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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의 죽음
               
       (창세기 23:1-20)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죽음과 장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해 에브론에게서 막벨라 굴을 매입하여 선영을 삼습니다. 사라는 127세를 일기로 삶을 접었습니다. 여자 나이가 성경에 기록된 것은 사라가 유일합니다. 그것은 그녀가 아브라함의 아내만이 아니고 모든 믿음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기록한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애틋한 정으로 아내를 보냅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부부가 무엇인지, 진정한 신앙인의 거래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끝이 좋은 나그네

(1절) “사라가 일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그렀습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라의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인생은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는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은 그의 인생이 “험악한 나그네길”(창47:9)이었음을 애굽왕 앞에서 고백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을 나그네로 살고 있음을 시사하였습니다.(벧전1:1 ‘흩어진 나그네’, 벧전2:11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

아브라함도 역시 (창25장)에서 죽습니다. 그는 175세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아브라함이 오늘 본문에서 마련한 가족 묘지에 묻힙니다. 이 묘지에 3대가 모두 묻힙니다.(창49:29-31) 비록 나그네로 남의 당에 얹혀살았지만 장사만큼은 자기 땅에 묻힙니다. 사라는 좋은 믿음의 발자취를 남기고 갔습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히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예,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아는 삶을 산 여인입니다. (벧전3:1-6)은 사라를 정결하고 단정한 아내의 모델로 제시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훌륭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믿음이 후예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냥 오랜 세월 머물다 가기만 한 나그네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아름다운 믿음으로 성장한 사람들입니다. 나그네지만 인생이 참 맛을 안 사람입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사라가 헤브론의 기럇 아르바에서 죽었습니다. 기럇 아르바는 ‘아르바의 성읍’이란 뜻으로 가나안 땅이며 헤브론의 다른 이름입니다. 즉, 사라는 바로 가나안에서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사라를 위하여 애통합니다. 자신과 동거 동락하여 온 아내를 사랑하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물론 운다고 사랑한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어 매장지를 구입하고 마음으로 아파하는 것을 볼 때 사랑이 있었습니다. 비록 인생은 나그네이지만, 사랑하며 살므로 좋은 끔을 맺는 나그네여야 합니다.

분명한 사람

아내가 죽자 아브라함은 아내를 장사지낼 묘지를 구입합니다. (4절)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그는 매우 큰 부자였지만 자신의 땅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내를 장사지낼 묘지도 없습니다. 에브론에게서 막벨라 굴을 사길 원합니다.

그러나 에브론은 팔기보다는 그냥 주길 원했습니다. (6절)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헷 족속이 살고 있는 땅에서 비록 나그네이지만 인정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영적, 물질적이 축복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방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방백으로 임명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성도는 모름지기 그 직분이 안 믿는 이들도 인정하는 게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한 사람이라 이를 거절합니다. 공짜로 쓰기 원하지 않습니다. 에브론에게 마땅한 준가를 치릅니다. ‘준가’란 ‘많은 은’이란 뜻입니다. 당시 은이 물물교환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충분한 가격을 억지로 지불하고 막벨라 굴을 자신의 소유로 삼습니다. 이때 이렇게 매입하지 않았다면 후에 이삭이나 야곱, 레아 등을 이곳에 장사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매사는 분명해야 합니다. 특히 신앙인은, 직분자는 이런 면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좋게 시작했다가 분명함이 없어 나쁘게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돈 거래는 분명히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 당당함이 아브라함을 이렇게 분명한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안에 당당하고 분명한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인생

오늘 말씀은 단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자 매장지를 구입하여 장사지냈다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속에 인생이 그대로 배어있습니다. 하나하나 짚으며 그 의미를 되새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죽음이라는 문제입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오늘은 사라의 죽음을 말하지만 내일은 아브라함의 죽음을 말할 것입니다. 죽음을 비껴갈 인생이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다만 어떻게 살았느냐가 문제입니다. 사라는 멋진 종지부를 찍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히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본향을 찾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본향인 천국을 항상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2. 부부관계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그 사랑 때문에 애통해 합니다. ‘남편이 죽으면 화장실에 앉아서 웃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진정한 부부관계가 아닙니다. 요새는 하루에도 이혼을 500쌍씩 한다고 합니다. 미국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부부관계가 사랑의 관계가 되도록 서로 힘써야 합니다. 어느 한쪽만의 일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힘써야 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사랑하는 애틋함이 없었다면 그리 정성스레 매장지를 준비하진 않았을 겁니다. 여러 면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사랑의 부부관계를 본받아야 합니다.

3. 분명한 거래입니다.

사람은 대신관계, 대인관계, 대물관계에 있어 분명해야 합니다. 어정쩡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됩니다. 대인관계와 대물관계가 바로 오늘 말씀의 요지입니다. 헷 족속 에브론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돈을 주고받지 않아도 좋은 관계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장차 올지도 모르는 혼란을 미연에 차단합니다. 돈 거래는 분명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20절)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 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 헷 족속도 이제는 그 소유권을 분명히 합니다. 대물관계가 확실해야 대인관계도, 대신관계도 좋아질 수 있습니다.

대신관계와 물질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시험을 허락한 유일한 내용이 십일조인데 그것이 바로 대물관계를 바로 하라는 말입니다. 웨슬리는 “주머니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까지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물질과 거래의 분명함을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그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나그네 인생으로 언젠가는 이 세상을 하직할 인생들이지만, 주님께서 멋있게 살았다고 인정하실 수 있는 삶을 사십시다. 천국을 소망하고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부부간에 사랑을 회복함은 물론 세상에 사랑의 메신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물질관이 분명함으로 복의 근원이 되십시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