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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증인"(요 20:11-18)
 

 이태리 어느 소읍에 개의 모습을 한 동상하나가 서 있는데 그 동상의 이름은 "피도"라고 하는 동상입니다
이 이름은 그 동상의 주인공인 그 개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고 합니다.
이 개는 물에 빠졌다가 죽음 일보직전에 어떤 신사에게 구출되었고 그 신사는 그 개를 집에 데려다가 키웠습니다.
미물에 불과하지만 그 개는 주인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얼마나 주인을 따르고 사랑하는지 주인이 직장에 갈 때는 매일 뻐스 정류장까지 따라와 주인을 전송하고 주인이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뻐스를 타고 다시 퇴근할 때쯤이면 먼저 가서 정류장에서 기다리며 주인을 생명처럼 여겼는데 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주인이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가 그만 버스가 폭탄을 맞아 주인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정류장에 와서 주인을 기다리는데 주인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그 개는 낮이고 밤이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장장 13년 동안이나 그 정류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가 그 개한테 먹여주기도 하고 했는데..
 결국  주인이 돌아오기를 밤낮없이 기다리던 이 "피도"라고 하는 개는 그 정류장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충성스런 개의 모습을 통하여 감동한 마을 사람들이 그 자리에 동상을 세운 것입니다.
자기를 죽을 자리에서 건져준 주인의 은혜를 기억한 개를 기념한 것입니다.

 미물에 지나지 않는 개도 이렇게 은혜를 알았습니다.

자 오늘은 우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십자가 지시는 골고다 언덕, 그리고 무덤까지 고독하게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 우리의 주님을 따르는 마음과 십자가에서 부터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통하여 과연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하면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건장한 사내들로 이루어진 제자들이 12명, 다른 제자들과 예수님으로 부터 치유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예수님 주변의 인물들이 십자가 근처에 보이지가 않으니 참 안타깝죠.

그런데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시종 예수님으로 부터 사랑을 받고 난후 변함없이 주님을 따라가되 끝까지 따라간 사람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라고 하는 갈릴리 인근의 땅에 살았던 마리아. 이 여인은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하시고(눅 8:1)
처음으로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혜택을 입은 사람입니다(눅 8:2).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실때 귀신이 하나도 아니고 일곱이나 되는 최악의 상태에서 놓임
받은 여인. 불쌍한 이 막달라 마리아가 그 끔찍한 병에서 주님이 고쳐주시자 주님을 영접하여
새사람이 됩니다.
그후 이 여인은 예수의 그 크신 은혜를 받고서 어떻게 보답해야 될 지를 몰라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뒤에서 말없이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께서 로마 병정들과 유대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현장에서 예수님 12제자의 자취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저들은 혈기방장한 사내들이며 용기있는 사람들 같았지만 십자가의 끝까지 주님을 따르지는 못하였던 것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현장에 여전히 지켜 서있는 사람들, 그들은 아녀자들이었고 거기엔 어김없이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두려움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제거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와는 극히 대조를 이루는 인물을 상기하게 되는데 그가 누구입니까?
그렇죠.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체포하는 일에 동원되었던 말고의 귀를 잘라버릴 정도로 예수님을 지키려 하였고 주님께는 "다른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변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호언하던 인물이었지만 십자가 형장은 커녕 가야바 법정 까지도 못들어가고  "멀찌기서만 좇을 뿐이더라"고 하였고 "문밖에만 있을 따름이었다"고 복음서 기자는 전해 줍니다.

  이에 반해서 이 보잘것 없었던 이 여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비아돌로로사를 따라가면서 통곡을 하며 예수님의 잡혀 가심을 슬퍼 할 때에 주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해 울라"고 까지 말씀하실 정도로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민들레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고 예수님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던 이 여인은 그래서 장사지낸 지 3일째 되는 날에도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다가 빈 무덤만 확인하고 망연자실하였다가 결국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맨 처음으로 만나뵈는 영광을 안게 되는데요.
 부활하신 예수를 맨 처음 만난 이 여인의 위대한 신앙의 삶을 통하여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며 헌신된 부활의 증인으로 세움을 입게 되기를 원합니다.

1. 그녀는 예수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은혜와 사랑을 받고도 일단 자기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만 은혜를 입은 사람을 떠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여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장사된 다음 날은 안식일인지라 무덤을 찾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 사건 이후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밤을 지새우며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간의 온갖 추억들이 그녀의 서글픔을 한층 진하게 돋구고 있었을 것입니다.

  과거에 자기는  몸을 팔아 입에 겨우 풀칠을 하며 사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자기 몸에는 일곱이나 되는 귀신이 붙어 있어 자기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녀는 도무지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하루하루가 저주받은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녀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사 그녀를 붙잡고 있던 일곱 귀신도 쫓아 주셨으니 이 여인에게서 예수는 자신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를 만나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인생의 행복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주님께 사랑을 쏟았고 그의 가르침을 경청했으며 자기 재산까지 드려 주님을 섬겼습니다(막 18:2). 그러니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고 그냥 자기 갈 길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은 후에도 그녀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것은 주님의 무덤을 방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엘리사가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간 것처럼(왕하 2:1)
예수를 따라 다녔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어 무덤에 장사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끊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너무나 깊고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예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수제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보다 앞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무덤에 와서 주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만을 확인하고 곧장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주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면서도 그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무덤 밖에서 슬피 울며 서 있었습니다.
너무도 큰 슬픔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애절하
게 주님을 찾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녀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녀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은 결코 우연히 어쩌다 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따를 수 없는 주님을 향한 그녀의 신실한 사랑이 그러한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주님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구원을 받고 참된 인간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에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열정적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의 일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이 닥쳐오면 쉽게 낙심하고 두 손을 드는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꾸준하지 못합니다.
무슨 일을 감정적으로 하고 지속적으로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열성을 버려서 그만 축복을 놓치는 때가 많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결국에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사람은 실제로 행해야 합니다.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적으로 하다가 그치면 안됩니다. 끝까지 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주님에 대한 사랑이 변치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하되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깊이 사랑하고 주님을 따르되 끝까지 따라야겠습니다.

2. 그녀는 예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선교 초기에 변화를 받고 새사람이 된 다음 주님을 극진히 섬기는 봉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7:55-56에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쫓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때도 함께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디를 가든지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 쫓아 온 많은 여자가"(마 27:55)라고 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를 만나고는 줄곧 주님을 섬기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심지어
는 주님께서 돌아가신
다음에도 그녀는 주님의 시신 곁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알고 빈 무덤 앞에서 울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하셨는데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요 20:15)고 간청했습니다.

 그 시체가 무엇이관데 가져간다고 했을까요? 시체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데 연약한 여인의 힘으로 그것을 가져간다는 것인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아마도 그녀는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유명한 의회의원의 준비된 무덤 속에 다른 사람이 묻혔기 때문에 일꾼들이 치웠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예수의 시체를 찾게만 해준다면 자기의 그 무엇이라도 팔아서 다른 무덤을 준비해 주님을 모시겠다고 작정하였을 것입니다.

 그녀의 예수님께 대한 봉사는 그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해서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실 때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비뼈를 빼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잠들었을 때 하와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와를 만드시기 위해서 아담의 살을 찢고 갈비뼈를 취하셨습니다.
하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아담의 피흘림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역시 그것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찢긴 살과 피흘림의 역사가 있어야 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담이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고 했는데 예수께서도 교회를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예수께서 교회를 자기의 분신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났을 때 들렸던 주님의 말씀에서 잘 나타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고 했는데 이는 예수께서 교회를 자기와 한 몸으로 여기신 것을 예증합니다. 그때 바울은 "아,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교회구 나"는 것을 깨닫고 그의 남은 평생을 전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 주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 때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3. 그녀는 곧 전도에 나섰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동산지기인 줄 알았던 이가 곧 부활하신 예수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보기까지 그녀는 얼마나 처절한 슬픔의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자기의 더러운 옛생활을 청산하고 참된 재생의 길을 걷게 해주신 예수께서 폭도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자 그녀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장사지낸 지 사흘만에 무덤에 와보니 그 시체마저 도적맞아 없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돌아가신 것도 억울한데 누워 계신 모습조차 다시 뵐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그녀의 마음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으로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시신을 찾아 슬퍼하며 흐느끼는 마리아에게 정작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평소에 말씀하신 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마리아 앞에서 "마리아야" 하시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를 부르셨습니다. 마치 폭풍을 만난 제자들에게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과 같은 위로의 음성이요 소망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이 오늘 경제적인 풍랑을 만나 견딜 수 없는 위기에 빠진 우리들에게도 들려지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일어나 아무리 한 번 해보려고 해도 재기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황에 처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에게만 찾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도,
의심 많은 도마에게도, 디베랴 호수가에서 그물질하는 베드로에게도 찾아가
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절 아침에 여기 계시는 여러분에게도 찾아오십니다.
"마리아야" 말씀하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마리아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은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인 줄로만 알고 있는 마리아를 향하여 "마리아야, 어찌하여 내가 너와 이렇게 낯설게 되었느냐?"고 아쉬워하시는 음성이었습니다.
주님을 그토록 열심히 좇았고 그렇게 애타게 찾으면서도 정작 바로 옆에 계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주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우리 주님께서 안타깝게 부르시는 음성이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이미 부활하신 주님과 너무 낯설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과 낯설게 산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실망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평소에 말씀하시던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동안에 일으
키리라"는 말씀을 잊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은 지금도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될 때 그녀는 그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신 줄을 알았습니다.
동산지기인 줄 알았던 눈이 열리며 비로소 예수를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집착하며 살았던 데서 주님께로 방향전환을 해야 합니다. 그 어느 것도 나와 그리스도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간섭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곧장 제자들에게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것을 전했습니다. 그녀는 최초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인류 최초로 가장 좋은 소식을 전한 사람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 행운을 갖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 우리 기독교인의 최대의 사명입니다.

우리들의 세상 사는 목적은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아가 그 사실을 증거하여 온 세계를 구원하는 복음의 사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