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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출3:6)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3:6)

1.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신 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셨습니다(출3:6).

『나를 너희에게 보낸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출3:15)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말씀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약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읽어본 적이 없느냐?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셨으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들의 하나님이시니라』(마22:31,32)

또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가 있는 사람들을 언급하시면서 이 세 사람,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해 열거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대언자는 하나님의 왕국에 있고 너희 자신은 쫓겨난 것을 볼 때에...』(눅13:28)

이 세 사람은 이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 세 사람을 살펴보는 일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공통점

세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한 혈통이라는 것, 또는 남자들이라는 것, 등등...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들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그들은 완벽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실 당시, 그들은 흠이 없거나 완전한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숭배 속에 젖어 있었고, 이삭은 유약하기까지 해서 싸움을 피하고 달아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야곱은 약삭빠른 사람으로서 아버지와 형을 속이면서까지 하나님의 복을 취하려고 몸부림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러주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위안과 소망거리가 됩니다. 사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과 비교할 때, 우리의 삶이 그들과 매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전날에, 온갖 거짓에 싸여 우상숭배를 해왔던 자들입니다. 돈의 우상, 생각의 우상, 경험의 우상, 사람의 우상 등, 등...온갖 탐심에 미혹되어 우리들나름대로 참되신 하나님을 왜곡시켜 이해하거나, 그 하나님을 부정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불완전한 존재이고 연약한 사람들이었음에 틀림없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있어서 한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으로 받게 될 곳으로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자기가 어디로 가야할 것을 알지 못한 채 떠나갔으며』(히11:8)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임할 일들에 관하여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였으며』(히11:20)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자기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11:21)

히브리서는 이 세 사람을 똑같이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대열에 집어 넣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공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한결같이 믿음으로 살다간 사람들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처럼 우리에게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부분이 많을 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약속 받았던 영적인 복들의 수혜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난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더불어 복을 받느니라』(갈3:9)

만일 우리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되심"을 의심치 맙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오늘날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데, 그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산 것처럼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을 때입니다.

3.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다른 점

1)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생애 중에는 결단의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단의 촉구는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갔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을 때, 그는 아버지의 집과 고향, 친척, 본토를 버려야 했습니다. 또 외로운 나그네 시절에 함께 의지가 되었던 롯을 떠나 보내는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할례라는 의식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을 나타내는 결단, 마침내 그의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내어드리는 결단...아브라함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결단과 순종의 연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했던 결단들은 그렇게 쉽게 생각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는 채, 어떻게 고향을 버린단 말입니까? 큰 손해가 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자기보다 손아래 사람이 조카 롯에게 선택할 권을 양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쫓아 친척을 떠나는 지름길이라면 그렇게 했습니다. 또는 그 독자를 어떻게 아낌없이 내어드릴 수 있습니까? 생각할수록, 그가 했던 믿음의 순종들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며, 혹간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믿음의 생애를 걸어갔습니다.

2)이삭
아버지 아브라함의 삶이 결단의 연속이었다면 이삭은 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큰 결단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그에게 많이 나타나시지는 않았습니다. 나타나셨다 하더라도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들을 상기시켜 주기 위한 정도였습니다. 이삭은 그런 약속들을 누리는 조용히 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야곱을 축복하므로 전수했습니다.

3)야곱
이 세 사람 중에 가장 파란만장은 인생이 야곱이 아니었는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이 받을 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어떻게 해서든 그 복을 얻어보려고 자기 나름대로의 수고와 방법으로 온갖 애를 썼습니다. 형을 농락하고 아버지를 속여 가면서 마침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 가로채는 일에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쫓기는 신세가 되어 멀리 외삼촌 집으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거기서도 그는 라헬이라는 여자를 점찍었습니다. 그녀를 사랑해서 그녀와 결혼하기를 애썼습니다.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을 그녀를 위해 희생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첫날밤 그와 함께 잠자리를 한 여자는 그가 사랑한 라헬이 아니라 그녀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또 그는 외삼촌의 재산 중에 얼마를 조금씩, 조금씩 모아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재산을 형에서 앞에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얍복강이라는 곳에서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을 통해 몸에 상처를 안게 되고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고도 아직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또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자식들이 살인을 자행한 후,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가 처음 떠났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야곱이 예전에 집을 떠날 때, 그 곳에서 한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에서 보여주듯이 야곱이 그 사닥다리를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루고자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비로소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파란 만장한 야곱의 생애는 그를 훈련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스스로 해보려고 몸부림치는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루셔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싸우시며, 그의 집을 세우시고, 그의 약속들을 그 가운데서 이루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여정들이었습니다.

4.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삶

우리가 다룬 이 세 사람처럼 어떤 이는 많은 결단으로 그들의 생애를 보내온 사람이 있습니다. 또는 조금 조용하지만,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전수하는 것으로 그들의 생애를 다 보낸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르게 하나님의 복을 얻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수고하며 애쓴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세 사람이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점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간 이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결단에 익숙한 사람들은 결단하지 못하고 조용조용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정죄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유약하냐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이삭의 하나님도 되셨습니다.
매사 조심조심하고 그저 조용하게 신앙생활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결단하고 이리저리 다니고, 일을 저지르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향해, 신앙생활을 그렇게 꼭 힘들게, 혹은 유별나게 해야 하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인 반면 또한 아브라함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야곱의 이전 모습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를 부서지게 하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알게 하기 위해 많은 시간들이 필요했습니다. 무려 20년이라는 세월을 야곱은 돌아가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가 되려면 꼭 야곱처럼 세상 물정 다 겪어 보고 실패도 해보고, 멀리 갔다가 돌아와 봐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그런 것이 없이 어떻게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을 보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집에서 양육되어지며 나실인으로 구별되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과 같은 생애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정도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며 곤하고"라는 찬양을 부르면서 주께 돌아올 것이고, 어떤 사람은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라는 찬양을 부르면서 주 안에 살아온 날들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5.서로를 인정하는 삶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라면 다양한 삶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라면 다양한 삶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라면 다양한 삶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진리의 다양함을 인정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삶의 가치 동등하게 인정하자는 말도 아닙니다. 혹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와 그 약속 밖에 있는 자를 동등하게 대우하자는 말도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 약속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와 다르다는 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자입니다.

『남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의 서거나 넘어짐이 제 주인에게 달려있으매 실로,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능히 서게 하실 수 있음이라』(롬14:4)

하나님의 종들을 판단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았습니다. 나와 다른 그리스도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시1:1).

모두가 다 나처럼 해야 한다는 것은 제거해야 할 고집입니다. 내 살아온 방식대로 해야 하며, 내가 느낀 대로 같이 느껴주어야 하고, 내가 제시한대로 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진정으로 남을 섬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교파 내지는 파당의 창시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교파는 획일화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개인 양심의 자유나, 신앙적인 자유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여러분 중에서, 내가 이 정도 헌금했으니까, 남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없는 시간 쪼개서 이렇게 와서 일하는데 당신은 뭐하냐 와서 거들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하니 당신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나 중심적인 사고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약속이 각 사람 가운데 어떻게 실행되는가에 관심 갖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이시지, 내가 아닙니다.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이라는 단서가 붙는 것이지, 꼭 나처럼 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 다양한 것을 인정하지 못할까? 아직도 그 나무에 고집이라는 가시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이라는 가시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이 각기 다른 삶의 모습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그 약속, 곧 하나님의 약속만은 품고 믿음으로 살아갔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 약속이신 그리스도만 드러나길 바래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