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존심 (빌립보서 4:4-9)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는 늘 사소한 갈등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갈등의 배후에는 언제나 자존심이
개입합니다. 서로의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 때, 사람들은 분노하고 갈등관계에 빠지곤 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사소한 말다툼 끝에 서로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함으로 큰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자존심을 잘 세워주어야 합니다. 국어 사전에서는
'자존심'을 "제 몸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마음가짐" 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탁월한 문학가인 이은상 씨는 "자존심이란
결코 배타가 아니다. 다만 자기 확립이다. 자기 강조다, 자존심이 없는 곳에 비로소 얄미운 아첨이 있다. 더러운 굴복이 있다. 넋빠진 우상숭배가
있다. 위대한 개인, 위대한 민족이 다른 것이 아니다. 오직 자존심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 말 대로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향해 아첨하거나 비굴하지 않기 위해 자존심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서는 왕자처럼 처신하면서 교회
밖,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심은 쓰레기통에 구겨 넣은 채, 걸인처럼 행세하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영적인 자존심을 버리고 세상을 향해 비굴하게 살아가는 나약한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이러한 자존심은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입니까?
1.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기쁨을 상실한 시대입니다. 진정한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 기쁨을 대신할 그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그것이 바로 재미입니다. 기쁨을 대신하여 재미의 문화, 쾌락의 문화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차를 타고 중흥리를 왔다갔다하신 분들은 이상한 플랙카드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회관, ○○나이트
클럽, 아가씨 20명 전원교체, 아가씨 10명 항시 대기, 도대체 이런 문구들이 왜 걸려 있습니까? 세상이 자꾸만 이 재미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메스컴을 뒤흔들었던 B양 비디오 사건,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남들에게 전달해서 보여주고, 세상이 온통 쾌락을 위해, 재미를
위해 사는 것 같습니다. 기쁨의 반대말은 바로 재미입니다. 같은 말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재미는 기쁨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세대가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만든 것이 재미입니다. 엊그제는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젊은 남녀가 동반 자살을 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자살할 용기가 없는 사람을 대신 죽여주고 돈을 받은 촉탁 살인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삶의 기쁨을 잃어버린 시대를 대변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기쁨을 잃어버린 시대에 우리에게 참된 기쁨의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는 하늘의 기쁨을 체험한 노 사도가 로마의 옥중에서 그가 개척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입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온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바울이 갇혀 있던 지하 감옥 위에 바울을 기념하는 교회가 세워져 있는데, 그 내부는 아직까지도 음습하고 춥다고
합니다. 발에는 착고를, 손에 수갑을 차고 그 추위와 외로움에 얼마나 마음 절이는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는 또한 그 많은 고통 중에서 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몇 년의 형을 언도 받을지, 또는 사형을 당하지는 않을지, 어느 것 하나도 기쁨이 될 만한 일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쓴 빌립보서에는 "기뻐하라"는 말로 가득 차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내가 기뻐하니 당신들도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옥 안에 갇혀서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이 감옥 밖의 자유로운 사람들을 향해서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비밀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4절입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따라서 합시다. "주안에서"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서 그는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기쁨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 안에서 죄 사함의 은혜,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경험이 있었습니다. 죽어야 할 자신
안의 죄와 이기심과 악독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처형당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사는 축복을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와 함께 사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공급자가 되시고, 그가 안내자가 되시고, 그가 구원자가 되시니 무슨 걱정입니까? [주안에 있는
나에게 455장] 사도행전의 교회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고 매를 맞으면서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전하지도 말라는
위협을 받았을 때,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고통가운데서도 그들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아멘, 정말로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주는 재미와
쾌락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참 기쁨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재미와 하나님이 주신 기쁨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적인 재미 즉, 술 먹는 재미, 도박하는 재미, 음란을 즐기는 재미 따위에 포로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사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존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인 재미에 하나님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어려운 일이 닥치면 앞이 캄캄해진다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려운
문제에 부딪쳤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실제적으로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요나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에 타락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앗수르 민족을 극히 싫어했던지라 니느웨 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다시스로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큰 풍랑을 일게 하셔서 요나가 탄 배를 뒤흔드셨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문제의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함으로 배를 구하게 됩니다. 풍랑 가운데 깊은
바다로 던져진 요나, 그런데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그를 삼키도록 하셨습니다. 정말 앞이 캄캄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그때, 요나가
무엇을 한 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런 찬송이 생각납니다.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 했나요 오늘 받을
은총 위해 기도 했나요.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니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마세요" 할렐루야!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요나의 기도를 매우 기분 나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 고난 중에 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는가?라고 덜 성숙한 나의 신앙 인격으로 요나를 욕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의 이 짧은 생각을 회개하였습니다. 앞이 캄캄할 때, 바로 이 때가 기도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희망적인 사람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귀신들린 사람을 이용하여 돈벌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 일행이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돈벌이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이 주인이 바울 일행을 고소하여 빌립보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여러분, 웃을 상황입니까? 울
상황입니까? 귀신을 쫓아냈으니 축하 받을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좋은 일 하고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우리들의 입술에는 불평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하나님, 돌아가셨습니까? 계시기는 한 것입니까? 보고는 계십니까?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의 감옥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자존심입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그는 자존심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중에 믿음을 잃습니다.
기도를 멈춥니다. 감사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그때, 감사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적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사방이 막혀
있어도 하늘로 열린 문이 보인다면 그는 절대로 실패자가 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늘로 연결된 사닥다리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하늘로 들려 질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야곱과 같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은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악해도 삶의 원칙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때, 그 시대는 소망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라는 나라가 법이 없어서 망했겠습니까? 원칙이 없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법도, 원칙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과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계속해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란하게 되면서 그 거대한 천년 제국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안에서 참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 외에는 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영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다 하되 그것이 정말로 유익한 것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분별없이 행한다면 거기서 실수가 오고, 갈등이 오게 됩니다.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최선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유익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며, 그 유익함 중에서도 최선의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원칙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8절과 9절을 읽겠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면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 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 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무엇에든지 참되며 -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뢰할 만한 언어와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 이것은
존경할 만한가 하는 뜻입니다. 덕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가 보아도 언제 어느 때든지 덕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에든지 옳으며 - 정의롭다는 뜻입니다. 언제 보아도 정의로워야 합니다.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 이 말씀은 순결하며, 흠이 없으며 라는 뜻입니다. 어느 구석을 보아도 흠이 없는
삶,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 이 말은 매력적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저 흠모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 좋은 평판을 듣는 인격을 말합니다. 사람의 평판은 한 두 번
잘 했다고 생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하게 일어나는 반복되는 사건을 보면서 저절로 그에 대한 인격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이렇게 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들보다 더 성숙한 모습으로 그들이 삶의 원칙으로 여겼던 것을 따라 바르게 살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가장 높은 차원의 삶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정직하고 진실하고 정의롭게 살려는 마음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치는 자기 이기주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삶의 수준에 따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우리의 이기심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정과 욕심은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의 정신과 삶을 따르는 새 인생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거룩한 가치를 품고 살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얼마든지 하늘로부터 공급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강점을 가지고 철저하게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원칙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한없이 착하고 진실했지만 결코 악에게 점령당하지 않았습니다.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또
책임전가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원칙을 따라 사는 사람치고는 너무나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고스란히 악한 사람들의 손에 놀아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원칙과 방법을 따라 사는 그의 영적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있습니다. 능력의 하나님, 기적과 이사를 행하면서 사람들이 이목을 받고 인기 최정상에 있을 때,
주님은 겸손히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사악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분노의 채찍을 드심으로 세상을 곧 심판하실 것 같더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힘없이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조롱했지만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시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지극히 높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원칙을 따라 바르게 살면, 반드시
그의 삶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도덕적, 윤리적, 영적이 기준이 없고, 가치관이 상실된 시대이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따라
바르게살기를 노력하는 사람들을 세상은 지켜보며 조용한 박수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사소하고 작은 감정
싸움에 자존심을 다쳤느니, 상처를 받았느니 하면서 속상해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제는 좀더 높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기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원리와 원칙을 따라 바르게 살아감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적 자존심을 한껏 세우고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