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Do you love me?)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장 15-17절)

 <목회기도>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좋으셨다고 평하셨던 창조물 속에서 살던 저희들
하나님 마음에 합하지 못하게
욕심과 죄악의 더러움 속에서 살다가 여기 모였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안을 주지 못했습니다.
인간적인 따뜻함도 주지 못했습니다. 구원의 복된 소식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상처 주고, 말로 행동으로 할퀸 자국만 남겼습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고, 난감한 일을 만난 사람에게 힘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위로 받고 사랑 받지 못한다고 투덜대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I.M.F.시대에 신세 진 사람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기 보다,
작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예의를 모른다고 비난했습니다.
믿었던 사람이 준 아픔과 상처를 끌어안고 울며 기도하기보다
보복을 계획하고 울분을 되씹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말뿐이었습니다. 오늘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으로 회복시켜 주옵소서. 믿음, 소망, 사랑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군대, 외국에 나가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고
저들이 어디에 있든지 머리털 하나 상함이 없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기둥교회에 속한 성도들 병상에 누운 환자들이 있습니다.
주님, 저들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 부족한 종이 성도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저들에게 전할 말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악한 마귀 틈타지 않도록 성령께서 주장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벌써 4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98년의 3분의 1이 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 어떠셨습니까? 기쁜 일이 많으셨습니까? 좋은 일이 많으셨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많으셨다면 그 고난을 통해, 그 파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길을 잘 모르는 사람,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잠언 16장 9절의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니라"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을, 여러분의 발걸음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가슴을 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제자들은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가족도, 삶의 현장도, 인생 살아가는 방법까지도 예수님 때문에 바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3년간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추종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제자들에게 힘든 일이 많았지만 특별히 부름받은 기쁨과 제자로서의 보람도 있었습니다. 혹 예수님이 한자리 하시면, 기회가 된다면 큰 덕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도 했습니다. 조용히 참고 기다리지 못하는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집권하시면 우편과 좌편의 높은 자리에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막 10:35-37). 그런데 그 제자들의 모든 꿈을 이루어 주셔야 할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감옥에 갇히고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3년 동안이나 졸졸 따라 다니고 희망을 걸고 있었던 그들의 소망은 산산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예수님이 이룬다던 하나님의 나라도 그의 죽음으로 다 끝난 것 같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오히려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 속에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 처형당한 중죄인, 사형수 예수와 한 패거리였다는 이유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염려로 제자들은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무서워 벌벌 떨던 제자들 앞에 죽은 예수께서 부활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이 부활의 사실에 대해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나야 합니다. 죽었다는 예수가 나타났으니 '할렐루야 아멘'하며 부활을 기뻐하거나,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가 유령이라고 생각했다면 머리를 숙이고 숨어야 될 것입니다. 일부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유령으로, 귀신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진짜 살아나셨음을 보이기 위해 과학적인 사고를 가져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도마에게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주셨습니다(요 20:24-29). 비로서 예수님이 정말 살아나셨고 그의 살아계심이 확인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너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과 함께 계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가 사셨다는 것은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다시한번 주님과 무엇을 해야겠다든지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자가 되기 보다는 모두 접어 두고 옛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했습니다. 분명히, 제자들은 다시 사신 예수님, 그리고 그의 활동을 다시 보았습니다(요 20:30). 그러나 제자들은 불안과 공포의 사건이 있었던 예루살렘을 등지고 갈릴리 호수로, 그들이 살던 곳으로 그들이 성장한 고향으로 쉽게 돌아갔습니다.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자신들을 살펴 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모든 일들, 그동안의 일들을 다시한번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또 저 사람과 함께 모험적인 삶을 살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실망했던 마음을 다시 추스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려는 생각을 하기 보다는 꿈을 깨져 버렸고 고향을 가고 싶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급한 베드로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에보면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에이, 고기나 잡으러 가자, 옛날 살던 대로 고기나 잡아 먹지 뭐'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다 돌아갔습니다.

  3년 동안이나 방치해 두었던 배를 띄웠습니다. 그물을 다시 바다에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물에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3년을 쉬었다고 이럴 수가 있나? 고기가 말랐나?'라는 생각을 하는데 어느덧 날이 새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보슈 친구들, 고기 좀 잡았우?", 우리 성경에는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고 되어있습니다. "아니오, 못잡았습니다. 헛탕이요.", "그렇다면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려 보시오. 고기를 잡을 것입니다". 낯모르는 사람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제자들은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순간 제자들은 몇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되돌이켜 봅니다. 밤이 맟도록 고기를 잡지 못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을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던 사건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때, 사랑했던 제자 한 사람이 말합니다. "주시다, 저 분이 예수님이시다" 너무나도 깜짝 놀란, 급한 베드로는 '주시라'는 말에 배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몇 년 전 비슷한 경험을 했던 베드로는 비로소 예수님의 부활이 실감났을 것입니다(눅 5:1-14). 처음 제자로 불렀던 그 호숫가에서 다시 고기잡이를 하는 제자들을 만나시고 자신이 부활한 예수임을 드러내신 예수님께서 아침 식사를 마치신 후에 모든 제자들의 대변인(?) 격인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저는 성경을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속에 와 닿는 새로운 문구가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견고하고 단단한 반석을 나타내는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3-18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위대한 신앙 고백자 베드로,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선언을 있게 한 그 베드로의 이름을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베드로라는 이름 대신, 이제 자신의 삶의 자리로 돌아간 "요한의 아들 시몬( Simon son of John)"에게 물으셨습니다.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온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2000여년 전 갈릴리 호숫가에서 있었던 옛날 이야기를 들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말씀과 여러분은 상관이 없게 됩니다.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앉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베드로,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물으셨던 질문을 여러분 각자의 얼굴을 향해 물으십니다. 덕지덕지 붙은 세상에서의 이름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쉽게 불려지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집사, 권사, 장로라는 특별한 호칭이 아닌 김씨네 집 둘째 딸 순희야, 박씨네 집 맏아들 철웅아 하시면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을 부르신 주님이 바로 오늘 우리를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우리 주님은 화장으로 가리고, 옷으로 가리고, 신분으로 가려진 모습이 아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불려지는 그대로의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여기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교사도, 여기 사장도, 부장도, 대표도 쫄병도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아닌 원래 출생하며 불려지던 이름으로 그 모습 그대로 오늘 하나님 앞에,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예배의 자리인 여기는 신분으로, 직분으로 앉는 자리가 아닙니다. 누구나 똑같은 하나님 앞에 똑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는 곳입니다.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친구들,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보다 너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함께 땀흘리고, 정들었던 사람들보다 함께 고기 잡는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니?(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라고 물으십니다.

이 사람들(these)보다 : 여러분은 다른 제자들 보다 여러분은 주변 사람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합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주변 사람들의 사심있는 사랑, 이해관계의 사랑보다 더 주님을 사심없는 사람, 희생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십니까? 그러나 사심 있는 사랑, 이해관계의 사랑 때문에 주님을 외면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일이면 결혼식, 친목회 때문에 주일 성수하지 않고 예배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 때문에, 정든 사람, 친척, 친구 때문에 주님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네가 잡아온 이 고기들(these)보다 : 지시대명사 복수형 'these'는 사람(person)이 아닌 '이것들(thing)'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잡은 '네가 이 고기들, 잡아온 것들 보다 나를 더 소중히 여기느냐?' 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은 잡아 놓은 것들 보다 더 주님을 사랑합니까? 소유한 것보다, 소득보다, 눈앞의 물질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정말 대목 때도 주일을 지킵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베푸십니까?

네가 다시 잡은 이 연장들(these)보다 : 예수님이 요즘 오신다면 뭐라고 물으실까요? 여러분이 장사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 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컴퓨터 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타고 다니는 자동차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미안하지만, 자신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에게 왜 주일 날에 교회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교회에 주차할 공간이 없어서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마 그 분은 천국에도 못갈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성경을 봐도 천국에 주차장이 있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어느날 제가 설교를 하지 않았던 주일 날에 교회 입구에 서 있는데 어떤 여자 분이 강아지를 안고 왔습니다. 그래서 안내위원 중의 한 분이 강아지를 안고 예배실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강아지를 맡기시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강아지를 잘 돌봐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분이 다시 왔습니다. 불안해서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합니다. 강아지 때문에 예배를 못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키우는 강아지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너의 활동 무대들(these)보다 : 여러분의 활동 무대, 고기 잡는 그 무대, 돈 버는 그 무대 그 주변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갈릴리 호숫가에서 물으셨던 주님이 오늘 예배의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본문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 예수님은 3번의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처음 두 번의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Do you love me?)"라는 물음은 '희생적인 사랑 - 아가페(Agape)'의 사랑을 말합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느냐?, 나를 위해서 희생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느냐?'라는 신적인, 희생적인, 사심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 때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물음에 '사회적인 사랑 - 필리아(Phillia)'의 사랑, 내가 주님을 좋아합니다(I like you, Yes, Lord, you know that I like you)"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친구간의 사랑, 사회적인 사랑, 존경하고 좋아하는 상태의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니?, 네가 나를 위해 정말 희생할 수 있니?"라고 물으셨는데,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대답을 못합니다. 물론 원문에 사용된 단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은 사랑을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똑같은 사랑을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Do you like me?)" - The Simple English Bible - 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근심했습니다. 슬픔에 잠겨 버렸습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Lord, you know everything. You know that I like you.)" 라고 말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 뭘 물어보십니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기를 각오한 베드로는 감히 최고의 사랑,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 앞에 완전한 사랑을 고백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기도 했고, 예수님을 외면 하기도 했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완전한 사랑을 고백할 수 없었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장담하지 못하는 베드로, 그는 한때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 치던 사람입니다(마 26:33). "주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37) 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배신자였던 자가 또 큰소리 치겠습니까? "주님 다 아시지 않습니까?"하는 베드로의 사랑 고백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도 허약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 속에는 회개하는 마음이 동반되어 있습니다. 순수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백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고 명하십니다. 물고기를 잡으러 돌아간 베드로에게 처음 만나, 처음 말씀대로(마 4:19, 막 1:17)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명하십니다. 이제 의무를 감당하고 명하십니다. 사랑에는 의무가 수반됩니다. 사랑한다면 지킬 것이 있고,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 말 보다 행동으로 네 사랑을 네 회개를 보이라고 명하십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습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지 못하는 믿음, 표현할 줄 모르는 믿음은 거짓말입니다. 사랑하면서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남에게 뺏기고 한 숨 쉬는 것은 바보입니다. 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드러남이 있어야 합니다. 공부 안하는 학생들을 변호하는 어머니의 표현이 무엇입니까? "우리 애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 애는 노력은 하는데 시험에 약하다"고 합니다. 노력을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드러남이 없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아니, 노력만이라도 드러나야, 보여야 합니다. 크리스챤이면 크리스챤으로서의 삶이 드러나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은 사랑한다면 그 사랑하는 행위를 보여보라는 말씀입니다.

  찰스 하워드 박사(Dr. Charles B. Howrad)는 말하기를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구원 받아서 천국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당신이 예수 믿는 사람처럼 살지 못했다면 당신은 그것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나 스데반과 같은 위대한 순교의 죽음을 죽을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매일매일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께 충성을 바치며 살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당을 짓기 위해 자기의 눈도 자기의 심장도 떼내어 팔려고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의 생활비 전부를 연보궤에 얹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비록 엽전 두 푼이라도 가장 많이 바쳤다고 칭찬했습니다. 몇 년 동안 모아도 모을 수 없는 귀한 향의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보고 예수님은 너무 기뻐하시며 축복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도 우리는 하나님이 깜짝 놀라리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깜짝 놀랄 만한 정성이었습니다. 일천번제라고 하는 것은 번제를 일천번 드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한번 최소한 소나 양을 한 마리씩 드렸다 해도 근 3년 동안 천 마리를 드린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소원을 들어 주셨습니다. 구한 지혜와 총명뿐 아니라 구하지 않는 부귀영화까지 주셔서 솔로몬처럼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도 없습니다. 솔로몬만 그런 희한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도 그만한 정성과 하나님이 깜짝 놀랄 만한 충성과 사랑을 바치면 그런 축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같은 결심과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면 대답은 "아멘"이라고 잘 합니다. 그러나 생활 속에 양을 먹이는 행위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요한 칼빈(John Calvin)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약하며 어떤 자는 경솔하며 미덥지 못하다. 어떤 자는 고집불통이라서 가르칠 수가 없다. 여기에다 사탄은 온갖 거침돌을 가지고 공격하며 선량한 목사의 용기를 꺾으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들어도 변화가 없고, 행함이 없고, 순종이 없으면 사탄에게 지는 것입니다. 평범하고 순종 잘 하는 성도들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평범하고 순종 잘하는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이 정말 강대상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에 '아멘'하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그러나 해결이 안되는 인생도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설교하고 아무리 가르쳐도 문밖에 나가면 엉망진창인 사람도 많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을 만나거든 여러분이 서로 용서하고 덮어 주고 여러분이 눈물을 흘리고 참아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받는 자이며,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가 복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사랑하는
그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니?
너 의무를 감당할 수 있니?
너 정말 나를 사랑하니?
나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니?

  저 갈릴리 호숫가의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물으시는 그 예수님의 음성이 바로 이 자리의 예배드리러 나온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김씨네 아들에게, 박씨네 아들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표현대로 의무를 감당하며 살아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정말 사랑하느냐?"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 기둥교회에도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많은데,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참으로 참담한 모습을 봐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요?
정말 내가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정말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이 시간 2000여 년 전 갈릴리 호숫가에서 있었던
그 얘기를 듣고 돌아가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시고
이 예배의 자리에 앉은 저들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그 물음을 가슴에 담고 한 주간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생활의 환경 속에서 "너 나를 사랑하느냐?"
묻는 물음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98년 4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