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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이 진하여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앞서 아브라함의 말년의 삶을 말합니다. (23장)에서 아내 사라가 죽은 이후 (24장)에서 아들 이삭을 결혼시키고 죽음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삭에 의한 새로운 역사입니다. 구속사의 중심인물이었던 아브라함이 죽고 그 역사를 이어갈 사람이 이삭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죽지만 하나님의 일은 계속됩니다. 아브라함은 말년에 후처 그두라를 두었고 후처에게서 많은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그는 175세를 일기로 기운이 진하여 죽었습니다. 그의 장례는 이스마엘과 이삭이 맡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죽자 즉시 그 복을 이삭에게 인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2절)부터는 이스마엘의 후예들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삭과는 떨어진 하윌라 근처에 살았습니다. 이스마엘도 137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죽음은 명실공히 이삭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말년 아내 사라가 죽은 이후 아브라함의 삶은 쓸쓸했던 것 같습니다. 사라가 죽었을 때 슬퍼하고 애통했다는 기록(창23:2)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후처를 얻었습니다. 하갈처럼 아브라함의 시종이었다가 사라가 죽자 아내로 삼은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그두라]입니다. '향기'라는 의미를 가진 그두라는 6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가 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서자(庶子)로 구분된 것을 볼 때 언약의 자손인 이삭을 낳은 사라와는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명의 아들들은 앗수르, 미디안, 수아(욥2:11), 스바(욥1:15), 드단(렘25:23) 등의 아랍 계통의 족속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특이한 사실은 이들이 바로 후에 문제가 됩니다. 이스마엘이 문제가 되듯, 이들도 하나님의 역사 속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두라를 아브라함이 아내로 삼은 것이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창조원리는 일부일처(一夫一妻)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두라를 취함은 그것을 위배한 것입니다. 성경의 원리, 즉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어긴 결과가 지금까지 중동지역을 달구고 있습니다. 한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아들들끼리 싸우는 게 바로 중동 분쟁입니다. 아브라함은 재산을 서자들에게도 분배해 줍니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두라의 아들 6명에게 재산을 나누어줍니다. 이유는 그들을 이삭을 대하듯 했다기보다는 이삭과 분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재산을 주어 동방, 즉 아라비아 지방으로 이주하게 함으로써 이삭과 부딪히지 않도록 조처함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삭만이 가나안의 주인이 되도록 합니다. 비록 첩들을 두어 서자들을 많이 낳음으로 인간적 과오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창17:21)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삽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사람이긴 하여도 죽음 앞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수가 높고'라는 말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장수하고 죽었습니다. 오늘날 수를 못 채우고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백발이 영화의 면류관'(잠16:31)이라 했는데 아브라함은 장수하였습니다. '기운이 진하여' 죽는 것은 모두에게 공통사항입니다. 죽음이 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175세에 기운이 진하여 죽습니다. 이삭이 75세 되던 해이고, 사라가 죽은 지 38년 되는 해이고, 에서와 야곱이 15살이 되던 때입니다. 자신이 준비해 놓은 막벨라 굴에 장사됩니다. 아브라함은 죽음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스마엘의 후손과 죽음 (12-18절)은 이스마엘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마엘의 아들들은 느바욧, 게달, 앗브엘, 밉삼, 미스마, 두마, 맛사, 하닷, 데마, 야둘, 나비스, 게드마 등 12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각 족속을 거느리는 방백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셨던 약속을 그대로 성취한 일입니다. (창17:20)에서 이미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약속하신 바를 이루십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과는 구별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동쪽으로 하윌라(오늘날 예멘의 북부지방)와 서쪽으로 이집트 가까운 술 광야에 걸쳐 살았습니다. "그 모든 형제의 맞은 편"(18절)에 살았다는 말이 해석해 보아야 할 말입니다. 그들은 서로간에 대립적인 입장에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형제들이긴 하지만 별로 우애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창16:12)에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했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의 후손 중에 마호메트가 나타나 이슬람교를 만들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들의 원리 중에 하나가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코란을!"이란 구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16:12)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았습니까. 요새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안의 불상을 파손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의 이야기는 좋은 예입니다. 그들은 무장과 파괴를 신조로 하고 있습니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불상을 훼손하는 이야기들이 신문에 난 적이 있습니다. 불교인들은 그들이 기독교 신자라고 했습니다. 불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몰아세우기 위해 저지른 짓일 수 있습니다. 로마의 대화재 사건처럼 말입니다. 물론 진의를 알 수는 없지만 만약 기독교인이었다면 맹신자였을 것입니다. 맹신은 위험합니다. 그까짓 불상 몇 깨 훼손한다고 불교가 없어지는 겁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원리는 싸움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파괴가 아니라 건설입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 이스마엘의 후손은 많기는 했지만 파괴의 주역들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도 결국 질곡의 세월을 접고 137세를 일기로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죽음을 기록하는 (8절)과 이스마엘의 죽음을 기록하는 (17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수가 높고 나이 많아"라는 말이 빠져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은 장수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죽음을 만족한 삶이었다고 표현하는 거라면 이스마엘의 죽음은 그저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은 후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입니다. (시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고 했습니다. 이 둘의 죽음을 비교하여 우리의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같은 모습으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은 비록 부자관계이나 한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로써 극명하게 그 죽음이 대비됩니다. 무엇을 남기고 갔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다 갔느냐가 문제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 속담에 속지 마십시오. 정말 무엇을 남기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가 문제입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