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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을 힘써 알라 (출애굽기 6 : 1 ~ 9) 관상을 잘 보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관상을 잘 봤습니다. 길을 가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고아원 출신이겠다느니, 저 사람은 부모가 없겠다느니, 저 사람은 남편을 일찍 잃었겠다고 던지는 말이 척척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쪽집게였고 항상 손님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관상을 보다가 의문점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관상대로 되지 않은 예외를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벌써 죽었어야 할 관상인데 건강하게 지나가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거지상이 틀림없는데 양복입고 회사에 버젓이 다니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하루는 지나가는 사람을 보니 벼락맞아 죽을 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 벗이 행복한 얼굴로 지나가길래 따라가 보았습니다. 숨어서 엿보다가 그 사람이 들어간 집에 가까이 가보니 대문에 00교회 성도의 집이라는 교패가 달려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더욱 궁금하였습니다. 웬일일까? 사람마다 운명을 타고 나는 법인데! 태어날 때 팔자가 정해지는 법인데! 에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상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그 분이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 뵙고 지금은 어느 감리교회의 권사님으로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답니다. 그녀는 발견했던 것입니다. 관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관상도 초월하게 하시는 믿음의 능력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하신 분으로 소개하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구원의 여호와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시고 저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하셨던 언약을 기억하고 이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모세에게는 용기를 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이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이 말을 전했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너무 힘든 상황에 처한 나머지 하나님께 희망을 두지 못했습니다. 환경을 초월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중심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힘써 알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시기 전에 먼저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었습니다. 2절의 말씀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시기에 앞에 그 여호와는 전능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전능의 하나님은 '엘 샤파이'입니다. 헬라어로는 전능은 '판토크라토오로'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만능 즉 " 온 세상의 힘을 다 합쳐도 당해낼 수 없는, 부가늘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찬조하셨고, 모든 것을 지배하시며 모든 것을 통솔하시고 모든 것을 장악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고백의 첫머리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러나 오늘 봉독한 본문에서는 하나님에서 자신을 여호와로 소개합니다. 이전에는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셨으나 이제 여호와로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여호와(야웨)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를 사람들이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것도 좋은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게시는 분 즉 자존자이십니다. 그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해석한 것은 철학적이고 관념적입니다. 좀 더 좋은 해석은 "나 여기 있다"입니다. "너희 아버지 하나님이 여기 있다"라는 뜻입니다. 칡흙같이 어두운 밤, 아들이 길을 잃고 낙심하고 있을 때,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애태우고 있을 때 "나 여기 있다"라고 찾아오신 아버지와 같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어두움 속에 있었습니다. 고통 당하고 있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탄식이요 아우성이었습니다. 온통 신음소리가 이스라엘 진영에 가득찼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 길이 보여야 할텐데 도무지 샛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낙심하다 못해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자포자기하고 되는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 여기 있다" 할렐루야,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박수도). 그러면 이제는 '나 여기 있다'라고 말씀하시며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본문을 중심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여호와는 백성들의 고통과 신음을 아십니다. 5절 말씀에서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소리를 내가 듣고"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의 슬픔도 아십니다. 우리가 당한 어려움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근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십니다. 엘리 위젤은 그의 책 밤(Night)에서 죽음의 수용소 아우쉬비츠의 일화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어린 소년이 사소한 수용소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모든 수용자들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의 몸이 밧줄에 매달렸을 때 위젤은 누군가가 묻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런데 그때 위젤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어디에 게시냐고? 그는 바로 여기에, 지금 이 교수대에 저 소년과 함께 매달려 계신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분은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고통당하고 계신다는 영감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십니다. 4∼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룩한 땅을 기억하노라"고 하십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했던 약속입니다. 창세기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성취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잊었을 것입니다. 그런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언약하신대로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약 4∼5백년 후에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의아하게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약속을 400년간에 이루시냐고요! 그러나 여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동안 가나안에 살고 있던 가나안 족속들은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애굽이라는 곳에서 큰 민족으로 성장하여 가나안 땅을 인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길던 짧던 그의 언약을 이루십니다. 셋째,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의 일군으로 삼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무모하고 잔인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희생시키면서 피라밑을 완성시킨 사람들입니다. 거대한 스핑크스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올바른 정신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니 수많은 노동자 노예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이스라엘도 시달렸습니다. 고통을 당했는데 하나님이 구원하셨습니다(6∼7절 참조). 여호와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으로 바로의 콧대를 꺽으시고 이스라엘을 건져내셨습니다. 그러나 능력이 모자라서 10번씩이나 재앙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10번의 재앙을 통해서 애굽사람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고 있던 우상들을 한가지씩 깨뜨리신 것입니다. 저들이 믿고 섬기던 나일강도, 해와 달도, 소도 다 하나님의 능력의 재앙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요, 능력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드디어는 10가지 재앙으로도 깨닫지 못하고 뒤따라오는 애굽의 군사를 홍해를 가르고 수장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사히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애굽의 군사는 수장시켰습니다. 이로써 다시 한번 여호와만이 구원의 주님인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가 전능의 하나님이시다 이제는 구원의 주 여호와가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여호와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시고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이것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인줄 너희가 알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심하게 고통 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귀에는 이러한 말씀이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9절에서 말씀하듯이 "모세가 이와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고 하였습니다. 오죽했으면 그 지경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그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형편이 힘들어도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풍랑속으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도 물위로 걷기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물위로 걸을 수 있었으나 풍랑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물에 빠져들어갔습니다. 풍랑보다 크시고 능력있으신 주님을 바라볼 때만 풍랑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풍랑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환경도 초월하십니다. 하나님은 관상도 초월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크신 하나님을 믿고 찾고 기도하셔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일수록 문제를 크게 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 뜻대로 이루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름대로의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그분은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크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여 쉽게 낙심하고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어떤 환경과 조건도 초월하십니다. 크신 하나님을 찾고 믿고 기도하시면서 삶에서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