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11;1-5. 행전13;13-23
우리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위치가 아파트촌에 가까운 마을 형태를 갖고있습니다. 아파트를 중심한 교회들의
성분을 조사를 한 결과 여러가지 일들이 결과로 나와 있습니다. 장점도 많다는 것입니다. 아파트는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주거형태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변동이 많기 때문에 교회는 늘 긴장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미래 지향적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반대로는 변화가 심하고 안정된 주거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의 정체성이 흐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교회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문제입니다. 정체성을 갖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동이 심하기 때문에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많은 시간이 흘려야한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들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분명히 이야기 한다면 "역사의식"이라고도 합니다. 그 말을 많이
사용한다는것은 우리들의 사회가 어떤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문화적인 입장에서의 역사의식은 제로
상태라고까지 악평을 합니다.
일본의 방금 만들어진 의복과 머리형태가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우리나라의 안방과 젊은이들의 옷과
머리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양을 보고 줏대가 없다고도 하고 정체성의 멸절이라고도 합니다. 역사의식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자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IMF로 많은 고생을
한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중의 사람들을 분석을 하여보면 자신의 실패를 바라보는데 숙명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실패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팔자소관으로 돌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왜 실패를 하였는지를 돌아보지 않고 또 노력을 하여서 회복하려는
의지가 약합니다. 그래서 일어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성적 세계관을 갖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실수가 자기의
판단 잘못으로 실수하였다는 사실을 인정을 하고 다음부터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자기의 이성을 총동원을 하여서 분석하고 노력을 하는 사람입니다.
숙명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역사관을 갖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실패한 이유는 하나님의 주관과 섭리임을 인정을 하고 하나님의 선한 뜻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려 합니다. 아마 우리들의 신앙적 성숙은 하나님의 역사관을 갖을 때 분명한 신앙적인 자리를
소유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바나바와 함께 첫 선교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안디옥 지방에 이르게 됩니다.
이 안다옥지방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였던 수리아 안다옥이 아니라 비시디아 안디옥 지방입니다. 유대인들이 모여 있더니 회당에
들어온 바울은 먼져 자기의 동족에게 전도하기로 결심을 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바울이 단순히 예수를 믿으라고
권면한 것이 아니라 자기 민족의 역사를 가지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하여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16절의 말씀을 보면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여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라고
말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17) 애굽에서 건져내셨으며(17) 약
40년간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서들의 행동을 참으시고(18)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방황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시고 왕을 구하기에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며 그 다음의 왕으로 이새의 아들 다윗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를 통하여서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이 모든 역사의 배후에는 누구가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들의
배후에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그들의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바울은 증거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을 붙잡고 역사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똑똑한 이들의 이야기는 단번에 말하기를 인간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사건들로 만들어져가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본주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장
많이 경고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인본주의 입니다. 인본주의 가장 위험한 요소는 인간들에게서 하나님을 없애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들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저 시날평지에 우뚝 서있는 바벨탑을 기억을 할 것입니다. 그 탑의 주체는 인간입니다. 인간이 모든것
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그 탑을 쌓을 때 한 소리가 있습니다. "우리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이름 앞에서 얼마나 위험한 발상입니까? 성경의 기자들은 이 바벨탑의 사건을 기록을 하면서 인본주의가 하나님을 어마나 욕되게 하시며 그 자체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바울은 롬11;36절에 기독교의 역사관을 대표하는 말씀을 하신적이 있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 이러라" 이 말은 참으로 얼마나 위대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원천이 누구인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낸 것은 하나님 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돌아가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원천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주로 말미암고"- 이말은 지금도 진행이 되고 있다는 진행형의
말씀입니다. 지금의 이 역사는 누구가 진행을 하고 있습니까? 과학자들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전과 공전에 의하여 지구는 돌아가고 있으며 자율의
법칙에 의하여 자연적인 동작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말미암고 ! 하나님에 의하여서 모든 것이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합니다. "주에게로 돌아감이러라"
언젠가는 모든 귀결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을 하여야 합니다. 언젠가는 돌아갑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돌아가게끔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알파와 오메가되시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말을 영어로는 history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합성어라고 말합니다. hi라는것은 하나님을 가르키는 단어이고 story라는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 즉 [하나님의 이야기가 역사]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이스라엘에 관여를 하셨는가를 보도록합니다. (17)절의
말씀을 다시 보시면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이스라엘의 주인은 분명히 하나님이심을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들은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셨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움직이시고 다스려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까? 아멘 하나님이십니다. 누구가 말하여도 내
힘으로 나의 어떤 영역도 결국은 내가 할 수 없음을 인정을 하셔야 합니다. 만약에 이 분분이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 지극히 비 신앙적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들의 조상들을 인도하여 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들을 지금도 움직이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십니까? 진정으로 그렇게 고백을 할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정과 일생과
삶을 전체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그분이십니까? 믿음의 대상이 되시고 그분을 섬길 수 있는 분이라고 선언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21절의 말씀을 봅니다. "그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이 어찌되어진 일입니까? 어떻게 하여서 그들이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섬기다가 어느 순간에 왕을 구하게 됩니까? 왕이 어떤 분이어야 합니까? 우리에게도 왕을 주십시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불레셋 사람들의 모양을 보면서 사람들의 계획과 노력의 산물인 불레셋 사람들의 물질을 보면서 한 순간에 그들의 시선과 관점이
바뀌이기 시작을 합니다. 우리들도 종종은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들의 방법이나 그들이 행하는 것들을 보고 그들이 이루어놓은 업적들을 보면서 그렇게
찬가를 부를때가 있습니다. 야 대단하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경계를 하여야하는 것입니다. 보여지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보여지지않는다면
이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은 보여지는 교육만을 고집합니다.
교육은 100년을 내다모아야 합니다.
보여지는것 때문에 하나님이 보여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만큼 위험한 일이 어디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여지지 않는 배후의 모든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현실적인 사건을 보기 시작을 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세운 왕을 폐하십니다. 그리고
22절의 말씀을 보시면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리라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가 만들어 가는 줄로 착각을 하고 그만 하나님 앞에 범죄를 합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마음에 합한 사람, 그리고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라는 말씀속에는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는 삶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입니다. 다윗처럼 인간적인 모습들이 드러나도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울을 보십시요.
21-22절의 말씀을 보신면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하나도 스스로 설 수 없도록 폐하시는 하나님 이신데 우리가 아무리
선더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세우지 않으시면 설수 없다는 사실ㅇㄹ 인정을 할수 있어야만 우리 역사를 만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없애시면 모든것이
허사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바울은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어떤 요청을 하고 있습니까? 23절의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이 약속 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고 선언을 합니다. 그는 선언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마침내 구세주 되시는
예수로 인하여 세워져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역사에서 왜 소망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이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하여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정체로 인하여 우리 주변의 상황도, 그리고 미래도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만 하면 모든 것들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통하여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변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변화 시키키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제도를 바꾸면 사회 환경은 더욱 나아져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육을 시키면 홍보를 철저히 하면 사회적인 구조악이 바꾸어지고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그리고 경험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인간개조는 제도와 홍보와 노력으로 개조
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심성이 바꾸어지지 않는 한 사람들의 영혼의 심령들이 바꾸어지지 않는 한 집단이나 역사의 변화는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기자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 길로 갔거늘"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인간성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바른길을 갖는다해도 여전히 인간적인 모습은 바꾸어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여전히 인간적인
모양들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그 마지막 우리들의 소망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희망이 되고 구원이 되는 이유를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38- 39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힙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변화되는 사회를 상상 하십시요. 가정을 헤아려 보십시요.
교회를 생각하여 보십시요. 한 개인을 보십시요. 그리스도 참혹한 역사의
소망이 되심을 인정을 하십시다. 바울이 선언하였던 선언을 우리도 함께 갖기를 소원하며 이 변함없는 신앙의 고백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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