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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척 하는 유대인

로마서2:17-3:8

저는 제법 괜찮은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공립학교였는데 도에서 우수한 학교 중에 하나였어요. 학교 시설이나 건물은 볼품이 없었으나 선생님들이 아주 유능하고 훌륭했습니다. 또한 학생들도 실력이 뛰어났어요. 그 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선생님과 선배들이 오리엔테이션을 시작으로 하여 1학년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학교는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인류대학에 많이 들어가는 학교라는 거예요. 그런 학교라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야 하고, 교복도 깨끗하게 입고 다녀야 하고, 모자도 반듯하게 써야 하고, 뺏지를 바르게 달고 다녀야 하고, … 뭐 이러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많이 들었어요. 선생님들과 선배들이 1학년 학생들에게 이렇게 강조한 이유 는 학교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때문이었습니다. 선배들이 이룩해 놓은 학교니까 신입생인 1학년 들도 열심히 공부해서 이러한 전통을 이어가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학생들 의 긍지는 대단했습니다. 그러한 긍지가 넘치다 못해 공부 외에 다른 곳에까지 넘쳤습니다. 학교 뺏지나 모자나 교복에까지 넘쳤습니다. 모자를 써도 그냥 쓰지 않습니다. 학교 뺏지를 바르게 달고 심지어 어느 학생들은 모자 속에다가 볼펜심을 연결 시켜서 팽팽하게 만들고 교복 은 말끔하게 해서 입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대학교는 고등학교의 긍지나 자부심이나 전통으로 가나요? 실력으로 가나요? 긍지나 자부심이나 전통으로 가는 것은 아니지요. 실력으로 가는 것이지요.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긍지와 자부심과 전통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공부 하여 실력을 쌓아서 일류대학에 진학할 때에 긍지와 자부심과 전통이 사는 것입니다. 내가 다니는 학교의 긍지와 자부심만 있다고 해서 그것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쓸데없이 잘난척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학교라고 해도 내가 열심히 노력할 때에 좋은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 그냥 다닌다고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학생들 개중에는 쓸데없는 자부심으로 잘난 척 하다가 정작 가야 할 대학은 가지 못하게 된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저희 반 친구 들 중에 겉멋만 들어서 바지는 다리미로 빳빳하게 다려서 파리가 옷에 떨어지면 낙상할 정도로 하고 다니고, 학교의 뺏지는 반들반들하게 닦고 다녀서 빛이 날 정도로 하고 다니고, 어깨에 힘 주고 뻐기고 다녔던 몇몇의 학생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대부분 눈물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습니다. 쓸데없이 잘난 척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부심이 있습니다. 나라도 그렇지요 그 중에서 특별히 잘난 척하는 사람과 나라가 있습니다. 유대백성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유대인에게는 하나님께서 택하셨 다는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선민의식이 지나쳐서 우월감을 가진 특권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하는데도 자기들은 다르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유대 사람들은 자기들만 선하여 구원받았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 은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구별된 생각이 예수님 당시에는 이방인들을 가리켜서 개라고까지 부르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잘못된 의인의식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하나도 이루어 드리지 못하고 잘난 척만 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잘난 척을 할만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3장 2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9장 4절과 5절에 가면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 그리고 예배와 약속을 유대 백성들이 맡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굉장한 특권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의 말씀을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 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어디 그뿐인가요? 하나님께서 세계의 여러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을 유일하게 선택하셔서 그들에게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계가 구원받는 복을 받도록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세상에 구세주가 태어난다는 소식보다도 기쁘고 복된 일이 어디에 있나요? 이런 소식을 유대 백성들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특권의식을 가지고 잘난 척을 할만도 합니다.

 

유대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음으로 세계에서 뛰어난 민족이 되는 길도 미리 알 수 있었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세요. 뭐라고 합니까?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율법을 가르칩니다. 집에서는 어머니가 가르치고 교회에서는 랍비가 가르칩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유대 아이들은 12살이면 성인이 되는데, 그 이전에 모세 5경, 그것을 "토라’라고 하는데 이것을 모두 외우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생활합니다. 그 결과 오늘날 세계에서 뛰어난 민족이 되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23%가 유대인이고, 전 세계의 식량을 맡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유대인이고, 금융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이고, 미국의 언론사를 맡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즘 미국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선출된 조지프 리버맨 상원의원도 유대인이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부통령에 나오게 되니까 미국의 언론들이 일제히 좋은 기사를 내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런지 아시나요? 언론을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봐요. 아마 하나님이 어느 날, 한 순간에 세상에 있는 유대인만 모두 불러 가신다고 한다면 세계의 경제는 어떻게 될까? 아마도 일시에 정지하여 혼란에 빠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로 유대인들이 뛰어난 만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시대의 유대인에게 있어서 무슨 문제가 있었길래,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야단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유대인의 문제는 남의 문제가 아니라 곧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라고 별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배우고 실천하는 율법을 우리도 배우고 실천하고, 유대인들이 짓는 죄를 바로 우리가 짓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잘난 척을 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책망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하다가 습관이 되고 그러면서 형식의 함정에 빠져서 이렇게 하나님께 혼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똑바로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도 그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으로 부터 책망을 받지 않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가진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도 유대인과 같은 함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익숙해 지다 보면 형식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오게 되고, 습관적으로 찬송하게 되고, 건성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사모하여 은혜를 받고, 뜨겁게 찬송을 불러서 은혜를 받고, 기도하여 능력을 체험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고 하는 모습들이 점점 희미 해져 갈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메말라서 형식만 앙상하게 남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니지만 은혜도 없고 열정도 없고 헌신도 없고 봉사도 없고 기쁨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냥 주일 이니까 교회에 나오는 것이고, 예배를 드리니까 예배를 드리게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유대인들처럼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깊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고, 겉 사람이 유대인이 되고, 외형적인 크리스챤이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 신앙생활 은 내용도 중요하고 형식도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형식은 괜찮고 내용만 중요하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형식도 중요합니다. 형식이 없으면 내용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내용이 없는 형식과, 형식이 지나친 형식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 형식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형식은 지나쳐도 안 되고 형식을 업신여겨서도 안 됩니다.

형식이 지나치면 형식주의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형식주의에 빠지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데 , 하나는 내용이 없어지고, 다른 하나는 구원의 기쁨을 맛보지 못합니다. 유대인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들은 형식이나 율법에 익숙해 있는 반면 내용은 없었습니다. 알맹이가 없는 빈 껍데기에 불과한 신앙이었습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말씀이 2장 28절과 29절입니다. 오늘 본문 에서 핵심 구절입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이 이해하기 쉽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겉모양으로 유대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에다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속이 유대 사람인 사람이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할례를 받는 할례가 참 할례니라”아멘

겉모양이 유대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고, 겉 모양이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유대인이 아니 라는 말씀입니다. 개역 성경 표현대로 하면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 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 가시지요? 결국 무슨 말씀인가요? 표면적 유대인, 겉 사람이 유대인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25절에서 할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할례 는 유대인들이 아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할례는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 하신 것인데,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는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여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형성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할례를 굉장히 자랑스럽고 영광 스럽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까지 생각을 하였고, 반면에 할례를 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은 사람 과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을 철저하게 구분하였습니다. 유대인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할례를 받았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할례라는 형식만 있으면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나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말씀대로 살면 구원을 받는 줄로 믿습니다. 27절의 말씀과 같이 율법과 할례가 있어도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보다 율법과 할례가 없이 순종하는 이방인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이라는 말 씀입니다. 진짜 할례는 몸에 표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남기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마음이 변화 되어 새사람이 되는 것이 진짜 할례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내용은 없어 지고, 할례라는 형식만 남게 되니 그것이 하나님께 죄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율법은 잘 아는데 율법대로는 살지 않습니다. 그것이 17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입 니다. 남은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 문제,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면서 도둑질하는 문제, 간 음하지 말라고 하면서 간음하는 문제, 우상을 미워하면서 신전의 물건을 훔치는 문제, 율법을 자랑하 면서도 율법을 어기는 문제 등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잘못하면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잘못하면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죄가 더욱 큰 것입니다.

여러분, 형식이 지나쳐 형식주의가 되면 본질을 잃어버립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으면 그냥 정해진 시간에 와서 안식일을 지키면 되는데, 안식일에 지키기 위하여 지나친 형식을 삽입하면 형식주의가 되 고 맙니다. 이들은 안식일에 얼마까지 걸어가면 노동이고 얼마까지 걸어가면 노동이 안 되고, 그래서 죄가 되고 안되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라고 했더니 믿음으로 하지 않고 모든 곡식 을 한 알 한 알 세어서 아주 정확하게 십일조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안식일의 본래의 의도를 지 키며, 십일조의 본래의 의도를 지키며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있겠어요. 오히려 반대 현상이 일어나 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으면 우리가 정한 시간에 와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면 되는데, 그 시간하나 맞추지 못해서 허겁지겁 달려와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 가 끝나자 마자 집으로 달려가고, 이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어요? 안내를 하시는 분들이나 점심을 준비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맡은 일을 예배 시간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준비 하는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남들이 예배드릴 때에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그 외의 시간에 봉사를 해야 그것이 참된 봉사가 되는 것이지, 남들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그 시간에 준비하는 것이 무슨 봉사입니까? 그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거나 봉사를 할 때에 형식 주의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배, 온전한 봉사, 온전한 헌신을 드려야할 것입니다.

형식을 업신여기면 무교회주의가 됩니다.형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녀야 구원을 받나? 내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다면서 왜 교회를 다녀야 한다고 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의 독선이야. 집에서 성경보고 기도해도 괜찮아. 주일날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것은 다 형식이야. 자기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하는 거야. 성 경에 어디 주일을 지키라고 했어.”

이런 소리를 들으면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논리적으로도 맞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틀린 말입 니다. 이렇게 말하는 무교회주의자들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미국에는 집에서 공 부하는 홈 스쿨이라는 것이 있어서 대학에서 점차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드리기도 합니다만은, 한국에 서도 대학에 가려면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됩니다. 검정고시라는 제도가 있어서 초등학교와 중 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검정고시의 과정을 패스하면 대학교에 갈 수가 있습니다. 형식을 업신여기는 무교회주의자들은 정규적인 과정의 학교를 다니지 않고 대학에 가겠다는 것과 똑같은 것 입니다.

공부는 집에서 혼자서 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학교에만 가서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효과적인 공부하기 위해서는 학교에 다녀야 합니다. 학교에 가면 지식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 들과의 인간 관계를 배우고, 선의의 경쟁도 배우고, 서로 돕고 도와 가는 것도 배우고, 선생님이 가르 쳐 주시는 공부하는 방법도 배우고, 인격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공부하는 실력 이 느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에서 혼자서 공부하면 책을 통한 지식은 늘지 모르지만 그 외에 다른 것 은 조금밖에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똑똑한 부모라고 할지라도 자식들을 정규과정의 학교를 차 례로 다니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무시하고 집에서 혼자서 예수를 믿을 수도 있지만, 교회에 나아와 예배의 형식을 빌어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할 때에 신앙이 더욱 성장하는 것입니다. 혼자서 찬송 하는 것보다 교회에서 함께 찬송하는 것이 더욱 은혜가 되고, 집에서 혼자서 기도하는 것보다 교회에서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더욱 은혜가 되고, 집에서 혼자서 성경을 읽는 것보다 교회의 성경공부 그룹 에 참여하여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더욱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먼저 믿는 신앙의 선배들의 가르침을 본받게 되고, 그들과 영적인 교제를 한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형식의 신앙생활이 필요한 것이고 교회를 통해서 믿음이 자라나는 것 입니다.

제가 분명하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형식을 업신여기는 무교회주의자들이 1년간 아니 몇 개월만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그나마 가지고 있던 신앙을 모두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경험을 해 보신 분들이 있으실 텐데, 주일 몇 번만 안 나오면 신앙이 어떻든가요? 신앙이 제자리인가요? 신앙 이 떨어지던가요? 아마 신앙이 식어버릴걸요. 주일 몇 번이나 몇 달 나오지 않으면 신앙이 제자리가 아니라, 신앙이 식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한번 잃어버린 사람이 다시 시작 하기가 힘이 든 것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사람보다도 몇 배 몇십 배 힘이 든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내용과 형식은 모두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라는 형식, 예배라는 형식을 통하여 믿음이라는 내용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지, 교회를 떠나서 혼자서 명상하고 묵상한다고 믿음이 자라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만 들을 때에 믿음이 자라나는 것이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형식과 내용을 모두 중히 여겨야 할 줄로 압 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난 척하지 마십시다. 신앙생활을 조금 알아 놓고 다 아는 것처럼 확대하 지 마십시다. 교회에 좀 오래 다녔다고 잘난 척하지 마십시다. 기도 열심히 한다고 잘난 척하지 마십시 다. 성경 공부를 많이 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십시다. 기도 열심히 한다고 잘난 척하지 마십시다. 직분 을 맡았다고 잘난 척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귀한 직분 그렇지 못한 직분이라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는 모두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논리가 아닌 자신의 논리가 제일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자신 에게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겉모양만 번드런 유대인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속이 알찬 유대 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많이 알기보다는 실천하고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리고 형식주의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형식을 무조건 나쁘다고 외면하고 무시하는 무교회주의자도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형식도 중히 여기고 내용도 귀히 여기는 균형있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힘쓰시기 를 바랍니다.

지난주 전교인 여름수련회 아침 Q.T. 시간에 묵상했던 여호수아 1장 7절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형식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내 용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균형을 잡힌 신앙생활로 잘난 척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를 믿으면서 잘난 척하는 교만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겉모양만 그리스도인이 아 니라, 속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성숙된 인격과 온전한 신앙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결코 잘난 척하는 교만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