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이 년 후에(요셉 8)
창세기 41: 1-13
기다린다는
것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런던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애인과 함께 가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긴
시간도 짧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불편한 사람이나 아니면 혼자서 여행을 하게 되면 시간이 잘 안가는 것 같습니다. 멈추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상대방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아는 방법이 그와 함께 있으면 편하고 시간이 아쉽게 느껴지면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요셉이 보낸 2년이라는 시간의 길이는 어떤 것일까요? 2년이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혹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기다렸기에 정말이지 오랜 시간으로 느껴졌을 겁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40장 14-15절 말씀입니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 요셉의 예견대로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서 나가게 될 때 그의 가슴은 설레었을 겁니다. '이제
내일이면, 나도 이 감옥을 나가게 될지도 몰라, 그리고 꿈에 그리던 고향에 가게 될 거야, 아버지 야곱은 지금도 살아 계실까? 동생 베냐민은
얼마나 컸을까?' 이런 생각으로 뜬눈으로 밤을 세웠을 겁니다. 하루 종일 일손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나저제나 하던 해방의 소식은 들려
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쏜 살같이 달아납니다. 봄이 여름이 되고, 여름이 가을로, 가을이 겨울이 되기를
두 번이나 지나가도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2년이 마치 20년 세월처럼 길게 느껴진 질곡의 세월이었습니다.
'이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을 요셉은 어떻게 보내었을까?'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셉이 신구약에서 가장 흠없는 인물이었으므로 얼른 정신을 차리고 믿음의
삶을 살았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요셉이 절망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요셉 또한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절망할 줄도 알고 힘들어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동생 베냐민을 만나고, 아버지 야곱을 만났을 때 통곡하며 우는
요셉의 모습은 그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이번 주에 권명선 집사님의 지나간 간증을 개인적으로 잠깐
나누었습니다. 집사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시더군요. '술에 잔뜩 취해서 내리는 비를 땅바닥에 드러누워서 맞으면서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했답니다. 그 마지막 순간, 내려갈 때까지 다 내려간 다음부터 하나님이 서서히 상승 곡선을 그리면서 새로운 길, 좋은 길로
인도해 주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임을 알겠다고 말입니다.
아마 요셉도 그랬을 겁니다. 사랑 받던
아들에서, 노예로, 이제는 죄수로 더 이상 내려갈 곳조차 없고, 절망할 것도 없는 벼랑 끝에 선 이 사람 요셉은 절통한 심정을 느꼈을 겁니다.
노예로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보디발도 보았고, 죄수일 때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것을 전옥도 보았는데, 왜 감옥에서
내 보내주지 않는 겁니까? 이 질문을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이제는 포기하고 아무 생각 없이 깊고 깊은 망각의 세계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만 이 년이라는 시간을 요셉을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만 이 년 후에"(1절) : 하나님의 때는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이 요셉을 2년도 꽉찬 24개월을 감옥에 있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성경은 요셉이 만 2년 동안 감옥에
더 있게 되었다고 적고 있을까요? 그것은 요셉이 사람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40:14-15) 그는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을 구원해 줄 사람으로
믿고 청원을 했습니다. 그 동안 요셉이 보여준 흠없는 모습과 너무 대조적입니다. 얼마나 요셉이 노예와 죄수의 생활이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지긋지긋합니다. 얼른 이 시절이 끝나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셉의 착각입니다. 누가 요셉에게
꿈을 주었습니까? 누가 요셉을 형들의 손에게 팔리도록 허락하셨습니까? 누가 요셉을 감옥으로 보내어 고생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단지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요셉을 노예와 죄수의 생활에서 구출할 수 있습니까? 누가 요셉을 모든 사람이 추앙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합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외에 그 누가 요셉을 구원하고 축복한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요셉은 너무 힘드니까 사람을 의지합니다.
시편 146편 3-5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막상 우리가 어려울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가는 사람들은
다 등을 돌립니다. 사람을 의지하면 돌아오는 것은 실망과 허탈뿐입니다.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을 의지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만 2년 동안의
절망이고 한숨뿐입니다. 차라리 그에게 부탁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겁니다. 나와 늘 함께 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을 겁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감옥에 2년을 더 두게 하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구해주었다면 요셉의 꿈은 어떻게 될까요? 그는 단지 노예와 죄수의
신분은 벗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보디발이 알고도 묵인했다는 것과 그 부인이 자신을 유혹했다는 것을 다 밝혀야
합니다. 결국 한때 자신이 섬겼던 그들을 다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인을 될지언정 하나님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셉을 감옥에서 꺼내니까 총리가 됩니다. 요셉이 바로를 찾은 것이 아니라 바로가 급해서 요셉을 찾습니다. 요셉은 죄수로 바로 앞에 선 것이
아니라, 바로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선생으로 섭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감옥에 2년을 더 두신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집트의 법은 남자가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30세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46절을 보면 요셉이 바로
앞에 나아갈 때, 그의 나이 30이라고 합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30에 하나님은 요셉을 구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60세에 약속을 받고
100세에 이삭을 얻었습니다. 모세는 40년을 광야에 있었고, 80이 되어서야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을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30년을
목수의 아들로 사시고, 단 3년 반을 사역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당신의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야고보
사도도 참고 기다릴 것을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5장 8절 말씀입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하나님은
요셉을 높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을 통해서 조금 높이시기보다는 하나님이 크게 높이시는 것을 기대하고, 믿음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그 날이 오기까지 사람 의지하지 말고, 마음을 굳게 하고 하나님이 쓰실 만한 금그릇으로 준비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만 바라봅시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 바랍니다.
"해석하는 자가 없더라"(8절) :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시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이집트를 다스리던 바로가 두 번의 꿈을 꿉니다. 살진 일곱
암소가 풀을 먹다가 뒤에 온 마른 암소 일곱을 먹습니다. 두 번째 꿈은 첫 번 꿈과 내용이나 구조가 비슷합니다. 충실한 일곱 이삭이 마른 일곱
이삭에게 먹힌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꾼 이 꿈이 뭔가 심각하고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 중근동 지방의 사람들은 신이 꿈을 통해
운명과 미래를 보여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동일한 내용의 비슷한 버전의 꿈을 두 번이나 연거푸 꾸었다는 것은 모종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바로의 꿈을 해몽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 누구도 바로에게 해석해 주지
못합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술객과 박사라는 사람들은 '거룩한 성문서를 해석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당대의 학문과
사상에 능통할 뿐 아니라 하늘의 별과 우주를 연구하는 자연과학자이며, 신의 뜻을 풀이하는 예언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해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바로의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꿈을
해석하긴 하였지만, 만족할 만한 해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 동안 바로가 大이집트 제국을 다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꿈 하나 이해하지 못하고 해석하지 못합니다. 얼마나 나약하고 무능력합니까? 바로의 한 마디에 산천초목이 다
떱니다. 사람 목숨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의 말이면 죽을 사람도 살리고, 산 사람도 죽을 수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살고, 떡 굽는 관원장은 죽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집트를 다스리는 것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의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이집트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꿈을 해석해 달라는 바로의 요청에 요셉은 뭐라고 합니까? 16절에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고 합니다.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로는 그 동안 착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바로의 꿈은 바로의 주인과 이집트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바로에게 각인시켜 줍니다.
그리고 술사와 박사들은 어떠합니까? 술사와 박사들이 인생의 모든 것을 통달하였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해석을 못합니다. 한 사람이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수많은 박사들이 자신의 전공과
지혜를 모아서 아무리 해석하려고 해도 해석이 되지 않고, 올바른 해석이 안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온 니고데모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누구보다도 성경을 잘 알고 박식한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동아일보를 많이 읽었는지 횡설수설합니다. 모든 지식의
근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안들 무엇이 유익합니까? 내 영혼이 지옥가는지도 모르고 세상의 지식을 아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또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선비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선비가 사공에게
묻습니다. '자네는 공자를 아는가?' 사공이 대답합니다. '모르는 뎁쇼.' 그러자 또 묻습니다. '그러면 우주의 이치를 아는가?' 또 사공이
모른다고 합니다. 선비가 그 말을 듣고 '자네는 인생을 헛살았군' 그 말을 들은 사공이 모른 척하고 배를 흔들어서 선비를 물에 빠트립니다. 물에
빠진 선비는 헤엄을 할 줄 모릅니다.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선비를 향해 사공이 묻습니다. '선비님은 수영을 할 줄 모르십니까? 인생
헛살았군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9-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인간의 지혜로움이 하나님의 어리석음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뜻을 알겠습니까?
사람의 생각과 속도 잘 모르는 우리가, 아니 자기 자신의 마음도 잘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가 어찌 역사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살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압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은 니고데모가 아니라 수가성 여인입니다. 도덕적으로 흠없고,
지식에 모자람이 없는 니고데모는 전혀 맹통입니다. 나머지 공부를 해도 한참을 해야 겨우 알아들을 것 같은 수가성 여인은 처음에는 헷갈리고
헤매다가 나중에는 잘 깨닫습니다. 은혜 받고 변화됩니다. 게다가 동네 사람 다 전도합니다. 안다고 하면 모르는 것이고, 모른다고 하면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인생의 길을 알고 지도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알 수 있는
자는 겸손한 자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 수가 성 여인과 같은 마음, 요셉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 만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마음을 품어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 바랍니다.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 :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
오늘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세 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고백을 보십시오. 자신이 감옥에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낼 때 성실히 보살펴 주고, 꿈까지 해몽해주었던 사람
요셉을 잊었던 것이 생각난 것입니다. 요셉의 부탁을 정말 잊어버렸다가 다시 생각난 것인지, 아니면 일개 히브리 노예 얘기를 말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서 말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말해 봐야 보디발이 있어서 말하지 않았던지 그는 2년 동안 요셉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가 요셉을
잊은 것을 허물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가 지금까지 요셉을 감옥에 방치한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이 관원장은 이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요셉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은 요셉에게 죄를 짓는 일일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불리한 일입니다. 바로의 꿈 때문에
나라가 발칵 뒤집힌 이 상황에서도 요셉의 일을 말하지 않고 있다가 혹시 다른 경로를 통해서라도 그가 바로 앞에 선다면 더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 신실하지 못한 바로의 신하를 구석으로 몰아서 스스로 요셉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셨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2년이나 잊고 지냈지만, 하나님은 결코 요셉을 잊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람은 너무나도 자주 잊어버릴 뿐
아니라, 뻔히 알면서도 손해가 두려워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틀림이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잊어버려도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한번 정하시면 결국 말하게 됩니다. 그가 요셉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도 하도록 하십니다. 다윗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시편 27장 10절에서 말합니다. 부모가 어찌 자식을 버립니까? 자식이 부모를 버려도 부모는 자식을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을 인륜이라고 하고, 본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혹 부모가 자식을 버릴 수 있다 손치더라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 또한 이사야 49장 14-16절에서 말씀합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요셉이 2년 세월 동안 혹여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닐까
하며 불면의 밤을 지샜지만, 하나님은 그를 결코 잊지 않으신 것입니다. 젖먹이는 여인을 보십시오. 아이를 보는 것이 좀 고된 일입니까? 아이를
돌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까무륵 좁니다. 정신 없이 곯아 떨어집니다. 남편이 불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아기가 울거나 보채면
얼른 일어납니다. 본능적으로 젖가슴을 열어 아이에게 물립니다. 어찌 젖먹이는 어머니가 아이를 잊는단 말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혹 잊을
수 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래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기억하셨습니다. 잊지 않으시고
요셉을 감옥의 죄수 생활에서 부르셨습니다. 만 2년이라는 어찌 보면 짧지만, 견디기 어려운 시절을 지내게 하신 하나님은 끝내 그를 환한 세상의
존귀한 자리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요셉을 구출하신 것입니다. 들풀도 입히시고 먹이시는 하나님, 하늘을 나는
새도 기르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잊으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 드리시기 바랍니다.
참새 한 마리보다 더 귀한 사람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돌보신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참새 비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과 풍습이 비슷해서 참새 구이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 참새는 가난한 사람들이 즐겨먹는 음식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참새가 값이 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0장 29절에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하는데, 누가복음 12장 6절에는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린다고 합니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이면, 두 앗사리온이면 네 마리가
되어야 하는데, 다섯 마리입니까?
골목에 트럭에 사과를 파는 분들을 보십시오. 예를 들어 한 소쿠리에 1000원하는 사과를
팝니다. 그런데 두 소쿠리를 사는 사람이 한 두개 더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인은 약간 흠있는 사과를 모아 두었다고 '이거 이렇게 팔면
밑지는데'하면서 팝니다. 이스라엘의 장사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앗사리온에 참새가 둘이지만, 두 앗사리온을 팔 때는 한 마리를 더 얹어서
줍니다. 그런데 그 때 덤으로 주는 참새는 살이 잘 오른 통통한 참새가 아니라, 다리나 팔이 부러지거나 무언가 흠이 있는 참새입니다.
자 다시 한번 누가복음 12장 6절 하반절과 7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여기서 하나는 바로 그 흠이
많은 참새 한 마리를 말합니다.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다리가 부러지고 팔이 없어서 제 값도 받고 팔지 못하는 그런 참새 한 마리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된" 우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합니다. 어찌 참새와 사람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참새도 돌보시는 하나님이 우리 또한 섬세하게 정확하게 지켜
보호하시니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노라."(13:5-6)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단코 잊지 아니하십니다. 모두가 나를 버리고 욕해도
주님만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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