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행선을 하는데 참으로
많은 어려움과 손해가 잇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말을 하였지만 13절의 말씀을 보니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순하게
부는데는 그들이 득의를 한 줄 알고 항해를 지속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깁니다.
14절을 보면"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그들은 지중해의 계절풍을 만나게 됩니다. 그 계절풍은 그들의 그 동안의 기술로 쉽게 헤어 낼 수 있는 것의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18절의 말씀을 봅니다.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그들의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구상을 하여 보았습니다. 20 절의 말씀을 봅니다.
"여러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수고하고 애를 썼으면 그것에 대한 대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결과는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와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마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는데
때로는 그 인생의 배가 순풍에 돛을 달고 미끄러져 나가는 것처럼 잘되는 것 같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위기를 만났던 바울은 그 위기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갔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분명한 것은 바울은 그 속에서도 평안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것이 가능 할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276명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그
풍랑중에 안심을 할수 있는가를 보여 줍니까? 불가능 한 것들을 성경은 기록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풍랑가운데 어떻게 평안할 수
있을까?
첫째로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물론 바울 사도는 다메섹 도상에서부터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기초 삼아서 살아가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어떤 환경속에서도 변한 것이 아닌것입니다. 오히려 그로 하여금 그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바울은 말하기를 울어서 왜 내 마음을 슬프게 하느냐고 나물하였던 사람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 때문입니다.
23절의 말씀을 봅니다.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밤에 내곁에 서서 말하되" 그는 사공들이나 선주의 마을
들었기 때문에 평안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적인 위로로 인하여 평안을 소유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평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 우리들에게 전달이 됩니까?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데
그 음성이 들려옵니까? 채널을 바꾸지도 않았는데 여러 방송들이 자동적으로 비추어 집니까? 아닙니다.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은 늘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오늘날처럼
참으로 많은 일들이 도전하여 오는데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해결을 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가 어디 입니까? 그
중의 하나는 기도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 주십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미래적 하나님의 계획들을 알려 줍니다. 기도가 상실이 될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가 없어질 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향상을 그리게 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나보다 나의 모양을 더 잘 그리고 계신
하나님, 나의 현재와 미래와 영원까지 알고 계신 하나님, 내 실패도 아시는 하나님, 나의 장점도 아시는 하나님, 이런 분 앞에서는 나는 아무런
낙망과 실망을 가지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에게 희망이요 그분이 나에게는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아니 바울처럼 그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한 선언을 할 수가 있다면 그는 아무런 염려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아무리 많은 풍랑이 닥친다 할지라도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대 한 풍랑 속에서도 주님을 찬양 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풍랑이라는 위기에 왔습니까 다시 한번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인생의 사명이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대개는 은퇴를 한 이후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나는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환난과 문제 앞에서 아무런 몸부림도 치지 않고 안타까웁게 죽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명은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24절의 말씀을 보시면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쎄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은 그에게 그가 감당을 할수 있는 풍랑은
아니지만 그 풍랑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풍랑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가이사 앞에 서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명을 알고 있는
바울에게는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명령을 허락하신 사명을 받고 있는 한은 그에게는 참으로
그 위기가 위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너와 함께 행선 하는 모든 사람을 다 네게 주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유라굴로하는 그 태풍 앞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죽음의 그림자로 씌워진 사람들 앞에서 바울은 선언하지 않습니까?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는데 우리가 풍랑을 이길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풍랑 속에서 이렇게 담대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모세를 기억을 하여 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몰이로 하루를 살아가는 모세를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나는 내 백성의 고통을 알고 그들의 우고를 들었으니 그들을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라 그리고 모세를 하나님은 보내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애굽의 바로에게 상당히 많은 아픔 당하게 됩니다. 그리함에도 모세는
그들의 그 방해하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실망하지 않고 가나안으로 인도를 하지 않습니까? 모세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일으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게십니까? 고작 돈이나 벌어서 먹고살기
위하여 하나님이 생명을 유지하여 주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니은 어려분들에게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때로는 어려움 앞에서 때로는 고난 앞에서도 일어서야 할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존 밀톤이라는 사람은
어렸을때에 창세기 1장에서3장까지를 일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가지고 멋진 한편의 글을 쓰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좀처럼
그의 뜻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불우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어른이 되어 정치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갖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갖히게 되었을 때에 그를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편지를 써보내었습니다.
"이 감옥이야말로 내 서설의 언어와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적절한 장소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실낙원이라는 찬란한 꿈을 붓으로 옮기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후에 참으로 위대한 실낙원이라는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망이 있습니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그보다
휠 씬 높은 계획을 갖고 여러분들을 부르셨음을 인정을 하시고 풍랑 속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 볼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2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선언을 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실 수 있습니까? 그 풍랑이는 자리에 우뚝서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바울을 상상을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의 신앙의 자리가 가장 큰 고난을 당하였을 때에 그의 신앙의 위치를 발견 할 수 가 있다는 것입니다. 풍랑가운데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대서양을 건너면서 풍랑을 만났을 때에 그는 참으로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선교사였습니다. 그 풍랑이 나를 덮친다면 나는 어떻게 할것인가로 고민을 하고 있을 때에 갑판 한복판에서 찬송의 소리가 납니다.
그곳으로 올라가 보니 모라비안 교도들이 풍랑이 이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갑판에서 기도회로 모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들은 두렵지 않소
그랬더니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소.
내가 사랑했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면 우리는 구원의 주님 앞에 설
것이 아니오?라고 반문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훗날 일기장에 이런 고백을 썼습니다. "풍랑을 만났다는 사실보다도 죽음 앞에서 담대 할
수 있었던 모라비안 형제들의 신앙간증이 나에게 커다란 도전이었고 충격이었다"고 썼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믿었던 모세 그는
백성을 이끌고 홍해 앞까지 다달았습니다.
바로의 철병거 600승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달음질하여 올 때에 백성들은 철병거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갈등을 가지고 있는 지 모릅니다. 그때에 모세는 이런 선언을 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니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모세는 불평하며 원망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이 상황을 하나님이 만들어
가리라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세입니다.
만약에 그 성난 모습으로 죽음의 현실 앞에서 고민하고 있는 그들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만약에 그들이 고난을 당하게 되었더라면 백성들은 모세를 어떻게 하였을까? 아마도 살아있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신뢰하였던 모세는 그 상황 중에도 하나님의 역사를 믿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 우리들은 늘 이런 신앙고백을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사오며"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적 고백입니까? 그런데 이 신앙의 고백이 우리들의 자리에서 표현되고 있습니까?
삶 속에 만들어지는 그 고난의 모양을 보면서, 심각한 풍랑을 만나는 우리들의 삶의 깊은 질곡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런
신앙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있는가? 믿음이 정적 필요한 시기에 우리들의 신앙의 자리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좋을 때만 우리는 믿습니다. 라고
할뿐이지 정작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는 그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풍랑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이 면제되었다고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어떤 의미에서는 환난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환난의 자리에
서게도 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 사도가 풍랑을 만나셨을 때에 주님은 그들속에 닥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곁에 닥아 오시는 주님이 똑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자리에 닥아 오심을 인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에게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24절의 말씀을 보시면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여망이 없다고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선주도 불안하여하고 죄수 276명의 사람들도 염려를 하는 순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는 그 사람들에게 소리쳐 알려주기 시작을 합니다. 22절의 말씀부터 시작이
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서서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너와 함께 행선 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 고난을 이겨 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그가 섬기는 하나님을 소개를 합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리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상황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아무런 이야기를 못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런 소리는 하나님 앞에서 지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당신도 구원하실 것입니다.! 아우성치는 사람들에게
이런 선언을 할 수 잇는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그들은 모아놓고 34-36절까지 봅니다. "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을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음식을 먹지 못하고 주린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음식을 먹으라 권 하노니
이것은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하고 떡을 떼어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저희가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똑같이 고난을 당하는 현장에서 그렇게 놀라고
허둥대고 염려하고 낙심하시렵니까? 아니면 우리의 그 건강한 믿음으로 풍랑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뚝 서서 일어나 바울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시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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