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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자의 정체성(에베소서 2:1-10) 우리는 지금 전도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에 나오라고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특별한 관심이 없습니다. 흥미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믿고 싶고 교회 나오고 싶은 마음이 들만큼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구원받은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받은 감격과 기쁨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산다’라고 하는 분명하고 명확하게 ‘구원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으면 아멘 합시다. 그러면 구원받은 감격과 기쁨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구원받은 자로서의 그 감격과 기쁨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세상 사람들에게 당당하고 담대하게 예수 믿으라고 교회 다니라고 그래서 구원받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구원받은 자의 참 모습이 어떤 것인지, 왜 구원받은 자의 삶이 그렇게 귀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말씀드림으로 은혜를 받아 전도하는 일에 힘이 되기를 원합니다. 1. 우선 구원받은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사” 라는 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때, 우리도 함께 다시 살게 되었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다시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부활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부활이라고 하면 우리가 죽을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만 생각했는데, 바울은 이미 완성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살리실 것이고, 앞으로 일으키실 것이라고 하지 않고 이미 이루어진 일로 단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의 능력이 믿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킨 바로 그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올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한 수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 우리는 이른봄에 그 씨앗을 심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풍성한 수확을 하게 된 것은 그 씨앗 속에 생명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고고학의 발전과 함께 수 천년이 지나 발견되는 씨앗이 발아에 성공한 것을 보도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수 천년이 지나 죽은 것 같아도 그 속에 생명이 있으면 다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씨앗을 뿌려도 그 속에 생명이 없는 것은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종자를 선별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의 씨가 들어 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만드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의 믿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절망가운데서도 창조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온 세계에 믿음의 예표로 인정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속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영원히 승리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절망도 낙심도 실패도 끝이 아닙니다. 죽음도 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킨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킨 그 생명을 소유하고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거듭났다고 말하고 영생을 소유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와 능력을 가졌고,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산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사는 생명을 잃어버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잃더라도 하나님의 생명, 영생을 소유했다면 거지 나사로와 같은 인생을 살더라도 후회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끝이 중요합니다.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영생을 얻었느냐, 얻지 못했느냐에 따라 인생을 잘 살았는가, 잘못 살았는가하는 인생의 질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한 번 태어난 목숨은 언제고 예외 없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끝이 좋으려면 그 후에 이어질 영생의 문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끝나는 날, 영원히 누릴 영광으로 우리의 삶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끝을 좌우하는 권세를 가진 분을 우리 안에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바로 영생을 보장받은 사람입니다. 인생의 성패는 이 땅에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영원히 살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이란 마지막에 영원한 생명을 붙잡은 사람인가? 아니면 영원한 죽음을 붙잡은 사람인가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누릴 영광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렇게 될 것을 믿습니까? 이것이 구원받은 자들의 정체성입니다.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구원받는 사람들은 죽음도 이기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영원한 것을 붙잡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화려한 세상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고 방황하거나,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문제로 인하여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당당하고 거룩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용기 있게 살아갑시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나도 저들처럼 되고 싶다고 하는 은혜를 받아 하나님께 하나 둘씩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2. 두 번째로 구원받은 삶이란 하나님 나라에 소속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그 소속과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이전 우리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과거 우리의 모습이 이러했습니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예수 믿기 전, 구원받지 못한 우리들은 세상에 살았습니다. 세상의 풍속을 따라 살았습니다. 마귀의 종노릇하면서 육체의 욕심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를 통해 용서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진노의 자식이 아니라 은혜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소속과 신분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이라고 하는 곳에 터전을 삼고 살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민권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고 붙잡혀서 쇠사슬에 결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순간에도 그 지역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천부장을 설득하여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어 담대하게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바울을 죽이려들자 천부장도 나름대로 바울에게 어떤 나쁜 죄가 있을 것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채찍질하여 심문하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바울이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 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자 천부장이 바울을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 그의 결박을 풀어주고 공회에서 법적인 보호와 절차에 따라서 변론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그 후에도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다는 이유로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을 권리를 찾아서 로마에 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몸은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권세가 있는 사람들도 함부로 그를 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 신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와 판단에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삽니다. 세상의 기준과 가치에 따라서 흔들리고 낙심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르는 예수님의 수준을 따르는 거룩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세상은 온통 죄악으로 타락하고 범죄하고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서 거룩하고 수준 높은 삶을 살아감으로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당신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이 버릇없는 아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보여 주길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수준을 따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모든 말씀들이 바로 그 수준입니다. 산상설교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곳에 보면 세상 사람들이 감히 따를 수 없는 놀라운 가치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두려움이 앞서지만 진정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정도의 가르침은 따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 거룩한 자존심도 생기는 대목입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연구하고 암기하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그들보다 더 의롭고 더 거룩한 사람들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들보다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에서 기독교가 국교로 결정되기까지의 이러한 배경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마의 물질 문명이 찬란하게 발달하게 되자, 황족과 귀족들의 타락이 극치에 달하였고 결혼 당시 순결한 여인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황족과 귀족들은 순결한 여인을 물색하다가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들의 딸을 자기네 가문의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며느리가 된 그 여인들은 결혼 후 아이를 가지게 되면 ‘비록 내 남편, 시부모, 친척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지만 내게 잉태된 아이만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받고 태어난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영적인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몇 세대가 지나면서 많은 황족과 귀족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나중에는 황제까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국교를 기독교로 선포한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가 바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과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 삶의 가치가 다르고, 그 삶의 목표가 다르고, 그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다르다는 사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예수님의 수준을 따라 살다보면 반드시 칭찬을 듣게 될 것이고, 결국에 나도 교회 가고 싶다는 말이 세상 사람들의 입으로 나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3. 끝으로 구원받은 삶이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이전 인간의 상태는 모두 악하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선함이 하나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몇 번씩 강조합니다. 인간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19:16-17에서 어떤 사람이 주님께 선한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네가 어찌하여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래 인간에게는 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떤 선한 행위로 자신의 공로를 세우려 하고 그것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 안에서 선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는 바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선한 일 한번 해보지 못하고 평생 세상과 사람들에게 폐만 끼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서는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매일 잔치하며 살면서도 대문간의 거지에게 관심 없이 살던 부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것은 예수 믿기 전의 삶으로 끝내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새롭게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제 선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모든 주어진 삶을 하나님께 하는 것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의 모습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삶의 모든 우선권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우선권을 두고 정성을 쏟으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학문에 생명을 걸고 노력하면 뛰어난 실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사업에 정성을 쏟으면 기업가로서 인정을 받고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명성을 얻게 된 학문 자체로도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이룬 사업의 성공과 부도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의미 있고 보람있는 것이 되려면 그 목적이 하나님의 선하신 일과 연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왜 행복해야 합니까? 그것은 이웃 사람들이 우리 가정을 통해 예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을 키워야 합니까?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 이 땅과 세상을 바르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왜 열심히 사업하고 돈을 법니까? 그것으로 복음 사업을 위해 기쁘게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 하나님의 소원을 이 땅에 심기 위해 우리는 모든 인생의 목적과 우선권을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어도 가능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세상적인 기준에서 성공이라고 하는 위치에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는다면 최고의 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해서 소비자들에게 공급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에 보면 모든 인간관계의 질서에서 그 자세를 주님께 하듯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말씀 중에 종들에게 하는 권면이 있습니다. 노예입니다. 자신에 대한 소유권마저도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살 수 있는 기회는 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23-25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노예는 그를 돈주고 산 주인을 섬깁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섬기는 것은 주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 가르침을 받은 노예들 중에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기 동료들을 예수 믿게 했습니다. 들 가운데 좀 지혜로운 사람은 주인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주인의 자녀들을 예수 믿게 했습니다. 이 자녀들을 통해 예수를 믿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많은 노예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주인을 섬기고 충성함으로 그 주인들도 감동을 한 것입니다. 자신의 분과 직업이 비천했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헌신할 때, 참으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일에 쓰임을 받은 위대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위대한 구원의 은총을 덧입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귀중히 여김과 존경과 칭찬을 받을 때, 세상은 저절로 구원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