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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4.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5.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6.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여러분, 오늘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 전에 쓴 편지입니다. 실제로 로마 교회 안에 그런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충분히 그런 문제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썼는지 모르지만 바울이 다루고 있는 것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비판하는 문제입니다. 이슈는 두가지로 보입니다. 하나는 음식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날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음식을 먹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 하는 문제와 무슨 일을 하는데 이 날이 좋으냐 저 날이 좋으냐 하는 문제입니다. 제 경험으로 보면 이런 문제는 대부분 믿음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비판함으써 생깁니다. 믿음이 강하다고 하기 보다는 믿음생활 오래 한 사람들, 교회생활 오래한 베테랑들이 교회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함으로써 생깁니다. 남을 비판하고, 남을 비난하는 문제는 비단 교회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는 아닙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는 쉽게 친해집니다. 그러나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적대감을 갖습니다. 이런 행동의 저변(底邊)에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당신은 왜 수염을 그렇게 기릅니까?" 그랬더니 그가 뜻밖에도“수염을 기르다니요? 나는 수염을 기르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저는 면도를 하지 않은 것 뿐입니다." 수염을 기르는 것과 면도를 하지 않는 것은 같은 말같지만 분명한 시각(視角)의 차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네 생각은 내 생각과 틀리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네 생각이 내 생각과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닙니다. 틀린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니까 바로 잡아야 하겠지만 다른 것은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내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통해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내 생각과 틀리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나에게 타도(打倒)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토론의 장이 욕설이 난무하는 다툼의 장이 되고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에서 예로 든 그 털보에게 "면도를 하지 않는다니? 말장난하지 마시오. 당신은 수염을 기른 것입니다.”라고 강요하려 든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 되겠습니까? 지금 바울이 제기하고 있는 음식 문제는 고린도교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시중에 나도는 고기는 주로 신전(神殿)에 바쳐졌던 것이었습니다. 이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하는 것이 교인들 사이에 이슈가 된 것입니다. 먹어도 된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나는 먹지 않고 채소만 먹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틀렸다고 비판합니다. 바울이 취하는 입장은 교회 안에서 그런 문제로 서로를 비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저러고서도 교회 장로라고 할 수 있나?" "아니, 저러고서도 교회 목사라고 할 수 있나?" "아니, 교회 나오는 사람이 저 옷입은 것 하고는?" 이렇게 서로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런 것은 생각의 차이도 될 수 있고, 세대 차이도 될 수가 있고, 이런 것은 가치관의 차이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문제는 각자가 판단해서 하면 되는 것이지 한가지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문제는 믿음의 본질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스운 얘기 하나 더 하겠습니다.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갈등이 심해서 한 집에 살면서 서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밤 아들이 잠이 오지 않아서 물이나 마실까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봤더니 아버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식탁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 자리에서 서로 화해를 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네가 어렸을 때는 여행도 함께 하고 운동도 같이 했었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제가 어렸을 때 집 근처 호수에서 하얀 보트를 탔던 생각이 나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아들아, 그 보트는 파란색이었단다." 그러니까 아들이 "아니예요. 그 보트는 분명히 하얀색이었어요." 이렇게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아버지와 아들은 다시 불화하게 되었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교회에서 열을 내서, 목소리를 높여서 한 판 싸움이라도 벌여야 할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의 본질에 대한 문제입니다. "정말 그렇게 되지 않으면 복음의 본질이 훼손을 당하고 만다." "정말 이런 문제를 그냥 넘어가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헛되고 만다." "정말 이런 문제가 있는데도 교회가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게 어디 교회냐?" 적어도 우리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그런데 막상 이런 문제가 나오면 침묵을 지킵니다. 그러다가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열을 올립니다. 미국에서 무려 7년 동안이나 베스트 셀러가 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28개 국어로 번역되어 70개 국에서 1,200만부가 팔렸습니다. 스티븐 코비(Stephen R. Covey)라는 사람이 쓴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입니다. 하바드에서 MBA를 하고 코비 리더쉽 센터의 창설자인 그는 「타임(TIME)」지(紙)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25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니까 이 책과 비슷한 제목의 책들이 계속 나왔습니다. 「성공하는 가족들의 7가지 습관」「성공하는 십대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들입니다. 그의 의하면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성공하는 사람들은 목표를 분명히 확립하고 행동으로 옮긴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장 성공했다고 생각되는 때에 갖고 싶은 이미지나 모습, 페러다임(paradigm)을 가지고 매사를 검토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이런 습관을 훈련하고 길러 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한 훈련의 예를 듭니다. 진행자가 참석자들에게 눈을 감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북쪽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가리켜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눈을 뜨게 한 다음에 나침반을 가져와서 정확하게 어디가 북쪽인지를 가르쳐 주고는 이제는 일사불란하게 북쪽을 가리키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지도자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합니다. 지도자는 먼저 정확한 나침반을 가지고 정확하게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곳을 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티븐 코비의 얘기가 우리 믿음생활에도 적용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정확한 나침반이 있어야 합니다. 중구남방으로 서로 자기 생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 해당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일사불란하게 한 쪽 방향을 가리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리켜야 할 방향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요, 성경이 제시하는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나침반 이야기 하나 더 하겠습니다. 50년 이상이나 바다 속에 수장(水葬)되어 있던 나침반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침반이 여전히 북극을 가리키고 있더랍니다. 참 감동적이지요? "목사님, 나침반은 원래 그런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하고는 수순이 안맞는 얘기입니다. 1863년에 만들어진 이 나침반은 미국의 포경선(捕鯨船)이 죄초되면서 물에 가라앉아 있었는데, 우연히 작살로 고기를 잡는 사람들에 의해서 무려 50년 만에 발견되었습니다. 비록 겉 유리는 모래에 심하게 긁히고 닳아 있었지만 바늘은 여전히 북극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항상 한 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그리고 오고 오는 세대에도 성경은 여전히 하나님을 가리키면서 우리가 살아야 할 방향을 제시할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적어도 이런 이슈를 가지고 흥분하고, 싸우고, 열을 내고,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 7-8절이 바로 그런 말씀 아닙니까?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정말 주님의 소유된 백성들로서 주님을 위한 일에 여러분의 목숨을 거십시오. 별 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되어도 상관 없고 저렇게 되어도 상관 없는 일에 여러분의 힘을 소모하지 마십시오. 복음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바에는 서로 용납하고 관용하는 태도를 가지십시오. 믿음의 색깔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릅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의 색깔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들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나하고 다른 색깔의 믿음을 가진 사람을 쉽게 나하고 틀린 사람으로 단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좋아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로마서 8장 28절의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저는 과거에 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성도의 삶에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나가려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 사랑은 어느 수준에 오른 사랑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 뼈저리게 깨닫고 체험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적어도 그런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내가 언제 어떻게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느냐?" 생각해 보니까 정말 그래요. 우리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깊이 깨닫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 기도도 잘 못하고, 성경도 많이 모르고, 교회 생활도 익숙하지 않지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요!"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왜요?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으니까! 하나님은 그 고백만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1 라고 하셨습니다. 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2 라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똑 같은 말을 합니다.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3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4 "업신여긴다" 는 말의 본래 뜻은 "제외 시킨다" 는 뜻입니다. 그 사람을 끼워주지 않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왕따를 시키는 것입니다. 지난 3월 5일에도 샌디에이고의 한 고등학교에서 찰스 윌리엄스(Charles Williams)라는 16살 난 그 학교 학생이 총을 난사해서 학생 2명이 숨지고 13명이 다쳤습니다. 이 학생이 갑자기 큰 탄창을 장전한 권총을 들고 화장실에서 뛰어나와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고 합니다. 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까? 이 학생은 체격이 작고 왜소해서 평소에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그를 멍청이로 취급하고 상대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윌리엄스는 친구들로부터 왕따 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서로를 비판하고, 제외시키는 일은 이렇게 한 공동체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망치고 남을 망치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서로 비난하기 보다는 서로 용납하십시오, 서로 받아 들이십시오. 주께서 나를 받아 주셨으니 나도 그 사람을 받아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서로 용납하고 서로 세워주고 서로 격려하십시오. 특히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서로를 비판함으로써 주님의 몸을 허물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 제자들에게 나를 위해서 깨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탁을 외면하고 모두 잠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야고보도 요한도 모두 잠을 잤습니다. 잠자느라고 눈이 충혈된 제자들을 보면서 얼마나 야속했을까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아니, 지금이 잠잘 때냐? 너희가 내 제자 맞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 얼마나 피곤들 하신가? 마음으로는 기도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것을 내가 다 이해하네." 이런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성경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5 는 말씀이 있는데, 에수님의 이 말씀이 제자들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는 말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얼굴이 뜨겁고 부끄러웠을까요? 예수님은 비난보다는 늘 관용의 마음으로, 사랑과 이해로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변화 시키는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미국 프로 농구(NBA)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Portland Trail Blazers)팀에 라시드 월러스(Rasheed Wallace)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이 선수는 농구에 타고난 재주가 있지만 거친 매너로 소문이 난 선수입니다. 한 시즌 38개의 테크니컬 파울을 받고 플레이 오프에서도 6개의 테크니컬 파울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다혈질인 성격을 다스리지 못해서 심판에게 욕설을 퍼붓고 수건을 집어 던지고 하는 바람에 자주 퇴장했습니다. 그 바람에 뛰어난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날도 월러스는 LA 레이커스와의 경기에서 판정에 불만을 품고 거칠게 항의하다 퇴장당했고 팀은 졌습니다. 레이커스와 2차 전을 앞두고 있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 메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펴보니까 자기 어머니로부터 온 짧은 편지였습니다.「라시드야, 제발 흥분하지 말고 침착해라. 이 엄마가 너를 지켜 보고 있단다. 부디 침착하게 게임에만 전념해 다오. 나는 너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사랑하는 엄마로부터」 이 어머니의 메세지가 월러스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날 레이커스와의 경기에서 월러스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플레이했습니다. 모두 46분을 뛰면서 29점을 올리고 리바운드 13개를 잡아냈습니다. 파울도 그날은 한 개 밖에 받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NBA 최고의 선수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그의 어머니의 따뜻한 격려 때문이었습니다. 서로 비판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몸을 허물지 마십시오. 서로 받아주고, 서로 세워주고, 서로 격려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