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imr.co.kr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14)」

로마서 16:16-20, 25-27

16.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7.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18.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19.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20.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5.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26.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27.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신약성경 전체에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말씀이 모두 5번 나옵니다.1 영어로는 "Greet one another with a holy kiss.? 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 "거룩한 입맞춤"이 뭔가 궁금해서 알아 보았더니, 사전에 "평화와 우정의 표시로 동방 제국과 유대인들이 행한 풍습"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저스틴, 터툴리안,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등 교부들의 문헌에도 나오는 "거룩한 입맞춤" 은 주로 성만찬 전 예배 때에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동성(同性) 간에 행해졌다고 합니다. 지금도「The Pigg River Meeting House」라는 유대인 회당에서는 예배 전에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거룩한 입맞춤" 을 하고 그리고 남녀 간에는 악수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도 간에 형제의 사랑을 나누면서 서로 문안했습니다. 특히 교회에대한 박해가 극심했을 때 성도들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안부를 물었던 것입니다.

 로마서는 서기 56년 경 바울이 고린도에서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학자들 간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주로 56-57년 경에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때는 네로(Nero) 황제2 가 로마를 통치하고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64년 경에 로마에 큰 화재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기독교에 대한 대 박해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 때의 로마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편지를 읽으면서 얼마나 위로을 받았겠습니까?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너희가 핍박과 환난 중에 있지만 결코 외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너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에 지지(支持)를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유신체제3 밑에서 인권(人權)이 유린되고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갔을 때, 전 세계의 교회들이 고난 받는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지지했던 상황과 흡사하다고 할까요? 아니면 리차드 범브란트(Richard Wumbrand) 목사님이 루마니아의 지하 감방에서 14년 간 투쟁할 때에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그의 석방을 위해서 기도했던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로마서는 사실상 여기서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느닷없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교회를 염려하는 바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바울은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I face daily the pressure of my concern for all the churches.)"4 라고 자기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17절 이하의 말씀은, 지금 식으로 말한다면 편지를 다 써서 봉투를 붙이려고 하다가 못다한 얘기가 있어서 덧붙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로마교회의 특수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기 보다는 모든 교회에게 주는 일반적인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항상 사탄의 공격 목표입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를 분열 시켜서 교회의 힘을 분산(分散) 시키려고 합니다. 교회에 핍박이 오면 이상하게도 교회는 똘똘 뭉칩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이 들어오면 교회는 분산됩니다. 이단사상이 들어오면 교회는 병이들어 힘을 잃습니다. 교회는 항상 이단사상이 들어올 위험성이 있습니다. 사탄이 그 틈을 노리기 때문입니다.

 17절 말씀을 보세요. 이단사상이 교회에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분쟁(divisions)이 일어납니다. 교회가 분열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 이단 사상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뭐라고 합니까? 교인들의 믿음생활에 걸림돌(obstacles)을 놓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듣기 좋은 말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항상 이런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바울은 편지 봉투를 붙이려고 하다가 다시 이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믿음의 핵심은 순종(順從, obedience)입니다. 순종은 자기 뜻이나 자기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기 마음에 맞는 말씀을 찾아 다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 에 넘어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NIV 성경에 보니까 "smooth and flattering talk " 라고 했네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 말, 듣기 좋은 말을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고 했습니다. 순종을 강조하는 완곡(婉曲)한 표현입니다.

 이제 바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이 말은 내가 전하는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다른 것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냐?" 하는 간단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으면 그 설교는 복음적인 설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유명한 신학자요, 목회자인 미국의 볼드윈(Baldwin)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20대에 여러가지 철학과 종교를 공부했다. 그리고 이 철학과 종교에 비해서 기독교는 너무 단순하다고 행각했다. 나는 30대에 내가 추구하던 철학과 종교들이 내 인생의 문제에 대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에 복음은 나에게 심오한 것으로 다가왔다. 40대에 나는 삶의 모든 문제들과 싸우면서 복음을 의지했을 때 복음은 능력으로 내게 다가왔다. 50대에 들어와서 내가 지금까지 쌓아 놓은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을 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그 때 복음은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것이 되었다. 60대가 되어 내 친구들이 하나 둘 떠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붙잡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복음 밖에 없었다. 그 때에 복음은 나에게 유일(唯一)한 것이었다. 복음이 없이 나는 살지 못한다. 복음은 내 삶의 전부이다. 복음은 내 인생이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복음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볼드윈 목사님은 복음은 내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나에게는 그리스도(복음)가 생의 전부입니다.(For to me, to live is Christ.)"5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이 그만큼 중요합니까?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비밀경찰들에게 이렇게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여보시오. 나는 여기서 죽어도 괜찮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까. 하지만 당신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지 않소? 그 분을 믿으시오. 죄사함 받고 구원받으시오." 모진 고문에 실신을 하면서도 범브란트 목사는 계속해서 예수를 믿으라고 했답니다. 고문에 이기지 못하고 기절한 범브란트 목사에게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범브란트 목사가 하는 말이 "조금 전 내가 어디까지 당신에게 말했지요?" 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은 내 생명과 바꿀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이제 26절 말씀을 보십시오. 복음의 목적은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것" 입니다. 이 말씀을 쓰면서 바울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For the earth will be filled with the knowledge of the glory of the LORD, as the waters cover the sea.)"6 는 말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직역하면, 물이 바다를 덮은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울의 비전이었습니다.

 바울은 행동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비전이 이루어지기를 그냥 막연하게 기다리지만 않았습니다. 이 비전이 이루어지기를 노래만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가지고 갔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비전을 노래 부르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해 복음을 가지고 가는 사람은 많지 많습니다. 비전이 무엇인가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무슨 책인지 아십니까? 비전에 대한 책입니다. 비전에 대한 책을 읽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케 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은 적습니다.

 바울은 비전을 행동으로 옮기는 행동강령을 로마서 10장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7

 그의 논리(論理)는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비전을 가진 사람들은 복음을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단기 선교를 위해서 헌신 하는 여러분! 복음을 가지고 가는 여러분의 발은 참 아름답습니다. 불과 며칠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을 통해서 여러분의 입을 통하여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복음을 듣게 된다면, 여러분의 기쁨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아니, 그보다 하나님의 기쁨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바울이 선교지 방문을 생각할 때마다 늘 생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입니다."8 바울이 무슨 빚을 졌습니까? 복음의 빚을 진 것입니다. 나같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되었다는 구원의 감격과 함께 그는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한 거룩한 부담(obligation)을 안게 되었습니다. 이런 부담을 갖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성 프랜시스(St. Francis)에게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 나는 큰 죄인이지!" 썰렁한 대답에 머쓱해진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선생님 같으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 말에 프랜시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나야말로 큰 죄인이야.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 돌아보시고 죄인 하나를 택하셨지. 그게 나 프랜시스야. 하나님은 나에게 쏟아 부으신 그 사랑을 만약 나 프랜시스에게 쏟아 붓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에게 쏟아 부으셨더라면 그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지를 보여 주시려고 나 프랜시스를 택하신 것이야."

 오늘 헌신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이 있다면 이런 거룩한 부담의 마음이 아닐까요? 왜 하나님은 나에게 그토록 사랑을 쏟아 부으셨을까요? 이것이 우리에게 거룩한 부담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복음을 듣게 하셔서 저를 구원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언제부터인가 저에게 거룩한 부담이 생겼습니다. 이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하여 단기 선교사로 헌신합니다. 저를 하나님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어떤 분이 그래요. 왜 올해도 연변으로 가느냐고요. 다른 곳도 많지 않느냐고요. 그렇습니다. 복음을 듣지 않은 지역은 연변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탈북자들에 대한 부담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때 그들과 함께 느꼈던 가슴 뭉클함이 내내 떠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이나 나나 하나님 앞에 똑 같은 생명인데.....왜 이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하고, 나는 이토록 복에 겨운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저에게는 거룩한 부담이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데 그토록 진지하게 말씀을 듣던 그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총명하고 똑똑한 어린 아이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른들이 세례 받는 것을 보고 우리도 세례 받겠다고 몰려왔던 아이들, 장차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목사님이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대답했던 아이들의 대답이 제 마음에 거룩한 부담이 되어 다시 연변으로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9 하는 말씀으로 그의 편지를 끝맺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허약합니다. 허약하기가 질그릇과 같습니다. 질그릇은 잘 깨집니다. 우리는 질그릇처럼 약해서 쉽게 깨집니다. 쉽게 성처받고, 쉽게 아파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복음으로 견고하게 세워 주십니다. 복음만이 인류의 희망이요, 모든 민족의 희망이요, 복음만이 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우리의 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바울의 궁극적인 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도, 그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드린 것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영원히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어 드리면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은 밝히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케임브리지 교회의 비전 가운데 하나가 교회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교회의 영광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복음에 충성하는 교회가 되면 교회의 영광이 회복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복음 외에는 다른 것으로 흥분하지 않는 교회, 복음 외에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없는 교회,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단기 선교사로 헌신하는 16명의 헌신이 온 교회의 헌신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