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호숫가에서 시몬을 만나시다
요 21:15∼1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던 밤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배신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모습은 베드로 한 사람의 배신이야기가 아니라 그 당시 예수님을 삼 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며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신변의 위기가 닥쳐오자 모조리 배신하고 돌아서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배신한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디베랴 바닷가로 찾아가셨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만난
곳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처음 사랑을 맺은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어떻게 제자들을 만나셨는가? 우리는 믿음의 첫 경험을
가지고 살면서 그 사랑의 열정이 식어질 때면 그 자리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하다 보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변질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교회는 초대교회로 돌아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다시 찾아야합니다. 첫
번째 교회는 마가의 다락방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모여서 성령 받기 위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교회입니다. 소아시아 관문인 안디옥
교회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이 금식하면서 선교사를 파송 하고 지원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갈릴리의 디베리아 바닷가로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시고 해답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살려면 수많은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고 해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문제 속에 들어오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예수님이 지시하시는 말씀대로 온전히 순종하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진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를 비교해 보면 베드로가 바닷가의 전문가입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헛수고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물 던지는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베드로에게 지시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지시하는 대로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만드시므로 그것을 보고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엠마오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십 오리나 동행하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에 나온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설명해 주시고,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는 것을 먹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실패하고 낙향한 사람들이 모여있던 디베리아 바닷가까지 찾아오시듯 우리들에게도 찾아 오셔서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지시하십니다. 낙심하고 옛날로
돌아가려고 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새 비젼을 가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친히 숯불을 지피고 조반을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기 전에 미리 숯불과 떡과 고기를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떡과 구운 생선을 직접 가지고 오셔서 제자들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본체가 같으신 전적인 하나님이시나 그분은 참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이 필요한가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인간의 부족한 점도 잘 아십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해도 빈 그물만 던진
제자들이 얼마나 배고플까 배려하시고 생선과 떡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먹은 후에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을 먼저 시키시고 먹을 것을 주신 분이 아닙니다. 먼저 먹을 것을 제공하시고 일거리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일을
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벌써 이 모든 것은 준비해 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먹고, 입고, 잠잘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리아 바닷가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배신하고 도망한 제자들을 혼내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배고파하는 제자들에게 밥을 먹여주기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자기의 양을 먹이고 양을 돌보고 양을 칠 목동을 찾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소명자를 찾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소명을 주기 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짐하고 확인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네가 내 양을 사랑하느냐' 라고 묻지
않으셨을까? 주님을 "아가파오" 하는 사람이 주님의 양을 "아가파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가파오'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형제를 아가파오 하는 것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계명입니다. 요15:12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할 가치가 있고 사랑할 조건이 있고 사랑 할
수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것은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을 뛰어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가파오'를 가지고 형제를 사랑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려면 예수님에게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까? 예수님에게 은혜를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 발을 닦아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눅7:37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구원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옥합을 아낌없이
깨어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를 풀어 닦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사랑의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하였습니다. 죄 용서를 많이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은혜를 입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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