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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때가 어느 때인지 시기를 알라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너무 말씀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성경 어디를 펴 보아도 사랑에 대한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많이 들은 말씀에는 금방 식상합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학교 보내면서 말씀하십니다. "차 조심해라.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싸우지 말아라." 아침마다 아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같은 말씀을 되풀이 합니다. 그러면 아들은 뭐라고 합니까? "알았어. 알았대도." 하면서 벌로 듣습니다. 그러나 지금와서 어머니들이 입버릇처럼 히시던 그 말씀을 생각해 보세요. "차 조심해라." 무슨 말입니까? 질서를 지키라는 말입니다.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무슨 말입니까? 어디가서든지 예의 바르게 처신하라는 것입니다. "싸우지 말아라." 무슨 말입니까? 서로 서로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좀 긴 제목입니다만 Robert Fulghum이 쓴「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이라는책이 얼마 전까지 전국에서 베스트셀러였던 것을 아십니까? 우리 말로 하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것들을 나는 유치원에서 배웠습니다」라고 할까요? 유치원 때부터 기초를 강조하고 배운 사회는 질서가 있는 사회입니다. 서로를 존중할 줄 알고, 가진 것을 나눌 줄 압니다. 질서를 지키는 것이 사회를 버티는 근간(根幹)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이 기초를 배우지 않은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기본적인 질서를 무시합니다. 서로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예의를 지키지 않습니다. 무례합니다. 이런 말씀들이 우리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사람입니다......사랑은 율법의 완성(完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칼 바르트(Karl Barth)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흔히 그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자율성과 이성(理性)과 가능성(可能性)에 초점을 맞추었던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던 한 시대의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이라고 하는 방대한 양(量)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이 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어떻게 요약하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가능한 모든 신학의 주제들을 논의했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너무나 쉽고 평범한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바르트의 그 방대한 책을 다 읽지 않아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만 잘 이해하면 그 책을 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의 오늘 말씀이 그렇습니다. 보세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간음, 살인, 도둑질, 탐욕, 이런 얘기들을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지 않습니까? 신문에서, 뉴스에서.....그렇습니다. 매일 매일 신문의 정치, 사회, 경제 면을 채우는 기사들이 이런 기사들입니다. 누가 어떻게 해서 가정이 파산되었다, 누가 누구를 죽였다, 고교생이 총기를 휘둘러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누가 돈을 횡령했다, 이런 기사들이 날마다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중병을 앓고 있는 인류를 치료할 처방은 무엇입니까? 처방이 쉽게 나옵니까? 한국만 해도 보세요. 지금 의약 분업을 실시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4조원이라고 하는 천문학적인 결손을 내면서, 장관이 해고되고, 처음부터 다시 이 문제를 검토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달려 들어서 머리를 싸매고 연구를 하지만 의약 분업이라는 이 문제 하나 해결을 못합니다. 처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늘 문제를 쉽게 해결합니다. 쉽게 문제를 처방합니다. 의약 분업 뿐만 아니라 인류가 안고 있는 중병을 쉽게 처방합니다. 여러분 개인 개인의 문제도 성경으로 돌아가서 처방을 찾으십시오. 여러분, 성경의 처방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인류가 이렇게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사랑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보세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 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규칙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 사랑이 없는 규칙, 사랑이 없는 법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완벽한 제도를 만들어 놓아도 그 제도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사랑이 없으면 그 제도는 아무 쓸데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렀던 373장 찬송가 가사를 보십시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냉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 소리 뿐일세....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 받기 원하네.....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 요구하도다....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 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 질러 사랑 받기 원하네....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아십니까? 저의 얘기를 드린다면 며칠 사이에 몹시 피곤했습니다. 계속 교회 행사도 있고, 강사 뒷바라지 하는 것도 여간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오늘 설교 말씀까지 준비하려고 하니까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거기다 감기까지 걸려서 목은 팅팅 붓고 목소리는 잠겼습니다. 피곤한 몸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있는데, "땡" 하면서 이 메일(e-mail)이 하나 날라 왔습니다. "지금 이 메일 열어 볼 시간이 어디있어?" 하면서도 "얼른 열어보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열어 보았더니,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김 목사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저 NEC 졸업했던 00예요. 잘 지내시죠? 전 아직 Ro chester 에 계속 있어요. 아직 1 년 더 있을 것 같아요. 목사님, 예전 새벽 기도 다닐 때가 가장 많이 은혜 받은 때 였던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평안하시고, Boston 가면 인사 드릴께요. 사모님께도 안부 인사 드립니다. 00 올림" 어쩌면 하나님은 그 시간에 그 사랑의 편지, 감사의 펀지 하나로 저의 피곤함을 다 몰아가시고 말씀을 준비할 힘을 주셨습니다. 작은 일 같지만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은 병든 마음을 치료하고, 사랑은 상처 받은 마음을 낫게 합니다. 사랑은 낙심한 사람을 일으킵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주시는 묘약(妙藥)입니다. 성경에서 사랑에 대한 말씀 하나를 뽑으라면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뽑겠습니까?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입니까? 아니면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에 나오는 말씀입니까? 寧泳岵?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아니면 로마서 5:8 말씀인가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니면 요한일서 4:10-11 입니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말씀이든지 좋아요. 문제는 우리가 그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이 나를 위한 사랑으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인류를 위한 사랑이라고요? 좋아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라고요? 좋아요. 그렇지만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나를 그처럼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깨달아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1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强勸)한다."고 했습니다. 강권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속에서 나를 몰고간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내 마음을 강력하게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계명을 내가 너희에게 주는 새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계명이 전에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계명에도 사랑의 계명이 있습니다. 그러면 똑 같은 계명인데 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은 새
계명입니까? 여러분 속에 이런 예수님의 새계명이 있습니까? 그 계명이 여러분을 움직입니까? 그 사랑의 계명이 여러분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고 urge하고 compel합니까? 우리는 말씀을 공부하면서, 기도하면서, 봉사하면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나를 지배하도록,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움직이도록,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n)은 그의 명저(名著)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사랑의 능력에 대하여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능력에 개인 차가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려서부터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발달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사랑의 능력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유아기 때부터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고 배운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때가 어느 때인지 아십니까? 지금은 잠잘 때가 아닙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훨씬 가까왔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톨레 레게, 톨레 레게(Tolle lege, tolle lege)" 무슨 주문을 외우는 것 같지요? 우리 말로 번역하면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이런 뜻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부터 정확하게 1615년 전에 북 아프리카의 살고 있던 한 청년에게 들려왔던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여러가지 사상(思想)에 심취해 있었던, 사상적으로는 방황하던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훗날 유명한 「고백록(Cofession)」을 쓴 어거스틴이었습니다. 그의 고백록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나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하여 통회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갑자기 이웃 집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가 있었습니다. '톨레 레게! 톨레 레게!' 나는 알피리우스가 있는 곳으로 급히 갔습니다." 그는 알피리우스가 들고 있던 성경을 펴서 읽었습니다. 바로 그 말씀이 로마서 13:13-14 말씀이었고, 그의 생애는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거스틴 청년을 그런 식으로 부르셨습니다. "네가 왜 젊은 날을 그런 식으로 허송하느냐? 성경을 읽어라. 그 말씀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성경을 읽어라. 그 말씀이 네 길을 비출 것이다." 여러분, 지금은 어느 때입니까? 쉽게 예수 믿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성경을 읽을 때요, 말씀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생각할 때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헌실할 때입니다. 쉽게 명목상의 크리스찬(nominal Christians)으로 살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할 때입니다. 존 맥아더(John McArthur) 목사님이 쓴「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최근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아주 세련되고 스마트한 목사님이었는데, 그는 부임해 오자마자 교회 주변에 사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무엇을 바라는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무엇을 불편하게 생각하는지를 조사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조사 결과를 가지고 아주 파격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우선 권위적이고 높은 강대상을 치우고, 딱딱한 예배용 장의자를 치우고, 교회 건물을 뜯어 고쳤습니다. 그 목사님은 우선 예배는 편안하고 즐거워야 한다는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은 절대로 한시간을 넘지 않도록 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교인들을 지루하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고 그 목사님의 설교는 매우 짧고 간단했습니다. 그 목사님의 설교는 진부한 성경 말씀을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예화와 유우머로 가득했습니다. 교인들은 그 목사님의 설교를 좋아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이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면 아무 부담이 없이 편안하게 예배를 볼 수 있다고들 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불필요한 죄책감이나 회개에 대한 강요를 받는 일이 없음으로, 교회에 대하여 어떤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만족할 수 있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 교회는 목사님의 이런 노력으로 몇 년 안에 수천명의 대형 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맥아더 목사님의 결론이 재미있습니다. “당신이 만일 그런 교회의 소식을 듣는다면 아마 당장에라도 그 교회에 나가겠다고, 그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그 교회의 소식을 듣는다면 그 교회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흥미를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야말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이 충격적입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시는 충격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편하게 예수 믿는 때는 지났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교회는 그 부담을 안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 부담을 안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 중에서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생을 드리겠다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왜 나는 아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