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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19-23)

엊그제 저녁, 저는 한 통의 전화를 받은 후에 저녁 내내 무척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가 결혼을 하여 당진으로 이사를 했는데, 내가 보고싶다고 전화를 한 것입니다. 나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어찌나 기쁘고 즐겁던지 천안에서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싶습디다. 이처럼 자신을 기억해주고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쾌하고 행복한 일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상당히 기분이 좋습니다. 누구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될 때, 그는 용기를 얻게 되고 더 잘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칭찬을 받은 사람은 발전해나갑니다. 더욱이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와서 위로해주면 용기 백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격려의 힘입니다. 격려를 받으면 사람은 힘이 생깁니다. 행복합니다.
오늘 우리는 실패하고 낙심한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을 때, 저 살겠다고 다 도망을 쳤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걱정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을 잊지 않고 찾아주셨습니다.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듣는 중에 여러분 모두 부활하셔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9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이 왜 모인 곳의 문을 닫고 있었습니까? 제자들이 숨어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을 붙잡아 가두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게 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의 군사들에 의해서 잡히실 때, 예수님을 지켜주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아픔 그리고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붙잡혀서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질려 밖에 나다니지 못하고 한 집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최고의 능력자라고 믿었는데 그분을 거침없이 핍박하고 능욕하고 십자가에 매다는 유대의 관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보니 기가 팍 죽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자신들도 예수를 옹호하고 따라다녔다고 해서 잡아죽일 것으로 생각하니 두렵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이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혼이 날 것을 생각하며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떨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벌받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기가 팍 죽은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정도 상황이 되면 대개의 사람들은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려들지를 않고 나쁜 방향으로 생각을 몰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부지깽이를 들고 쫓아올 것 같습니다. 어머니 얼굴이 도깨비 같이 느껴집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선하고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잘못을 책망하시는 무서운 어머니의 얼굴만 생각이 나게 됩니다. 이쯤 되면 이 아이는 어머니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 때, 형제들이 와서 엄마가 들어오라고 부르면 옳다 올 것이 왔구나 이제 죽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울기 시작합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극에 달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신뢰하기보다는 어두운 쪽의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걱정할 때가 많습니다. 어두운 쪽의 가능성에 대해서 걱정을 집중하다보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신실한 은혜들은 모두 소진됩니다. 우리가 한 문제에 대해 걱정할 때 그 문제는 크게 확대됩니다. 이때는 명쾌한 사고를 할 수 없게 되고 상상력이 둔해집니다. 소심해지고 화를 잘 내게 되고 곧장 불면증과 두통과 소화불량 심한 경우에는 혈압 상승으로 인해 쇼크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걱정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최악의 결과는 걱정한 일이 걱정한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걱정은 대개가 부정적인 생각에서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걱정은 반드시 실패하게 되는 어떤 심리적인 경향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3:25-26에 보면 "나의 두려워하는 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내가 그럴 줄 알았지" 걱정을 하던 일이 그대로 일어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절망에 빠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공포에 떠는 제자들에게 생명의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능력의 말씀으로 그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실 때, 제자들은 모두 달아났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있는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은 책망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고 새로운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평강을 약속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은 어떤 것입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평강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평강은 죄 사함을 받은 자가 누리는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가 되셔서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 세력을 다 물리치셨습니다. 우리가 부딪치는 두려움, 걱정, 실패와 낙심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두려움에 빠집니다. 평강을 잃어버립니다.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은 죄악으로 인한 고통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내 허물을 자복 하리라 내 죄를 주께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주께서 내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1-5).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이 너무 커서 하나님께 모든 죄악을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왕입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한 후에는 평강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맛있는 음식, 화려한 유희, 편안한 잠자리 그 어떤 것도 왕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고통은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모두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죄의 문제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크고 시급한 과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보았지만, 타락한 인간은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 뒤집어씌우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심으로 인간의 죄를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 세우신 대속의 은혜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9:15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피 흘리심으로 우리는 모든 죄가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는 평강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죄를 사함 받았다는 확신 때문에 항상 감격과 기쁨 속에서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아멘' 합시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죄 사함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에게 평강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강은 죽음을 초월한 자가 누리는 평강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적은 죽음입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도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공포에 떠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만신창이가 된 채 사람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무덤에 갇히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무덤은 예수님을 영원히 가두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을 열고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영원한 승리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죽음이란 단어는 공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주님의 부활을 확신한 제자들은 기뻐서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들은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부활을 확신하였기에 그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몇 되지 않는 제자들이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 있었던 그 능력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죽음을 초월한 믿음을 소유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분을 만나면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아무리 험악한 상황이 닥쳐와도 무섭지 않습니다.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다니엘을 보십시오. 금령에 御印이 찍힌 것을 알았습니다. 왕 이외의 다른 신에게 절을 하는 사람은 사자 굴에 집어넣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라는 것을 다니엘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조심해야할 것 아닙니까? 숨어서 하던지, 아니면 기도를 하지 않던지, 그런데 다니엘을 보십시오. 오히려 창문을 다 열어놓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보란 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평소대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합니다. 결국 굶주린 사자 떼가 모여있는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를 죽이려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계획대로 되었다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감옥은 너무 평안합니다. 오히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을 졸이고 있습니다. 왕은 좋은 신하를 잃어버릴까봐 초초해서 밤새 철야를 했고요, 그를 죽이려던 사람들은 빨리 자신들은 빨리 상황이 끝나기를 기다리느라고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러나 이른 아침 다니엘은 사자들과 아주 평화로운 모습으로 함께 있었습니다. 이렇게 평안할 수 있습니까? 죽음을 초월하니까? 평안한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서 평강은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죽음을 초월한 믿음으로 하늘의 평안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평강의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손과 발에 못 박히시고 옆구리 창 받으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죄와 불행과 저주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영원히 생명의 보증이 되신 부활의 주님께 여러분의 염려와 고난을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5:7에서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주께서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맡겨버리다"라는 말씀은 짐을 내려놓다, 또는 던져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염려, 걱정은 전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 다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할렐루야! 이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걱정과 두려움의 짐을 모두 벗어놓고 부활하신 주님의 돌보심을 받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