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요한복음 2장 1-11)
저는 지난 7월 29일 "수문 앞 광장의 예배"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주 5일
근무제가 실시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다가 미국의 10대 교회 중 하나인 잭 헤이포드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Chuch on
the Way의 이야기를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토요일 오후 5시에 주일 1부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접어두고 세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에 대해 미국에서는 이렇게 하고 있더라는 말씀만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심도있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8월 12일 그러니까 제가 설교하고 난 뒤 조선일보에는 서울교회
담임목사이신 이종윤 목사님이 주 5일제 근무를 반대하시면서 그 이유를 십계명에 위배된다, 또 소비향락 산업을 부추긴다, 산업경쟁력의 약화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열흘이 지난 8월 22일 한민제일교회 이억주 목사님이라는 분은 주 5일제 근무를 반대할 이유가
개신교 입장에서 없다고 반론을 펴고 나오셨습니다. 교회가 주 5일제 근무를 반대하고 염려하는 것이 교회가 건강하지 않다는 증거라고
하시면서 주 5일 근무에 대해 교회가 할 일은 부정적인 요소는 줄이고 긍정적인 요소는 살리며 성도들을 주일 성수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신앙의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지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우리 한국 사회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그리고 우리 신앙생활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주 5일 근무를 반대하느냐 찬성하느냐 이전에 교회는 시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시대가 원하고 있는 메인 스트림(Main
stream), 주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목사만 시대를 읽어서도 안됩니다. 교회가 시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리고
제가 이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있어야 합니다. 시대에 역행해서는 도저히 목회가, 복음증거가 되어지질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대에
야합하거나, 시류를 좇아가라는 말도 아닙니다. 예전에 초대교회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안식일과 주일을 겸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313년 기독교를 공인했던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확립이 된 것입니다. 미국의 전도와 선교의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는 풀러 신학교에서는 주 5일제 근무를 하게 되면 토요일 오전
7시에 에배를 드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신학생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회적 상황이 주 5일 근무제로 흘러갈 것
같습니다. 교회는 건강하지 않은지 몰라도 주 5일 근무제를 반대하는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 5일 근무제가 생각보다 빨리 적용될 경우
교회는 시대를 읽고 적용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와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문제는 매스 미디어로 인해 입은 교회의 피해입니다. TV가 인터넷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TV가 국경을 넘어서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
변방에서부터 러시아까지 동시 다발적으로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언제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에 나올 이유가 없어진 시대가 곧 도래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에 나올 이유가 있느냐 ? 그 이유를 분명히 제시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 시대적 변화에 교회가 시대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다음으로 우리
교회는 비젼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비젼을 가진 사람마다 태어날 때 보다 죽었을 때 세상이 달라지게 만들게
살아야 할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변해도 세상을 복음의 위력으로 변화시키겠다는 비젼과 소망으로 가득차 있어야 시대를 주도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가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슈퍼마켓에 뛰어가서 포도주를 사오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집에서 준비된 것이 없으면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이 때 마리아가 나서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말입니다. 신학 주석가인 메튜헨리나 칼빈은 다같이 입을 모아 이 장면을 해석할 때 마리아는
이미 예수가 이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비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주석가인 벵겔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예수님께 가서 이야기
한 것을 가리켜서 '마리아의 기도'라고 까지 확대해석을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늘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마리아의
비전과 믿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꿈과 믿음이 없이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계속 꿈을 꿀 수 있어야만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120년동안 방주 를 만들었는데 하나님이 약속을 이룰 것을 믿고 바라고 소망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었고,
모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확신했으므로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었고, 아브라함은 더 큰 민족을 바라보았고,
에레미야는 '메시야 왕국'을 바라 보았고 바울은 세계 선교를 향한 자신의 꿈을 믿음으로 실천해 냈기 때문에 위대한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꿈과 믿음입니다. 부산을 복음화한다는 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세계 선교를 한다는 꿈과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 복음화로 통일을 꿈꾸고 세계를 점령하는 신앙의 꿈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말씀과 순종이 있어야 더 나은 미래를 바랄 수 있습니다. 5절 말씀에 보니 '그 어머니가 하인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릴 때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말을 했고 예수께서 능력을 행할 것을
요청하면서 하인들에게 마리아가 한 말은 오직 순종만을 하라고 했습니다. 7절에서도 보면 하인들은 예수님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명령에
순종한 다음 떠서 연회장에 갔다 주라 하시매 그대로 순종하고 실천했다고 합니다. 물이 변하여 가장 맛있는 포도주가 된 것은 바로 순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동광 성도 여러분 ! 기적은 바로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모리아산까지 사흘 길을 걸어가면서 순종했고, 심지어 하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방해가 될까 해서 산 아래 두고가는
치밀한 순종이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어수룩한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면 치밀한 순종을
해야 합니다.
역사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교회 성장의 새
전략이라는 글을 쓴 명성훈 목사님은 더 나은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많이 애를 쓰시는 분이신데 그 분의 글을 보면 도전과 자극이 되는 글이
많습니다. 더 나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효과적인 목회 리더쉽을 갖추고, 목적의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목회의 목적이 분명할 때 더 많은
성도를 얻을 수 있고, 그 목적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목적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주 의미 있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의
목적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영혼, 지치고 힘들어 하는 영혼, 삶에 찌들어서 갈 바를 몰라하는 영혼, 이 분들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열린 교회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는 교회 때문에, 목사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문화 때문에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나와 이야기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나와 삶의 질이 다르기 때문에 사실 떠나서는
안되지만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목사는 성도들을 졸도, 매주일 졸도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로 졸도 시키든지, 아니면 매고 있는
넥타이를 가지고서라도, 아니면 얼굴 표정이라도 졸도를 시키라고 합니다. 졸도를 시킬때는 시키더라도 우리는 먼저 말씀과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우리는 성결한 삶을 살아야 더 나은 미래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6절 말씀에 보면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고 했습니다. 결례라는 말은 성결케 하는 의식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데 필요한 것은 깨끗한
항아리였습니다. 이렇게 성결한 삶이 기적의 초석입니다.
여리고성을 함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기양양해서 다가간 성이
아이성이었습니다. 이 아이성은 여리고성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이성은 벧엘에서 동남쪽 3키로 미터에 위치한 인구가 만 이천인
아주 조그만 성읍입니다. 그 반면에 이미 정복한 여리고는 작은 도시 국가 정도의 크기인 곳입니다. 좋은 샘들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아이성과는 아예 처음부터 비교가 되지 않는 곳이 여리고입니다. 그런데 이 상대도 되지 않는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참패를 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바로 아간이라는 사람이 죄때문이었습니다. 곧 십계명 가운데 8번째 계명인 도적질이 바로 그 이유였습니다. 즉 아간은 예기치
않았던 유혹에 맞서 싸워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탐욕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물건을 훔쳐 자신의 장막 속에 감추어 두는 죄를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간의 행위는 기만적이었고, 이기적이었고, 불신앙을 그대로 드러내는 죄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을 던져 그를
죽임으로 사건이 일단락 되었지만 죄 때문에 하찮은 아이성을 점령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도 아간이 죽은 그 골짜기를 그래서 아골골짜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후세들에게 괴로움이라는 뜻을 가진 '아골'이라는 말은 두고두고 무서운 형벌을 잊지 말라는 경고로 아골 골짜기라고 이름지어 부른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은 성결함입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아무리 봉사에 철저해도 성결하지 못하고 죄나 짓는다면,
그 사람은 하늘 나라에 소용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결교회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성결함에 힘써야 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결의 특성은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 성결교회는 초기에 특색들이 있었습니다. 주일 날 예배도
새벽 기도회, 오전 예배, 그리고 오후 2시에 성별회라는 예배를 드렸고, 오후에는 낮에 전도해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구령회'라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교회들은 지방회에 개 교회 집회를 통해서 성결되어진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보고를 한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월간으로 보고 있는 활천지에 "죽첨정교회부흥기"에 성결한 자가 11인, 1927년 2월호 통신란에 "평택교회부흥회"에서 성결자 2인, 1930년
3월호 통신란 "금당리교회" 보고에 성결자 9인, "황계교회" 1인, "의흥교회" 2인이 나옵니다. 또 1940년 2월호 "웅기교회" 성결자
9명, "춘천교회" 15인이 나오는데 요즘은 누가 어느 교회를 개척했다든가, 아니면 교회 동정에 관해서 세상적인 것과 흡사하게 나오는데 초기
활천지에는 성결한 사람 수를 보고했고 인적사항까지도 정확하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결에 대한 이야기는 진부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결한 체험을 강조하기보다는 성장 논리에 교회가 다 매여들 있습니다. 성결에 대한 설명이 새로운 시대에 도전적이지 못했고, 오히려
진부한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성결의 도리와 체험으로 시작되어 성장한 교회가 이 체험으로 성장할 것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을 때, 당연히
정체성의 위기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998년도에 성결인 대회를 개최하기는 했으나 지금은 또 전체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가 시들해
있습니다. 그리고 온통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는 시덥잖은 가쉽거리를 가지고 논쟁이나 일삼고 있습니다.
성결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죄를 해결해야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죄를 해결해야 하늘의 즐거움을 누리고 복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생활이 죄와 구별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우리 성결교회의 4중 복음입니다. 죄를 해결해야 더 나은 미래가 있습니다. 구원이 확신이 없는
성도, 믿음을 올바로 지니고 있지 않은 성도들은 더 이상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시대를 읽어야
합니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영적인 갈망이 무엇인지 교회가 간파하고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말씀안에서 순종하는 교회의 모습이
있어야 더 나은 미래를 약속 받을 수 있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죄를 해결함 받는 성결의 은혜가 있어야만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약속받을
수 있음을 기억하시고 승리의 미래를 향한 힘찬 도약의 발걸음을 옮기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