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없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요6:1-15)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 6:1-15)
※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요한복음 6장 전체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지면상 1절에서 15절까지만 적었습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나타난 주님 따르는 목적을 상고하겠습니다.
1.큰 무리가 따르니(요6:2)
당신은
혹시 이렇게 말하거나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까?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나도 한 때, 기독교인으로 지낸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조만간 기독교인이 될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이 말씀을 드립니다.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봅시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까? 그동안 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녔으며 또 앞으로 어떤 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시던 때에도 큰 무리가 따라다녔습니다(요6:2, 5). 오늘날도 전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표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로마 카톨릭 사람들, 그리스 정교회 사람들, 모든 개신교와 복음교회도 포함됩니다. 통계에 의하면 앞으로
주후 2,000년도에는 62억 세계인구 가운데 약 20억(32%)이 기독교인이 될 것이며 약 52억의 사람들(83%)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사는 곳에서도 많은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일요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드리러 이동하고,
거리에는 교회의 이름이 적힌 봉고차들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밤에, 옥상이나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 보십시오. 헤아리기 곤란할 정도로 여기 저기
빨간 네온 십자가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약 2,000여년 전처럼 오늘날도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2.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요6:66)
그런데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언제까지나 예수님과 함께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시던 그 때에도 큰 무리가 주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많이 물러가고 다시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했습니다(요6:66). 한 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어떤 사람들이 지금 주님을 떠나버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지금
열심히 주님을 따르고 있으면서 어느날 결국 예수님을 떠나버리게 되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주님을
위해 이것도 저것도 하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뽗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으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나를 떠나라, 하리라"(마7:22-23).
이 말씀에서 '그날'은 약속하신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날을 말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많은 사람은
불교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호멧교도나 힌두교도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주님을 따라 살아간 사람들, 오늘날 기독교인이라고 스스로를
표방한 사람들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무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날에 주님께로부터 외면당한다는 얘기입니다. 확률적으로 적다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놀랍게도 많은 사람이 이런 결말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이유로 무작정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마지막 날에 이런 결말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봐야만 합니다.
"너희가 믿음안에 있는 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고후13:5).
3.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시51:5)
지금부터 2000여년 전, 엄마의 손을 잡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그 시절의 어린 아이들처럼, 오늘날도 부모님의 영향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교회 문화에
익숙해져 교회를 떠날 수도 없고 교회를 두둔하면서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중에 하나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모태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태신앙이란 말은 꾀나 신앙연륜이 깊은 것처럼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태신앙이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행13:22)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 어떻게 신앙이란 말을 붙일 수가 있습니까? 차라리
죄악 중에 출생했다는 다윗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죄덩어리인 자기 자신을 바로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우리는 양심이 깨끗한 상태이거나 착한 것을 신앙으로 오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4.배나 지옥자식(마23:15)
또 어떤 사람은 친구나 친지의 권유에 못 이겨
교회에 끌려나오다시피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른 바, 믿어주기로 선심 쓴 사람들이죠. 그러다가 교인들의 환대에 마음이 녹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찬송이나 기도를 배우고 성경공부를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중에 하나가 되어버린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만들어지는 것(making)이 아니라 다시 나는 것(born again)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꿈에 십자가를 붙들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로마시대
콘스탄틴이라는 황제는 십자가 표시로 전쟁터에 나가면 승리한다는 꿈을 꾸고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기독교인들에게 호의적이었고 기독교
편에 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죽을 때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한 침례에 순종하지 않았고 스스로에게 태양신의 최고사제를
의미하는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만들어진 교인입니까, 거듭난
사실이 있는 성도입니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made-만들면,KJV) 너희보다 배나 지옥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복음으로 구원받은 사실이 없는데 단지 교인이란 사실로 안심하는 사람은 언젠가 주님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자기 집 문 앞에 `교패를 붙였다는 것, 혹은 기도할 줄 알고 찬송할 줄 알고, 성경찾을 줄 안다는 것으로 안심하는 사람은 언젠가 주님을 떠나고
말 사람입니다. 병인들에게 행하는 표적을 봄이라(요6:2) 예수님 당시에 큰 무리가 따라다녔던 것은 병인들에게 행하는 큰 표적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의원이 소용없을 정도로, 아니 의원도 못고친 병들을 예수님께서 고치셨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겠습니까?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는 표적을 봄이러라"(요6:2).
병을 하나님께서 고쳐주셨다고 믿은 까닭에 예수님의 편에 선 사람 역시 아직도 완전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병인들에게 행하는 그 많은 기적들을 보고 경험한 사람들도 어느 땐가 다 떠나가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요6:66).
병을 고치는 것이 예수님이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실 때, 제자들에게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마28:19)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24:47).
병고침을 목격한 사람들,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다 떠나갔습니다. 그런 목격이나 체험을 의지하고 있다 면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던 것처럼 참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당신은 주님을 떠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5.임금 삼으려는 줄(요6:15)
나는 어떤 전도지에서 이런 글귀를 보았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분도 오세요. 자녀가 속을 썩이는 분도 오세요. 병낫기 원하시는 분도 오세요.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세요."
물론 예수님께는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능력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을 찾으시는 진정한 목적은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는데 독립운동을 위해 애쓰던 이들은 예수께서 그 운동의
주도권을 쥐고 일해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 아시고"(요6:15).
오늘날도 이와 같은 유형의 신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가난한 삶이 부유한 삶으로, 밑바닥의 삶이 고위층의 삶으로, 무명한 삶이 유명한 삶으로, 무력한 삶이 권세있는 삶으로 바뀌길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알라딘의 요술램프 안에서 살면서 이따금씩 주인이 부를 때마다 나와, 주인의 부탁을 들어주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거인같은
분으로 삼고 싶어서 따르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예수님을 해결사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정말 이상한
관계를 주님과 맺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말만 주님(Lord)이시지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다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하수인(Servant)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기도는 주님을 부리기 위한 명령에 지나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를 임금 삼으려는 줄 아시고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요6:15). 만일 우리가 주님을 해결사 정도로 이해한다면 아마도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떡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요6:26). 그것처럼 오늘날도 어떤 이들은 교회에 나간 이후로
어떤 일들이 잘 풀린 까닭에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엔 다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요6:66). 왜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시거나(요6:15) 그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다니지 못하고 떠났을까요(요6:66)? 그것은 서로 다른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그 사람들의 관심과 사람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관심이 달랐던 것입니다.
6.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도다(요6:36)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의 눈에
믿음없는 자들로 판명되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도다"(요6:36.
요:64 참조).
주님의 관심은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따르는 무리들의 믿음에 있었습니다.
그 많은 이들이 과연 예수님을 따랐으나 믿음은 결여된 상태였습니다. 오늘날도 이와같이 믿음이 결여된 상태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큰 일입니다. 왜 큰일입니까?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6:4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
믿음이 없다는 것은 곧 영생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은 죽어서 영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25:46)
기껏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다가 죽어 영벌에 들어간다면? 기껏 예수님
믿는 행세를 해놓고 지옥불에 처해진다면? 당신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따릅니까? 영생 때문입니까? 아니면 죽을 몸(롬6:12)이 좀더
편하고 대우받고 풍요롭게 되기 위한 것 때문입니까? 성경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원하는 자들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무슨
목적으로 성경을 상고하라고요? 영생이 성경을 읽는 목적이고 영생을 위해서는 성경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18:36),
예수님의 관심은 우리의 영생에 있으나 사람들의 관심은 육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병이 나을까?
어떻게 하면 이 가난을 벗을까? 어떻게 하면 출세하고 성공할까? 그런 육신적인 관심 속에서 주님의 관심을 보지 못한 사람은 결국 주님을
떠나버리고 말 사람들입니다.
7.내가 하늘로서 온 것은(요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6:38-40).
예수께서 왜
오셨습니까? 사람들에게 영생(Everesting Life)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영생, 그것이 주님이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예수께서 왜 오셨는지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요12:47).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눅19:10).
표현이 다를 뿐이지 영생이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하나님의 선물로 동일한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가난한 자가 부해지는 것, 부도난 자가 소생하는 것, 병들어 죽게 된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병자들의 병이 나을 때, 대부분 우리말 성경은 구원을 얻었다로 번역하고 있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온전케 되었다로
말하고 있습니다(눅8:50). 육신의 문제와 영의 문제는 다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육의 문제에 온 관심이 쏠린 사람은 마침내 주님을 떠날
사람들입니다.
8.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요6:48)
요한복음 6장을 잘 읽어보십시요. 전반부에는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장정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요6:3-13). 그리고 후반부에서 예수께서 그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가르치십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사람들을 놀래키거나 경외감을 일으켜서 주님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나타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굶주린 영혼을 채우는 생명의 떡되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보여준 사건입니다(요6:53-58). 누가 올바로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누가 변치 않고 끝까지 주님과 함께 가겠습니까? 바로 그 기적 속에서 보여진대로 영혼의 굶주림 가운데서 허덕이는 자신을 본
사람입니다. 자기의 죄로 인해 가슴을 치는 괴로움을 맛본 사람이 주님에 대해 바로 깨달을 수가 있고 또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게
오라(요7:37)고 초청하시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6:65).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으며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요6:37)가 아니면 소용 없습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요6:45)은 예수께서 누구신지 정확히 알게
됩니다(히8:10-11). 문제는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정확히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언젠가 떠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깨우침 받지 못한 사람은 언젠가 주님과 결별할 사람들입니다(요6:66). 가룟유다는 물론 그 때 떠나지 않았으나
예수님에게서 그 민족의 독립과 새왕국을 가져다 줄 소망이 보이지 않자 결국은 주님을 따르던 일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9.너희도 가려느냐(요6:67)
베드로는 주님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영생의 말씀
때문이었고(요6:68), 예수께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요6:69) 곧, 죄 없으시며(벧전2:23)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왜 예수님을 따릅니까? 죄인된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영생을 주시고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죄 없으신 하나님으로서 나의 죄를 위해 피흘리시고 자기 몸을 드리기 위해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그렇습니까?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2:10)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실 때, 반드시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처리되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흘리신 피로만 우리의 허물과 죄가 덮어지고 사함을 얻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편지를 통해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지금부터 2000여년 전, 골고다 언덕 위에서 흘려진 예수님의 피가
단번에 내 죄를 대속했습니다. 그 피는 내 죄값에 대한 충분한 보응이며 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흔적입니다. 만일 아직도 이 사실을
부인하면서 죄용서를 받으려 한다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미 다 갚아놓으신 죄의 빚을 스스로 청산해보려고 선행과, 물질, 종교적 열심으로 애쓴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그는 전혀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런 진리를 모르고서 주님을 따른다면 그야말로 그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군중심리에 의해서 휩쓸리는 어떤 사람들처럼 종교심리로 예수님 앞에 있을 따름입니다. 전혀 주님과 상관없고 마침내 주님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영원히 주님과 함께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떤 이는 임종 때까지 주님을 떠나지 아니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임종하면 오히려 예수께서
그에게 베풀었던 구원의 기회를 거두어 가시고 떠나시게 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신앙의 관심과 목적이었던 몸이 거기서 끝났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고전15:19)
당신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단번에 완성하신
속죄의 죽음을 모르는 채, 죄짐 가운데서 땀흘리고 있지 않습니까? 여전히 죄의 짐 가운데 허덕이면서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는 않습니까? 당신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말씀을 보십시요. 성경이 무어라 말합니까? 죄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 수 없습니다(시1:5).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의인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보내신 뜻에 순종하셨습니다(롬5:19). 예수님의 순종은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은 것에 대한
보증입니다. 의인은 영생에, 그렇지 못한 자는 영벌에 들어갑니다(마25:46).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죄인이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일을 위해 오셨고 우리들이 이 은혜 안에서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이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언젠가 떠나고 말 사람입니다. 이제는 당신이 대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당신은 이 은혜를 온전히 누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죄 때문에 고민스러워하고 있습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6:68).
죄의 삯은 사망이며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롬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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