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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 (2)
 
만남 - (2)
"회복의 만남" (요한 21:1-17)

인생은 만남입니다. 인생이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사는 삶을 인생이라 합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잘 만나도록
만들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부모자식, 친구, 그리고
배우자입니다. 그러나 평생 영원히 함께
있어야 되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 잘 만나시기 바랍니다.

* 김진홍목사님이 철학공부를 하실때였습니다. 개강 시간에 교수님이 <칸트의
인생론>에 대하여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를 한참 하는데 이 학생 김진홍이 손을 들더니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
제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생명을
내놓고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라도, 살아가야겠다는 의미가 있는 인생이
있다면, 그런 인생은 무엇입니까?"하고
질문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인생철학을 강의하는 교수님이 대답을 못하더래요.
그러니까, 학생 김진홍이가 "그럼
교수님 종강합시다. 이 철학시간에 의미있는 인생을 배우지 못하는데 무슨
인생론입니까? 종강합시다!"
그 뒤에 김진홍목사님은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살아갈만한 의미있는 생애는
무엇일까?" 해서 그것을 찾기 위해
방황하면서 엿장수도 하고, 아이스께끼(ice cake) 장사도 하다가 예수를 만나고 그는 "내 인생을 예수님에게 걸리라" 해서 전도사로 청계천 빈민촌에
갔는데 목회를 하다가 가난한 빈민들 속에서 예수를 "다시 만납니다."   
대정부 데모도 하다가 감옥에서 성경을 보고 예수를 또 다시 만나게 됩니다.
지금은 강남의 교회에서 목회하시면서 중국, 미얀마, 미국 그리고 유럽 등 열다섯 군데에서 두레마을을 세우고 "한민족의 식량을 책임지리라"는 비전을 가지고 목회를 하시는데 특히 이북의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해마다 만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어주고, 비료제조법 등 무공해농사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납시다. 다시 만납시다. 예수님과의 처음 만남을 회복하십시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만나서 나눈 사랑을 잃어버려서 문제입니다. 아기는
엄마에게로부터 처음 사랑을 받았지만
커서는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부모를 모릅니다. 부부는 신혼 시절 또는 연애
시절의 처음 사랑을 잃어버려서 마지못해
살아가고, 새끼들 때문에 산다고 합니다.
* 저의 집사람과 제가 연애할 때 저는 내성적이고 집사람은 내숭적이어서 이내성과
장내숭이 만났습니다. 처음
만나서 몇 달이 지났습니다. 제가 손을 잡고 싶어서 하는 말이 "저, 손 좀
빌려주겠어요?" 하니까 손을 내미는데
여름이라 손에 손수건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재가 손수건반, 손가락반을 잡고
걸어갔습니다. 더우니까
땀이나고 긴장하니까 땀이나서 손수건이 다 젖었습니다. 손수건을 짜니 물이
떨어질 정도였습니다. 이런 식의
만남으로 우리는 사랑을 나눈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는 친구대로 처음 만나서 우정을 나누다가 나중에는 각기 살아가는
문제로 갈라집니다. 교우들은
교우대로 초대교회처럼 지내자고 맹세했건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각기
흩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말면, 예수를
믿다가 시들어 버리고 말면, 우리 인생이, 우리 교인 생활이 얼마나 불쌍하고
재미없고 얼마나 무력하겠습니까?

우리가 지칠줄 모르는 믿음과 사랑을 간직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님과 만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당신의 첫사랑을 마지막 때까지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주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다시 만남," 즉 회복의 만남입니다.

여기 처음 만남을 통해서 그 인생을 예수에게 걸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12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3년동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행복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온갖
기적과 역사와 기사를 보고 놀래며
흥분하며 또 세상 나라를 완성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실때에는 감동과 감격을
간직하면서 예수님과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신다고 하시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드디어 병정들에게 잡혀가시게 되어 고난이 시작되자, 제자들은 "내
인생을 걸리라"는 그런 처음의 열정을
다 버리고 모두 다 도망갔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숨었습니다.
(마태 26:55)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재자들이 도망가 있는 그동안 예수님은 채찍질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일주일동안
물과 피를 다 쏟고 말라 비틀어져
돌아가시고 무덤에 들어가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도망간 제자들,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는
제자들을 찾아주시며 드 제자들의 신앙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마가 16:6-7) ...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도망가서 숨은) 그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나는 그를 모른다"고 부정했던)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며 처음 만남을 회복시키시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심령들은 이런 예수님을 잘 만나고, 늘 만나야 합니다.

첫째, 1. 예수님과의 처음 만남이 회복된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다음 두 번째에는 첫 번 때
자리에 없었던 도마에게 나타나시고
이제 세 번쩨 갈릴리 바닷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한
장소에 제자들이 나갔습니다.
제자들 일곱이 나갔는데,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시몬 베드로가
있었고, 디두모(쌍둥이)라 하는
토마스도 있었습니다. 그는 방금전 "내가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지 못하겠다"고 의심하였다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에
"손가락을 넣어보라" 하시며 "보지 않고
믿는자는 복되도다" 하니까, 신약성서에서 고백한 사람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입니다!"하며
고백한 사람입니다. 또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밤에 찾아온 유대관원,
공직자)이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 즉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실 때 좌우의 자리를 달라고 요청한 세배대의 아들들이
있었으며, 또 이름이 나와있지 않은
다른 제자 둘, 합해서 일곱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얼마쯤 기다려서 만나지 못하니까 베드로가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간다"고 하니
다른제자들도 함께 고기 잡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런 그 약속한 장소까지 가서는 만나지 못하고 3년전의 생업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정작 예수님은 만나러 나가셨는데 제자들은 다시 만남의 신앙을 갖지
못했습니다.
처음 사랑은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만나려고 하는 사랑입니다. 연애할 때 보면
약속 시간을 정해 놓고도 늦으면 늦는
대로 마냥 기다립니다. 한정 없이 기다립니다. 그러고는 꼭 만나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것이 처음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어느새 정작 예수님이 오셔서 바닷가에 서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인줄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날이 새어 갈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셧으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요
21:4)

이 제자들은 기껏 예수님이 만나자고 한 장소인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는 만났지만
예수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비극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만나려고 교회를 왔는데 교회까지 와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나자고 한 장소인 교회는 만났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교인은 만났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목사는 만났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비극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기다리는 믿음속에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 믿기만하면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새 예수님은 우리 곁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계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시기 바랍니다.

바닷가가 넓으니까 못만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그 만나는 장소를
좁혀서 숯불가에서 분위기로 만나
주십니다.
둘째, 2. 예수님과의 만남의 분위기가 회복된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요 21:11)
사실 제자들의 분위기는 썰렁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는 것을 보고도 피해
도망갔으니 그 마음이 오직
쓸쓸했겠습니까? 그런 배신감을 일으켰다니! 자신들이 얼마나 한심했겠습니까?
서로가 예수님을 버렸다는 자괴감에
말도 못하는 냉냉한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잡는데 밤새 아무리 수고하여도 고기 한 마리도 잡히지 않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예수님 없는 인생은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랍니다.
(요한 21: 4-6) "'에수께서 이르시되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펀에 던져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애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를 만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바로 가까이 던졌더니 고기가 놀랄 정도로
많이 잡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다시 만나니 풍요로운 삶을 산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 차가운 새벽에, 그 새벽부터 이미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 놓고 따뜻한,
훈훈한 자리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들에게 훈훈한 분위기가 회복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생선이
있습니다. 게다가 출출한데 떡도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도 생각납니다.
이때 예수님은 방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153마리의 생선이 잡혔는데
베드로가 그 생선을 가져 왔습니다.
(요한 21: 10-11)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홉사리온)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익투스)가 일백쉰세마리라."

* 여러분 한국 모나미(내 친구) 볼펜에 보면 153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그믈이 찢어질
정도로 잡힌 153마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고기(홉사리온)와 베드로가 잡은 생선(익투스)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홉사리온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베드로는 익투스를 가져옵니다.
헬라어사전에 보면 "홉사리온"은 요한복음(같은 장면에서의 마태 마가는
ㅇ투스)에만 나오는데 빵과 함께 먹
는 조리된 음식, 저장된 준비된 물고기 또는 특별한 생선 "cooked food,
(preserved fish), or specific fish"이라
고 하고 이 헬라어사전은 바로 요한복음에만 쓰이는 홉사리온은 preserved fish
라고 말합니다. 반면 "ㅇ투
스"는 세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1) 일반적 (큰) 물고기, 2) 물고기들의 살(flesh),
3) 비늘이 없어 유대인들이 먹지
못하는 물고기 라고 합니다. (A Greek - English Lexicon of the NT, p. 601).
또 물고기 모양을 한 그림 속에는 헬라어 "ㅇ투스"라고 쓰여져 있고, 그 그림은
초대교인들이 핍박가운데서 모
일때마다 하나의 모이는 장소의 화살표와 같은 방향표시로 썼다고도 하는데 그속에
쓰인 헬라어 ㅇ투스를 한자
한자 풀어보면 바로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계속 5병2어의 능력으로 조리된 물고기에서 처럼, 준비된 고기
홉사리온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날생선 익투스를 가져옵니다.
오늘날 교회로 말하면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는 홉사리온 신앙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날고기 익투스 즉 아직 조리되지 않은 익투스 신앙 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숯불 위에서 예수님은 날고기 익투스를 조리된 고기 홉사리온으로 만들어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요한 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홉사리온)도
그와같이 하시니라.

다시 말하면 날고기 익투스 즉 예수님과의 처음 만남을, 처음 사랑을 몽땅
잃어버리고만 심령들을, 조리된 고기,
준비된 고기인 홉사리온 즉 예수님의 능력으로 사는 심령들로 바꿔 놓은 것입니다.
어디에서! 숯불의 분위기에서!
그러므로 여러분 분위기가 좋아야, 분위기가 회복되어야 익투스가 홉사리온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시골에서 마당에 불피워 놓고 둘러 앉아 이야기를 할 때 보면, 몇사람이 얘기
하다가 새사람이 오면 끼워줍니다.
새사람 중심으로 화제가 진행되고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또 그 사람 중심으로
화제가 진행됩니다.
익투스가 들어오면 금방 홉사리온으로 만드는 분위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같은 훈훈한 분위기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에수님의 숯불이 회복되는 사람들 또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랍니다. 그럴려면 숯불
자주 피워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만남을 계획해 놓셨네 우린 하나되어
어디든 가리라 주 위해 서라면 / 무엇이든 하리라 당신과 함께
우리는 하나되어 함께 걷네 / 하늘 아버지 사랑안에서
ll: 우리는 1-기다리며 기도하네 (2-숯불피고 사랑하네) 우리의 삶에 사랑
넘치도록: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