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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니엘에서 있었던 일
                       
 (창세기 32:21-32)

야곱이 고향으로 가는 길에 에서를 두려워하여 기도하고 선물을 보낸 이야기를 이미 살폈습니다. 그 이후에도 야곱에게는 엄청난 일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얍복 강가의 씨름'으로 알려진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선물을 먼저 보낸 다음 두 아내와 여종, 그리고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그 소유와 함께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건너지 않고 혼자 남게 되는데 이 때 그 유명한 씨름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알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게 되고 그와 밤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어찌나 심한 씨름이었던지 야곱의 환도 뼈가 문질러졌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악착같이 싸웠습니다. 끝내는 야곱이 승리를 합니다. 그리고 축복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고 함으로 기어이 축복을 얻어냅니다. 야곱이란 이름을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바꿔주시는 축복을 얻는데, 그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가 싸운 장소가 바로 얍복 강가, 즉 브니엘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싸우는 사람

오늘 말씀은 야곱이 어떻게 하였는가와 그래서 그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사자와 싸웠고 그는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두 축은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그가 싸웠다는 내용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씨름을 했습니다. [얍복]이란 말은 "싸우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지금의 '와디 젤카, 푸른 강'입니다. 사해와 갈릴리 호수 중간에 위치하여 요단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요단강의 지류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온 천사와 씨름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건너보내고 홀로 남은 야곱의 의도를 생각하면 이 씨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기도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막6: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실제적으로 육체적인 씨름으로 본다면 문맥이 이상해집니다. 왜 야곱이 하나님과 싸워야 합니까.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것들입니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렇습니다. 싸움의 대상이 잘못되면 안됩니다. 교인들끼리, 목사와 장로, 가족들끼리, 우리 민족끼리, 교회들간에 싸움은 대상이 잘못된 싸움입니다. 야곱의 싸움은 결코 하나님과 대적한 행위가 압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기도인 게 틀림없습니다.

고향으로 가야하는데 그 앞에 놓인 난관이 너무 많습니다. 그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과 혼을 다하는 결사적인 기도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던 기도와 견줄 수 있는 기도입니다.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씨름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내용은 (마26:39)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입니다.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 같았고, 야곱은 환도뼈가 으스러지도록 기도의 씨름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야곱인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환도뼈는 엉덩이뼈나 넓적다리를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으스러지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간절한 씨름기도에 합격판정을 내리시는데, 그것은 곧 넓적다리를 치시는 거였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차라리 야곱에게 져주셨다고 함이 옳습니다. 야곱은 이 씨름에서 승리합니다. 그러나 영광의 상처도 안습니다. 이런 영광의 상처 하나쯤 갖고 싶지 않으세요?

이름이 바뀐 사람

이 씨름으로 얻는 결과는 실로 엄청납니다. 그의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원래 야곱이 원한 것은 아닙니다. 아마 야곱은 당장 군대를 이끌고 오는 에서의 마음을 돌리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였을 것이고, 고향까지 무사히 도착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달리 이름을 바꿔주십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신 예입니다.

(28절)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그런데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는데, 사람과도 이겼다고 할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과는 이겼습니다. 앞으로 사람들과의 싸움에서도 일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서나 그 어떤 난관도 이길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요청한 것은 물론, 그 이상으로 축복해주십니다.

이름은 인격을 말합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의미는 그의 전인격에 하나님의 임재를 약속하신 행위입니다. 예전의 간교한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이스라엘을 만드신다는 말입니다. 새 사람을 입혀주신 겁니다.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바로 야곱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성경에 말한 대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란 뜻이기 보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란 뜻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준 이름입니다. 이제 간교한 야곱은 죽고 언약의 상속자인 이스라엘로 변한 겁니다. 속된 인간 야곱이 아니라 영적 인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앞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할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야곱은 당당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의미를 말해주는 성경이 있습니다. (롬9:4,5)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언약이나 율법의 계승자, 진정한 예배자로서의 이스라엘의 기능을 야곱은 이 때 부여받은 겁니다.

이 사건이 있었던 곳은 브니엘입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본 자는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갖는 축복은 아닙니다. 기도하여 응답 받은 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여러분이 이 축복을 누리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찌 보면 인생이 바로 싸움이요 씨름인지도 모릅니다. 무수히 다가오는 문제들을 앞에 놓고 씨름해야 합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야만 합니다. 얼마나 우린 이런 싸움에서 승리합니까. 날마다 지고 후회하고 낙망하지 않습니까. 씨름의 대상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문제와 씨름할 게 아니라 오늘 야곱처럼 하나님께 매달리는 씨름을 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 곁에서 임재하시며 도우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의 씨름을 걸어오길 원하십니다. 그럼, 분명히 져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에 속한 싸움으로 탈진하지 말고, 하나님과 담판하는 기도의 씨름으로 전인격적인 도우심과 보호를 받는 성도들이 되면 어떨까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브니엘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