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1∼31)
지난주에
몇십 년만의 폭설이 내려 환상적인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이렇듯 평소에 보지 못한 모습을 보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 한 과정, 한 과정을 완성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창세기 1장에 여섯 번이 나오는데 그
중에 다섯 번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고 나머지 한 번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습니다.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이 어떤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성별된 자,
완전한 자, 할례를 받은 자들을 가리켜서 성도라 합니다. 성도라면 완전한 자까지는 못되더라도 그 속에 믿음의 씨앗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시인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창세기 1장에서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실제화 되어지는 과정을 보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둥근 것을
요구하셨는데 네모난 것이 나왔더라면 결코 좋았더라고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지어졌고 그 지어진 것이 아름다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기록이 성경을 여는 첫장, 창세기 맨 첫 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제일 먼저 말씀대로 빛이 이루어진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어둠과 혼돈 공허가 아니고 그 속에 나타난 빛이 첫 번째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음성은 '빛이
있으라' 하신 것이었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첫 음성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신 것이었습니다. 빛 이전의 공허와
혼돈, 어둠을 빛이 물리친 것처럼 죄로 인해 혼탁하고 무질서해진 이 땅에서 회개하는 이들은 천국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자신을
'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 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의 빛과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빛은 엄밀한 의미에서 동일한 빛입니다. 지금 이 땅에 주님이
오신다 해도 우리를 향하여 '회개하라'고 외치실 것입니다. 오늘 교회마다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도 바로 '빛으로 돌아 오라' 하는 것입니다.
무질서와 무절제, 혼돈과 혼탁속에서 살던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와야 이 세상에 소망이 있습니다.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이듯,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듯 그렇게 돌이켜야만 세상에 소망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그 자리, 미성숙과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돌아와야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를 만난 동방박사들도 별빛의 인도가 있었기에 이런 엄청난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고향을 무작정 떠났지만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이 있었다 했습니다. 아무리 혼돈스럽고 어두워도, 구름이 별빛과 햇빛을 가리워도 별빛과
햇빛은 존재합니다. 우리들에게는 나침반이 있어서 흑암속에서도 사방을 분간할 수 있듯이 주님의 빛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빛이
세상에 있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란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아침부터
저녁까지로 봅니다. 그런데 히브리적 사고방식은 저녁에서 아침까지를 하루로 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밤이 곧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섭리를 베푸시는 시간이 밤입니다. 밤은 흔히 어둠과 고통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고통과
어둠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밤이 아무리 깊어도 새벽은 오게 되어있습니다. 터널이 아무리 길어도 그 끝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때로는 터널을 통과하듯이 캄캄하고 어두운 날도 존재합니다. 밤의 시간은 우리가 망하고 죽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약하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입니다. 만약 우리 삶에 밤이 없다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겠습니까. 밤이 있기에 밝은 낮을 마음껏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밤이 없었다면 우리는 낮에도 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어떤 인생에도 밤은 있지만 그 밤을 잘 통과하는 사람에게 밝음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오늘의 한숨과 눈물이 내일의 기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이 한 해를
보내야 할 줄로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이 좋았던 여러 가지 가운데 사람을 생각해 보면 사람에겐 만들어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다른 모든 만물에게 주지 않은 하나를 주셨습니다. 인간을 만드신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상에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창1:26)었는데 여기서 '우리'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일컫는 개념입니다. 우리 한 생명 한 생명이 그저 생겨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결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 자신을 이 세상에 함부로 뒹굴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께서 의논하시고 계획하시고
섭리하셔서 우리를 만드셨는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집을 짓는 것도, 그림을 한 장 그리는 데도 설계와 계획이 필요한데 하물며 천지만물
가운데 가장 귀한 존재인 인간이 아무렇게나 만들어 질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안될 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닮음'이란 말이므로 무엇이
하나님을 닮았는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먼저 영성이 닮았습니다. 우리 사람은 동물이 갖지 못한 영성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죽은 영을 살리고
영성을 계발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영성이 살아날 때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영성을 가지고 교제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영성이 우리에게 있을 때 감사가 되고 예배가 가능해 집니다. 만약 우리에게 영성이 없으면 단순히 진화된 존재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속에 영이 있기에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긍휼한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변의
상황을 가슴 아파하고 사랑하는 그 마음이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은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향력입니다. 햇빛이
따스하기에 우리는 무거운 외투를 벗습니다. 저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요셉의 영향력을 생각합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온 가족이 살고 흉년에도
온 국민까지 모두 살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한 사람이 먹고 마시는 일에 죄 짓지 않고 오직 여호와를 섬김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포로의 자리에
놓여나서 성전과 성벽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믿음의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의 역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우리 속의
영성과 긍휼한 마음, 영향력 등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면 지음 받은 자로서 영성이 있어야 하며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통해서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듣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으신 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셨는데 '생육하고 번성하며 다스리라' 하시고 사람에게는 먹고 살 음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은 먹고 먹지 않을 것은 먹지 않을 수 있는 결단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알아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하고, 먹지 않을 것을 먹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했습니다. '심히', '몹시'란 말은 만드신 그 분의 입장에서 상당히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으려면 개체로만 안됩니다.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루어 더불어 살 때 심히 좋은 상태가 됩니다. 2001년 이 새해에
더불어 함께 하여서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삶을 사시며 또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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