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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디옥 교회를 본 받으라(행11-19)

초대 교회에 일어난 감당하기 힘들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이었습니다.

본 구절은 독자로 하여금 과거의 일을 회상하도록 촉구하면서 새로운 이야기의 배경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스데반의 순교 후(7:54, 60) 교회에 닥친 박해(8:1-4)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9장에서는 박해의 손길이 유대 땅이 아닌 다메섹까지 미쳤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박해의 범위가 타 지역(이방 지역)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아마 이 같은 일련의 박해로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던 성도들은 이방나라로까지 이주했을 것이며 그곳에서 전도를 하다가 박해의 손길이 그곳까지 미치게 되자 또 다시 점점 더 멀리 흩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주의자들의 박해가 복음을 전세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역사 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흩어진 이후에 교회는 흩어진 자리에서 복음으로 뭉쳤습니다. 성도들이 흩어진 곳은

○베니게 입니다.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서 갈멜산과 레바논산 사이에 위치했으며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 지역에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도시가 속해 있는데 이미 예수는 갈릴리 선교 당시 이 두 곳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그곳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준 바 있습니다(막 7:24-30). 따라서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생소한 지역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구브로 입니다.

지중해 동북부에 위치하여 안디옥과 다소, 그리고 길리기아 지역과 마주하고 있는 섬으로 구약 시대에는 `깃딤'(민 24:24)이라고 불리어졌으며 오늘에는 `키프러스'(Cyprus)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나바는 이 섬 출신이며(4:36) 그곳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고 바울도 바나바가 함께 그곳에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13:4-12). 

○안디옥 입니다.

행정 구역상 수리아 지역의 지중해에서 약 32Km 내륙에 위치한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48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안디옥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성경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본절의 수리아 안디옥 두 곳이 언급되어 있습니다(13:14).

수리아 안디옥은 기원전 300년경에 셀류쿠스 니카토르 1세(Seleucus Nicator I)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라 도시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디옥은 A.D.1세기에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레산드리아에 이어 인구 약 50만에 달하는 큰 도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Josephus). 지역의 위치상 안디옥은 동 서 문화가 혼합되어 상존했으며 전체 인구 중 1/7정도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A.D.37-41년에는 갈리굴라(Caligula) 통치 아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무서운 도시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안디옥은 외국 선교의 전진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13:1-3)처음으로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던 곳이며(11:26) 이방인 개종자의 할례 문제에 관한 논쟁이 처음있었던 곳입니다(15:1-2, 갈 2:11-21). 이와 같이 이방 지역 선교를 위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안디옥 교회는 초기에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 지도되었고 2세기에는 이그나타우스와 데오빌로, 3, 4세기에는 루시안, 데오도르, 크리소스톰 등의 유명한 지도자들에 의해 지도되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로마와 함께 중요한 신학적 본산(本産)이 되었습니다.

본문에 소개된 안디옥 교회를 좀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끼리끼리 에서 선교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19-20).

"..도를 유대인에게 전하는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한다는 본문의 의도는 1-3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유대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편견과 지금까지 이방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해외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이 현지인을 상대로가 아니라 해외동포를 대상으로 선교하는 일과 동일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아의 중심 도시로서 B.C.7세기경 설립되었으며 헬라 문화권에 속한 지역입니다. 또한 이곳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시몬의 출신지이기도 합니다(눅 23:26). 여기서 언급된 구레네 몇 사람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선교 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의 배타적(排他的) 우월 의식을 버렸기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19절에서 언급된 `유대인에게만'이라는 단어와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헬라인'을 뜻하는 헬라어 `헬레나스' 대신 `헬라파'라는 의미의 `헬레니스타스'로 표현된 사본들이 있어(B, E, H, L, P)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즉 `헬레니스타스'라고 할 경우에는 `헬라화된 유대인' 또는 `헬라 지역에 사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 되기 때문에(6:1)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것이 됩니다. 따라서 어느 사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헬레나스'를 본문으로 인정합니다(Alford, Chrysostom, Knowling, Bruce, Vincent).왜냐하면 헬라파 유대인은 19절의 `유대인'이라는 말 속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을 굳이 `헬라인'이라고 표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헬라파로 구분할 때에는 `히브리파'와 대립하여 사용되는데(6:1) 여기서는 `유대인'과 (19절) 대립되어 사용된 점으로 보아 `이방인'을 지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에 `헬라인'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헬레니스타스'라고 언급한 사본들은 19절과의 대립적 묘사를 피하고, 뿐만 아니라 이방 선교가 바울의 활동 이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이방 선교에 대한 바울의 공로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수정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Haenchen).

그러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주 예수를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선교활동의 중심 내용은 예수가 `주님'임을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좀더 구체적으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했다는 의미입니다.

통례적인 끼리끼리의 선교활동을 중단하고 이제부터는 폭를 넓혀서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 선교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될 줄 믿습니다. 

 

2. 주님의 손길이 함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고 했습니다.

누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는 구약적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삼하 3:12). 누가는 이 같은 구약적 표현을 통하여 그들의 이방 선교 활동이 구약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여 이방 전도의 정당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본서의 일관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끼리끼리에서 복음전파의 폭을 넓혀가기 시작하니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셔서 놀라운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음을 표현하는 이 어투는 누가의 독특한 수사법입니다(Haenchen). 이방인들이 `예수를 주로 믿고 돌아왔다'는 표현은 곧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지만 세례를 베풀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아직 교회가 조직되지 못한 상태이므로 세례는 시행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에덴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3. 협력하는 교회입니다(22-26).

예루살렘교회가 스데반 사건이후에 지도자들은 흩어진 성도들의 활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 성도들의 아름다운 활동소식이 들여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그래서 예루살렘교회에서 인정받는 사람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게 된 것입니다.

이 바나바는 구브로섬 출신으로서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으나 설교를 잘하여 바나바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4:36). 그는 자기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쳤으며(4:37) 회심한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했던 장본인으로 안디옥 교회의 교사이기도 합니다(13:1).

또한 아디옥 교회가 확장되자 바울을 다소에서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와 가르치게 하였으며(11:26) 그 후에 바울의 선교 여행의 동역자로서 바울을 돕기도 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여 바울을 능가하는 능력을 인정받은 흔적이 있습니다. (13:2, 15:12)에서는 바울 이름보다 바나바 이름이 먼저 언급되기도 합니다. 그는 마가를 선교 여행에 동행시킬 것인가에 관하여 바울이 반대하므로 바울과 결별을 하게 됩니다(15:36-39). 이처럼 그는 초기 기독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던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21절에서 언급된 이방인의 개종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니다. 즉 21절에서 많은 이방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 들어오는 것이 `주의 손'에 의한 것이라고 묘사했듯이 바나바는 이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가 `기뻐했다'는 말은 안디옥 교회의 선교 활동을 공인(公認)한다는 표현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기독교인들을 기독교 공동체로 인정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나바는 "굳은 마음"이라는 이 마음은 한 목적을 향해 흔들림이 없음을 뜻합니다. `굳은'으로 번역된 `프로데세이'는 본래 여러 사람 앞에 차려놓고 진열하는 것을 뜻하며(마 12:4, 막 2:26, 눅 6:4, 히 9:2) 또한 `계획, 결의, 의지'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여러 사람 앞에서 맹세하듯 또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 주를 따르라는 말입니다.

또한 "주께 붙어 있으라"는 이 말은 초기 기독교의 메시지로 예수를 삶의 중심이 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가 모든 삶의 원리이며 기준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말은 모든 종교적 율법과 유대교적 전통들로부터 자유하여 예수에게로 돌아오고 오직 예수만을 규범으로 삼고 살아가야 함을 뜻합니다.

바나바의 안디옥교회 방문으로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바나바의 안디옥 방문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교회의 확장을 가속화시켰는데, 그 이유가 바나바의 착함과 성령이 충만한 믿음 때문임을 누가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많은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로 되어 있습니다.

바나바는 교회가 더욱 성장함에 따라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사울을 데려옵니다.

9:30에서 사울이 다소로 보내진 사실이 언급된 후 처음으로 사울이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가게 된 것은 환상 중에 받은 명령에 따른 것으로 사울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22:17-21). 사울이 다소로 가서 머문 기간이 얼마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을 것으로 보기도합니다(Haenchen, Ramsay). 왜냐하면 예루살렘 2차 방문이 14년만에 이루어졌다고 사울 스스로 밝히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갈 2:1) 안디옥에서의 1년을 빼면(26절), 약 13년 정도의 시간이 남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찾아간 다소는 안디옥에서 북서쪽으로 약 12.9Km의 거리에 위치한 길리기아의 중요한 도시로 무역이 성행했습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중계(中繼) 무역을 했으므로 헬라 철학을 비롯한 헬라 문화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사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간 뚜렷한 이유에 대해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안디옥 교회를 바나바 혼자 이끌 수 없었고, 대상이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이방인을 위해 부름 받은(갈 1:16) 사울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 같은 바나바의 모습은 9:27의 내용과 함께 사울을 초대 교회의 중요한 사역자로 등장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로 묘사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상호 협력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갈 때가 바람직한 교회의 진정한 모습인줄 믿습니다. 그런 에덴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일 년간 모여 있어"라고 했는데 바나바와 사울이 협력하여 안디옥 교회에 사역하는 기간이 일 년으로 언급되는데 그 시기가 A.D. 43-44년경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Lenski),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일 년간' 이란 표현은 아마 바울과 바나바가 부근의 일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난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기독교인들에게 붙여진 고유한 명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수치스럽고 간교한 것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에서 세 번 언급되는(26:28, 벧전 4:16) 이 말은 비 기독교인에 의해 붙여졌다는 의미에서 경멸적인 별명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본문에서 누가가 소개하는 어투를 보면 그렇게 불명예스러운 칭호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바나바와 사울과 같은 쟁쟁한 사람이 이끄는 기독교인에 대해 수치스러운 단어를 소개한다는 것은 문맥상 부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로서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는 집단을 표현한 말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또 안디옥 교회는 타인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음으로써 참으로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임을 인정받게 되고 그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교회의 설립에 대한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보증 받게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추종하는 대상의 이름을 따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에서(`헤롯당', 막 3:6)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에게 붙여진 지극히 당연한 칭호였습니다(11:19-26). 따라서 이제 기독교는 안디옥에서 유대교와 전혀 구별되는 새롭고 독특한 종파로서 부각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 창립 19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교회가 안디옥 교회와 같은 교회로 이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나와 내 주변만 챙기던 좁은 마음을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넓혀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님의 손길이 늘 함께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도 상호간에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그런 모범적인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결심기도

19주년 창립 일을 맞이하도록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를 늘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좁은 마음에서 넓은 마음과 생각으로 넓혀주시고 주님의 손길에 이끌림을 받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또한 모든 성도들이 합심 단결하는 교회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