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 혼 실 제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얼마 전 어느 가족분들과 함께 공원묘지에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신 후 주님을 섬기시다가 주님의 때가 되어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품에 안기신 어느 집사님의
육신이 묻히신 곳이었습니다. 제가 출국 중 소천하셔서 저는 그분의 임종도 그분의 장례 예배도 드리지 못해 그분의 가족분들과 함께 그분의 장지를
찾은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서로 위로하며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예배 후 묘지가 있는 곳에서 내려오는 도중 그 가족 중 한 분이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사람의 영혼이 있는 것인가요?" 저는 "예 그러믄요 영혼은 있지요. 예, 영혼은 있습니다"라고 답하고는
사람의 영혼이 있음에 대해서 몇 말씀을 그분에게 더 드렸습니다. 영혼의 실제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있다라기보다는 매우 많은 것
같습니다. "영혼이 있기는 무엇이 있어. 다 그냥 하는 소리지. 누가 영혼이 있는지 영혼을 봤어?" 영혼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분들은 영혼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영혼이 어떤 형체가 있는 물건처럼 눈에 보인다면 영혼이 있음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형체도 없고,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고, 소리도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엑스레이
사진기로 찍어 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복잡하게 영혼이 있다. 없다 깊이 생각하지 말고 영혼을 부정해 버리는 편이 덜 복잡하고
속이 편하고 머리도 상쾌할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누가 영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 복잡하게 영혼의 실재를 부정해 버린다면 결과적으로
그는 씻을 수 없는 큰 영적 과오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인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야 합니다.
복잡해도 생각할 문제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모습이요. 인격적인 모습입니다.
영혼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단순히 영혼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도 많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보다 더 중요하고
무시 못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사랑이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다. 믿음이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신의가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정의가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있는 것으로써 인간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것들입니다 영혼도 이런 것입니다. 영혼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정교한 현미경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것들이 분명히 있음에도 많은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지내
왔습니다. 분자, 원자, 무수한 세균들, 세포, DNA와 그 구조 등입니다. 현미경이 있음에도, 현미경으로 이런 것들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이런 것들이 없다라고 강력하게 부정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후에 얼마나 큰 부끄러움으 당하게 될까요?
광활한 우주를 살펴보는 천체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신비스런 우주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천체 망원경으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을 때에도 그것은
있었습니다. 인간 육신의 눈은 그렇게 정교하고 전능한 존재는 아닙니다. 안개만 조금 껴도, 종이 한 장만 가려도, 물체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안경에 습기만 차도, 해가 지기만 해도 우리는 보고자 하는 대상이 있음에도 보지 못하고 맙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도
벌써부터 전에는 좋았던 눈이 점점 그 기능이 상실되어 이제는 좀 떨어진 곳의 글자가 비교적 큰 글씨인데도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눈이요, 눈의 기능이요, 보는 기능입니다. 이같이 약하기 짝이 없는 육신의 눈에 절대절명의 가치와 의미를 두고 영혼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내가 볼 수 없다고, 영혼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분명히 이치적으로도 잘못된 것입니다. 사실 영혼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생각의 활동이 아니라 영적인 활동입니다. 곧 악령의 세력이 사람으로 하여금 영혼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하거나, 심지어 영혼의 실재를
부정하게까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영혼에 관심을 가지거나 영혼의 실재를 믿으면 그는 영혼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우리 주님
영혼의 구원자를 믿게 될 확률이 많아지기 때문에 사단은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하여 '영혼이 없다' 라고 단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같은 사단의 영적 흉계와 수작이 활동하는지는 모르고 생각도 없이 속 편하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혼이 있기는 무엇이 있느냐 하며
영혼의 실재를 부정하고, 오직 눈에 보이는 육신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육신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여러 면에서
설득력이 있고 또 타인이 보기에도 부지런한 사람, 똑똑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존재합니다. 거짓
없으신 진리의 말씀이 이를 증거 하셨습니다. 영혼이 실재함의 효과적인 설명을 위해서 저는 사람의 구조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사람은 보이는 요소와 보이지 않는 요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보이는 요소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몸(body,soma)입니다. 보이지
않는 요소는 혼(soul,psuche)과 영(spirit,pneuma)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몸은 살아있는 유기체로써의 몸입니다. 뼈, 살, 피로 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입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있습니다. 부피가 있어 공간을 차지합니다. 몸은 모양, 색깔, 공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라고 되어 있는데 , 몸은 바로 이 흙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곧 몸의 재료는 흙인 것입니다. 흙은 96 가지의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데 사람의 몸, 쏘마(soma)역시 96 가지의 성분이 동일하게 들어 있다 합니다.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신비스런 증거입니다. 몸은 흙으로 만들어져서 이 세상 흙 위에 거처하면서 흙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먹고 살게 됩니다. 몸이 흙이기 때문에
몸은 몸을 위하여 흙을 요구합니다. 모든 음식의 재료가 실상은 모두 흙에서 나온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몸이 요구하는 모든
음식의 재료가 흙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있는 가요? 없습니다. 아무리 최고급 요리라 할지라도 그 재료는 모두 흙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기,
야채, 곡물, 과일..... 이 모든 것이 흙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뿐인가요? 입고 거주하는 장소의 재료도 모두 흙에서 나온 것입니다.
몸은 흙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고, 흙만 있으면 삽니다. 그러나 흙에서 나온 것이 없으면 몸은 죽습니다. 몸은 이 세상에서 흙에서 나온 것을
먹고, 입고, 쓰고, 살다가 때가 되면 죽으니, 죽으면 몸은 흙으로 사정없이 돌아갑니다. 사람의 몸을 흙으로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사람에게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몸(body,soma)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 가운데 하나인 "혼(soul,psuche)"이 있습니다. 혼은 헬라어로 "프수케(psuche)"라고 합니다. 프수케란 직역하면
"숨", "생명체의 호흡"입니다. 프수케는 몸 곧 쏘마(soma)의 생명이며 사람의 비물질적, 비가시적 구성 요소의 일부입니다. 프수케는 인성의
자리로써, 지, 정, 의의 인성의 세 요소가 살아있는 요소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혼과 영은
두개의 단어이지만 같은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공통적인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 특성이나 어느 때는 서로
보완하여 혼과 영이 함께 혼합 기능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때는 혼과 영이 예리하게 분리되어 활동하기도 합니다. 이미 소개해드린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은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라고 구별하여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몸)"도
역시 구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인간은 몸이 배부르고 따뜻하다고만 해서 만족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혼의 기능이 다른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몸이 필요한 것만 공급해 주고 살도록 했습니다. 먹고 배부를 음식과 음료, 적당한 기온을 맞추어주고 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책, 여행, 운동, 연구, 공부, 예술, 음악은 공급해 주지 않았습니다. 과연 이 사람이 살 수 있겠습니까? 결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몸은 배부릅니다. 몸은 따뜻합니다. 몸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에게 혼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혼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정원을 요구합니다.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고 몸이 배 부릅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정원을 꾸미고 가꿉니다. 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혼이 있기 때문에 꽃을 가꾸고, 화사한 커튼을 걸고, 아름다운 가구를 비치하고, 화려한
거실 등을 만듭니다. 혼의 충족을 위해서입니다. 왜 사람들은 여행을 합니까? 저도 여행을 해 보았지만 사실은 집에 있는 것이 몸은 제일
편합니다.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편한 집을 떠나 여행을 합니다. 혼의 만족을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평생을
예술에 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다거나, 조각을 한다거나, 음악을 한다거나 하는 것입니다. 예술하면 배가 불러집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합니다. 그것은 혼이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람과 의미를 추구합니다. 도덕적인 삶을 갈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하면
배가 부르기 때문입니까? 몸이 따스해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몸은 더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혼의 만족을 위해서입니다. 먹어도 배고프고 허전하고 입어도 춥고 떨리는 것은 마셔도 갈증을 느끼고 고독을 느끼는 것은 혼이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랑과 미움, 신의와 배신, 정의와 거짓..... 이런 무수한 사건들은 모두 몸이 아닌 정신 곧 혼의 영역 속에서
나타나는 혼적 활동들입니다. 다음 인간을 구성하는 마지막 한 요소는 "영"(Spirit,pneuma)입니다. 영 곧 "프뉴마"는 일언하면
"하나님"(신적존재)을 만나는 부분입니다. 사람이 그들의 프뉴마 속에 성경의 하나님을 모시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며, 사람이 그들의
프뉴마 속에 하나님이 아닌 신적존재를 두면 그는 우상숭배자, 이교도가 되는 것입니다. 영은 혼보다 차원이 높은 인간의 비가시적 실체입니다.
혼이 정신세계라면, 영은 하나님의 세계요, 믿음과 예배, 신앙의 세계입니다. 본문의 말씀 창세기 2장 7절 하반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말씀에 의하면 사람이 생령 곧 살아있는 영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영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말씀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프뉴마는 비가시적 실체입니다. 혼과 같이 하나님께서 친히 몸 곧
쏘마 속에 불어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어 "프뉴마"는 "바람" "바람을 불어 넣다" "숨쉬다"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드신
사람의 몸 속에 영을 넣어 주셨기 때문에 영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내재하게 되었습니다. 영은 존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있습니다.
활동합니다. 몸은 영원하지 못하나 영은 영원합니다. 몸은 없어지나 영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불에 타지도 않습니다. 썩지도 않습니다. 흙에
묻으려해도 묻히지도 않고 묻을 수도 없습니다. 때문에 영이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영이 강한 사람은 강한 사람이며 영이
온전한 사람은 온전한 사람입니다.
영이 실재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혼이 극도로 발달한 사람. 곧 정상의 예술가, 정상의
정치인, 정상의 학자, 정상의 문인이 최고의 위치를 과시하여 혼을 만족하였음에도 왜 불안하고 고독해 합니까? 왜 노벨상을 수상한 영예로운 사람이
자살을 합니까? 혼은 만족했으나 영이 만족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불신자들이 세상 떠난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제사 행위를 하고 있습니까? 왜 각
족속, 각 시대에 종교 형태의 의식과 행위들이 있습니까? 인간에게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왜 뜻을 가지고 하늘을 쳐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까? 인간은 왜 영원을 생각하고 영원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인간 속에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이 말씀은 인간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6장에서
영혼의 실재의 결정적인 말씀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말하고 있는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의하면, 분명히 이 세상에 살던 나사로도 죽었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곧 눈에 보이는 몸(쏘마)이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가족과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살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음부(지옥)에 한 사람은
아브라함의 품(천국)에 살아 있었습니다. 음부(지옥)에 있던 부자는 아브라함도 알아보았고, 그 품에 있는 나사로도 알아보았습니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눅16:22)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몸은 죽어 썩어
없어졌는데 그들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 두 사람만 살아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까지 살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래 전 구약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물론 이 땅에 죽어 헷족속 소알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그의 아들 이스마엘에 의해서 장사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살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무엇이 살아 있었던 것입니까? 몸(soma)입니까? 영혼입니까? 인간과 짐승의 상이점은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상이점은 영혼이 있고 없음입니다. 짐승도 육신이 있고, 인간도 육신이 있습니다 어떤 짐승은 그 육신이 인간보다 더 우월하기도
합니다. 더 강하고, 더 빨리 달리고, 더 멀리보고, 더 오래 살기도 하고, 더 추위와 더위에 견디어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짐승에게는 영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책도 없고, 예술도 없고, 양심이 없으며 도덕적인 삶의 추구도 없고, 아름다운 정원이나 저택도 없고, 도서관도 문화
공간도 없고, 부모 공경도 없고, 종교도 없으며 영원에 대한 갈망도 없습니다. 오직 먹고만 삽니다. 오직 먹을 것에 만 관심이 있습니다. 오직
몸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겐 영혼이 있습니다. "쏘마"는 순간이지만 "프수케"와 "프뉴마"는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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