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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18)
메시야는 지금부터 약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이라는 상황에서 탄생하셨다. 지역으로 말하자면, 지금의 팔레스타인은 참으로 신기한 장소이다. 그 곳은 동양과 서양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다. 아세아와 아프리카라는 두 큰 대륙을 이어주기도 한다. 북쪽에는 사철 눈이 쌓인 헬몬산이 있다. 비옥한 농토가 있는가 하면, 삭막한 사막과 광야도 있다. 갈릴리 호수와 요단강과 사해가 있다. 온대도 있고 열대도 있다. 그 조그마한 땅에 이 모든 자연적 조건들이 두루 갖춰진 것은 희한한 일이다. 전 지구 땅의 축소판 같기도 하다. 여하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장소를 선택하여 메시야를 보내셨다.
오늘 본문 가운데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구절은 본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대단히 감동적인 말씀이다. 이 말씀의 의미를 알고 읽는다면 가슴에 진한 감동이 밀려올 수밖에 없다. 이 구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성육신의 의미를 살펴보자.

1.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말하는 것이다. 성육신 사건은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안으로 오신 사건이다. 무한자가 유한 속에 들어오신 사건이다.
성육신이라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인간 석가모니가 인생의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출가하여 명상을 통하여 도통해서 부처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이 신이 되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불교는 철저하게 인본주의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을 타락한 존재로 본다. 그러므로 죄악 가운데 빠져 있는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구원 시킬 수 없다. 제한적이고 유한한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육신의 의미를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성육신은 하나님을 계시한 사건이다(18). 예수님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인간에게 나타내는 분이다. 하나님이라 하면 원래 우리 인간과 전적으로 다르고 멀리 인간과 인간세계를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이시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이 하나님은 인간이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접근할 수 있는 구체적인 존재이시다.
둘째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은 우리 사람들에게 중요한 진리를 일깨워 준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인간의 육체와 육체적 삶을 긍정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역사 이래로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인간의 육체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이었다. 한 마디로 육체는 더러운 것, 악한 것, 죄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인간의 육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몸은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소중히 잘 관리해야 한다.
셋째로, 성육신은 하나님의 자기 비하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이전에 어떤 분이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이후에 어떤 분이 되셨는가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성육신 이후의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영화를 버리시고 인간의 비천을 입으셨다.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고 자기를 비우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2:6-8). 화려한 궁전 속에서 귀하신 황태자의 몸으로 오시지 않았다. 용감무쌍한 전쟁영웅인 장군으로 오시지도 않았다. 그는 비천한 가정에서 한 나약한 아기로 오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기까지 낮추셨다. 인간으로 오시되,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셨다.

2.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목적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기서 '거하셨다'는 말은 헬리어로 '에스케노센'이다. 이 말은 '장막을 쳤다', '성막을 쳤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성막을 치셨다"이다. 성육신 사건은 성막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하나님이 임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던 성소였다. 이 성막은 다른 말로 회막이라고 한다. 성막은 길이가 45미터, 너비가 그 절반인 22.5미터이다. 성막은 성전 이전의 성소였다. 성막을 통해서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의미를 몇 가지로 살펴보겠다.
첫째로, 성막은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에 위치했다. 성막의 사방에는 세 지파씩 장막을 치고 자리를 잡았다. 이동할 때는 회막을 가운데 두고, 앞에 여섯 지파가 이동하고, 뒤에 여섯 지파가 뒤따랐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중심에 오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하셨다.
둘째로, 성막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었다. 성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는 임마누엘의 상징이었다. 성막에 하나님이 임하시니 구름이 성막을 덮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다. 출애굽기 40장 35절에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임마누엘이신 예수님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시다.

3. 예수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성품은 은혜와 진리이다.
먼저,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는 인간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이다. 은혜는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호의이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은혜를 잘 나타내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대속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몸 찢기고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아무 대가 없이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에베소서 2장 8, 9절에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다.
우리는 예수님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 은혜 안에는 사람을 사람답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리스도를 믿고 은혜를 받게 되면, 우리의 성품이 변화를 받는다. 미움이 가득한 사람이 사랑의 사람으로,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한다. 죄를 짓던 사람이 의를 행하게 되고, 더러운 사람이 깨끗한 성품을 지니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예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고 나면, 마음 속에 평안이 넘쳐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다.
다음은 진리이다.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다. 진리는 요한복음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진리를 가르치시는 스승만 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바로 진리이시다. 거짓을 따라 살면 망하지만, 진리를 따라 살면 영생을 얻게 된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런데 예수님만의 충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본문의 흐름을 계속해서 따라가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6).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은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의 충만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충만으로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만하시기에 우리도 충만하게 된다. 예수의 충만은 곧 우리의 충만이다! 정리해 보면 예수님의 성육신은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성육신은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어느 왕자가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예쁜 시골 처녀를 만나게 되었는데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그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랑을 이루고자 세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첫째는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왕자의 권위를 그 처녀는 거절할 수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처녀의 진정한 마음을 알 수 없기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둘째는 그 처녀를 왕궁으로 초대해서 왕실의 영화를 보여주면서 구애를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처녀의 진심을 읽기 어렵기에 포기했다. 마지막 방법은 왕자 자신이 처녀와 같은 평민의 신분으로 돌아가서 아무런 조건이나 요구없이 순수하게 서로간의 사랑을 약속하는 방법이었다. 왕자는 이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왕국을 떠나서 평민의 신분으로 시골마을로 들어갔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는 키에르케고르가 예수님의 성육신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비유이다. 인간의 순수한 사랑도 이렇게 큰 감동거리가 된다면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된 지위를 포기하고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 그것도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그 얼마나 벅찬 감동을 주는 것인가?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어 사랑을 보이셨다면, 그 사랑은 얼마나 강렬한 것이며 또 얼마나 애절한 것이겠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은 하나님은 추상적인 개념 속에 계신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인격으로 오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와 동떨어져 홀로 계신 분도 아니라, 이 세상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길 원하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의 운명에 대해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 인간을 죄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까지 내어주시는 분임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께는 고난의 시작이지만, 인간들에게는 구원의 도화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