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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누가복음을 문학적으로 볼 때도 뛰어난 작품으로 본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은 ‘문학 예술의
주옥편’이라고 불린다. 한 폭의 그림같은 문학 작품의 아름다움을 지닌 본문은 ‘불후의 단편’이라고 불리기에 넉넉하다. 열한 사도와 함께
있던(9)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25리 되는 엠마오라는 마을을 향하여 내려가고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께 큰 기대를 걸고 따르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예수님이 독립운동을 해서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애국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힘없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두 사람의 부푼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1.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13-14)
이들이 엠마오로 내려 가게 된 것은 그들의 고향이 엠마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믿고
기대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그들은 천길 물속 같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신 일과 말씀에 있어서 큰
능력을 보이신 예언자로 보고 있었다(19). 또한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으로 알고 있었다(21). 그 희망을 이루어 줄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기대에 저들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기는 커녕 십자가 형틀에 처참하게 매달려 참혹한 죽음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그 순간 그들의 꿈과 희망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이 죽으므로 이 두 사람의 희망은 끝이 나고 말았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런 구세주는 그들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사실이
납득이 되지 않았으며 또 부활을 믿지도 않았다. 여자들이 하는 말도 들었지만 그런 소식을 믿을 수는 없었다. 십자가의 현실이 그들을 완전히 덮어
버려서 그들은 낙담한 상태였다. 그들에게 절망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절망감에 주저앉아 이틀을 보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그들은 꿈과
희망을 모두 잃은 자로서 넋나간 사람처럼 엠마오를 향해 힘없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쪽으로 25리 떨어진 곳이다.
얼굴엔 슬픔이 가득하고(17) 가슴엔 절망을 안은 채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25 리(13) 되는 엠마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더욱이 날은 저물어
그들 두 사람을 더 처량한 모습이 되게 하였다(29). 인간은 꿈과 희망을 가진 존재이다. 마치 허파에 산소가 필요하듯이, 우리네 삶에는
꿈과 희망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이 엠마오길의 두 사람에게는 그런 꿈과 희망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은
절망의 길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자 메시야에 대한 희망이 실망과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걷는 길이기 때문이다. 가슴엔 절망만이
있는 자들, 비단 이 두 사람만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도덕의 암흑 시대에 살고 있으며, 역사의 저무는 길목에 서있는 자들이다. 머지 않아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많은 징조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자들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꿈과 희망이 상실된 길이다.
엠마오길로 가는 사람들은 행복은 살아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죽으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만다고 믿는다. 이 길로 가는 자들은
의가 불의에 의해, 진실과 희생이 거짓과 이기심에 의해 허사가 된다고 믿는 자들이다. “예수님도 별 수 없었지” - 이 말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우리들 삶의 한복판에서도 이런 절망의 소리들을 끊임없이 들을 수 있다. 휘청거리는 경제난으로
전재산을 날린 사람, 일터를 잃은 사람, 가정이 산산조각 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엠마오길로 가는 두 제자같은 절망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도 절망의 상황을 만날 수 있다. 사춘기를 맞이해서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청소년들도 엠마오길로
가는 자들이다. 어느날 갑자기 발견한 불치병으로 건강을 잃은 사람도 엠마오길로 가는 사람이다. 평생을 자식들 뒷바라지로 바치고, 바로 그
자식들한테 버림 받아 오갈 데 없고, 앞에는 죽음만이 기다리는 노인들도 엠마오길에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주위에 절망과 슬픔에 잠긴
사람들은 두 제자처럼 엠마오길을 걷는 자들이다. 엠마오길은 끝없이 내려가는 길이다. 해저무는 쪽을 바라보며 걷는 서향길이다. 점점 어두워져
간다. 절망과 슬픔이 배어있는 길이다. 땅거미가 찾아들듯이 온갖 절망감과 슬픔이 스며드는 길이다.
2. 동행하시는
예수(15-32)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내려가고 있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그들의 대화에
관하여 물으셨다. “두 분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관심을 가지고 물으신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어떤 내용인가? 우리는 은혜롭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한다.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말보다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한다.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말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불신앙의 말보다 신앙적인 말을 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 : 두 분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글로바 : (멈추어 서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서만 모른단 말입니까? 예수님 : 무슨 일입니까? 두사람 : 나사렛 예수와
관련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법정에
넘겨 주어서 사형 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우리 가운데서 몇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가 살아나셨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으나, 그분을 보지는 못했다오. 예수님 : 그대들은 참 어리석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참 무딥니다. 그리스도가 반드시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즉시로 “내가 바로 예수다” 하고 밝혀 그들에게 예수님 자신을 알아보게 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자신을
가르쳐 주셨다. 말씀을 풀어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쳐 주셨다.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눈으로 뵈옵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성경을 풀어 주심으로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통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길 바란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과 동행하면서 구약의
모든 말씀들 즉 구약 모세오경과 예언서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셨다. 이 때에 두 사람의 마음은
뜨거워졌다(32). ‘뜨거워졌다’는 동사는 신약에서 오직 여기서만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구약성경을 해석해 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우리가 잘 모르던 말씀을 설교를 통해서 듣다가 깨닫거나, 이해가 잘 안가던 성경의 어떤 부분을 다시 되풀이해 읽다가 깨달을 때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진다. 성경을 공부할 때 뜨거운 확신이 생긴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해석하여 주셨을 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확신이
들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뜨거운 확신과 믿음을 주신다. 지치고 힘든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가슴이 식어져서
그렇다. 뜨거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 사람이 많이 모여 체온 때문에 기온이 올라가는 열기가 아니라, 말씀으로 뜨거워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슴이 뜨거워져야 한다. 마음이 뜨거워져야 한다. 쇳덩어리 비행기가 공중을 나는 이유도 비행기 엔진에서 기름이 타서 생기는 뜨거운 기운
때문이다. 성경을 읽자. 성경을 연구하자. 성경을 암송하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므로 확신있고 담대한 제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들의 목적지 엠마오 마을에 가까이 가자, 예수님은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셨다(28). 예수님은 마치 계속해서 나아갈 것처럼 행동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강요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이 들어오라고 불러
들일 때까지 기다리셨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가장 위대하고도 위험한 선물을 주셨다. 그것은 자유의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예수님을 영접할 수도 있고, 그냥 지나쳐 버리게 하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두 제자는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29) 하고 강권했다. 남에게 호의를 베풀 때는 물어보는 것보다는 조금은 강권하는 것이 필요하다. 식사 때 방문자에게 식사했느냐고
묻기보다는 밥한 그릇, 숟가락 하나 놓고 먹도록 권해야 한다. 나부터라도 밥먹었느냐고 물으면 안먹었어도 ‘먹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을 대접하려면 상대방이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대접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들이 예수님을 강권하여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얻은 은혜는 엄청나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된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면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3.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33-35)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운’(29) 후였지만,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갔다. 그 어둡고 깜깜한 먼 밤길을 말이다. 왜냐하면 영영 죽어 버린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아직도 대적자들의 감시의
눈초리와 로마 군병들의 창검이 예루살렘 거리를 공포에 질리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을 절망에 빠뜨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절망에
빠졌던 것은 그들이 따르던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만 사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래서 절망의 안개는
걷히고, 새소망이 생기게 되었다(21).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들의 삶은 180도로 변화되었다. 이제껏 그들의 삶의 초점은 이스라엘의
독립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그들의 새삶의 목적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뀌었다. 외곽으로의 도피에서 모든 사건의 중심지를 향해 달려가는 열정이 생긴 것이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변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가득찼다. 의심에서 확신으로 전환되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의 모습이 지금 그대의 모습은 아닌가? 지금 어떤 마음
가짐과 어떤 영적 상태로 인생길을 걷고 있는가? 예전에는 체험한 은혜로 얼마나 열심있는 신앙 생활을 하였는가? 그러나 지금은 교회 나오는 것도
부담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부활하여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라. 다시금 식어진 가슴을 말씀으로 뜨겁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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