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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낮추는 자

누가복음14:7-11
미국의 대통령을 지냈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학교를 거의 다니지 못하였습니다. 이분은 인쇄업자이며 발명가인데, 학교를 다닌 기간이라고는 고작해야 2년 남짓합니다. 이 분의 얼굴이 100달러 빌에 나오는데, 이 분이 22살이 되었을 때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 인생에서 가장 우선 순위에 있는 일이 무엇일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인생을 설계한 것이지요. 여러 가지 깊은 생각을 하다가 12가지에 이르는 항목을 뽑아 놓고 자신의 가치관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12가지를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12가지 덕목들을 하나, 하나 명상하여 설명을 붙이고 자신의 살과 피가 되도록 다짐하였습니다. 그것을 잠깐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째, 절제-과음 과식을 하지 않는다.
둘째, 침묵-자신과 타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다.
셋째, 질서-물건은 제자리에 놓고 일은 알맞은 시간에 한다.
넷째, 결단-해야 하는 일은 꼭 완수한다.
다섯째, 절약-비싼 것은 사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자신에게 좋은 것이면 산다.
여섯째, 근면-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다.
일곱째, 성실-남을 해치는 책략을 사용하지 않는다.
여덟째, 정의-남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남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
아홉째, 중용-극단은 피한다.
열번째, 청결-몸, 옷, 집이 불결한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열한번째, 평정-사소한 일에 화를 내지 않는다.
열두번째, 순결-성을 남용하지 않고 건강과 생산을 위해서 사용한다.

굉장한 결단입니다. 프랭클린은 이렇게 12가지를 적어서 친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친구가 이것을 한참 동안 보더니 한 가지를 빠뜨렸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인데, “네가 만일 이 12가지를 다 잘 하게 되면 교만하여지기 쉽다. 그래서 친구를 잃을 것이다. 그러나 겸손하게 되면 정말로 멋진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프랭클린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 열 세번째 항목으로 “겸손”을 적고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본받는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생활을 13주 단위로 나누어서 매주 한 항목씩 묵상하고 자신에게 깊이 적용하려고 힘썼습니다. 이 분이 78세 때에 회고록을 쓰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완벽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겸손하려고 노력하였던 덕택에 좀 더 선량하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단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겸손은 신앙을 가름할 수 있는 좋은 척도가 됩니다. 우리가 겸손을 알려면 교만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한 것에 익숙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에 익숙하여서 교만을 알게 되면 겸손은 자연히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교만이란 뜻은 자기를 과대 평가하고 자기를 높여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잘나고 훌륭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에 ‘나는 달라’하면서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이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교만은 대단히 무섭습니까? 왜 그런지 아세요? 교만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아담과 이브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교만한 마음을 넣었습니다. 마귀는 원래 천사장이었는데 교만해서 하나님 앞에 버림받아 이 땅으로 쫓겨 내러온 것입니다. 천사가 타락해서 마귀가 된 거예요. 그래서 교만하면 멸망합니다. 사울 왕이 처음에는 얼마나 겸손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교만해졌어요. 교만하다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어요. 나라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이 멸망한 것은 이사야 13장에서 교만이라고 했고, 모압이 멸망한 것도 이사야 16장에서 보면 교만했습니다. 에스겔 28장에 두로가 멸망한 원인도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가 할 것 없이 교만이라고 하는 병이 들면 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 16:18에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했고, 잠언 18:12에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라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잠언 21:24에는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교만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기 때문에 잠언에서 여러 번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언제 교만해지는가? 흥미있는 이야기지요. 이것을 알면 겸손할 수가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언제 교만해 지는지 아세요? 이럴 때입니다. 첫째, 배운 것이 많거나 경험이 많으면 교만해집니다. 많이 배워서 학식이 있고, 여러 경험이 있으면 교만해지기 시작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안다 이겁니다. 자신은 많이 배웠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수준 차이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목회를 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기쁘고 좋아서 나도 이제 박사가 되었다고 하면서 자랑을 했답니다. 이제 목사며 박사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장로님 한 분이 가까이 오더니, 목사님 박사는 제가 선배입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그 뒤부터 목사님은 박사라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목사라고만 했다고 합니다. 상당한 의미를 주는 얘기입니다. 배움은 겸손해지기 위하여 있는 것이지, 자랑하기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배움은 사람의 본성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지, 결코 교만해지기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연말에 보니까 동문회 모임이 많이 있더라구요. 동문회 모임을 하는데, 왜 신문에 광고를 하는지 아십니까? 동문회 주소록이 있으니까 개별적으로 서신을 보내서 오랜만에 만나서 얼굴도 보고 교제를 나누자 하면 되는데, 구태여 많은 돈을 들여가면서 신문에 광고를 하는지 아세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만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봐도 내가 이런 학교를 나왔다, 이런 학교에 나온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광고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문에 광고하는 것을 보면 일류대학이나 광고를 하지 이류대학이나 삼류대학이 광고하는 것을 보셨어요? 광고하지 않습니다. 인류대학을 나왔으니 모인다고 광고하는 것은 교만한 거예요.

둘째, 자리가 높아지면 교만해집니다.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자리가 높아져서 명암도 근사하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인사도 받고, 사람들을 지도하게 되면 괜히 우쭐하게 됩니다. 그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때 조심하지 않으면 고개가 뻣뻣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아주 심한 교만의 중병에 걸린 것입니다. 사람들이여 선거할 때보세요.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서 얼마나 고개를 많이 숙입니까? 그런데 일단 선거가 끝이 나고 그 자리에 올라가면 달라집니다. 고개가 뻣뻣해집니다. 교만해집니다. 위세를 부리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교회에서도 조심해야 할 분이 있어요. 누군지 아세요? 팀장들이에요. 팀장도 하나의 자리이거든요. 지금은 별로 그런 생각이 없지만, 교회가 성장해서 커져봐요. 그때에 가면 팀장의 위세가 당당해 지거든요. 그래봐도 내가 팀장인데, 이런 자세를 가지면 그 때부터 교만의 단체에 합류하는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팀장뿐만이 아니라 모든 분들이 조심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리가 높아질 때가 있기 때문에 그 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로마의 네로가 17살에 황제가 되었는데 처음 5년 동안은 얼마나 겸손했는지 몰라요. 스포츠 대회에 참여하기도 하구요. 극장무대에서도 비파를 가지고 가수들 흉내를 내면서 같이 어우러져 노래를 부르기도 하구요. 시를 읊을 때에는 같이 읊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권력의 맛을 들여가면서 나중에 교만해져서 아내를 죽이고 어머니도 죽였어요. 자기 스승 세네카도 죽였어요. 그러다가 31살에 독약을 먹고 자살을 했어요. 그 아까운 나이에, 한참 일할 나이에 교만하다가 버림을 받은 거예요.

셋째, 물질이 많아지기 시작하면 교만해집니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할 때는 사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괜히 의기소침해 있다가도 어느날인가부터 돈을 많이 벌기 시작해서 부유해지고 여유가 생기면서 옛적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굉장한 사람인 줄로 착각을 합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과 수준이 있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다고 인격도 높아지는 줄로 알아요. 물질이 많아진다고 인격이 높아지는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물질이 많아지면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사고 그러는데,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집과 차가 생활의 편리한 수단을 지나서 부를 과시하는 쪽으로 흐른다는 거예요. 그건 잘못된 거예요. 그래봐도 내가 몇십 만불 몇백 만불짜리의 집에서 사는데, 세계에서 최고로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데, 하면서 자랑을 합니다. 이것도 교만입니다.

정말로 물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많은 척 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뉴스를 보니까 한국의 최대 재벌인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사를 했답니다. 이사를 하면서 인부들에 의하여 살림살이가 공개가 됐는데, 이 분은 88년에 나온 17인치 텔레비젼을 보고 있대요. 주방 벽에 타일이 심하게 낡아 있었답니다. 그리고 각 방의 침대며 식탁이며 모든 것들이 단순하여서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모양하고 전혀 다를 것이 없답니다. 그래서 인부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물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물질이 많아져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질의 가치를 모르고 물질이 많아지면 물질에 노예가 되어서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교만하면 다 떠나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떠나가고 복도 떠나갑니다. 성령도 떠나가고 말씀도 떠나가고 사람도 떠나갑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겸손하게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겸손할 때에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고 복을 주시고 은혜도 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혼인 잔치 집의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함을 보시고 비유를 들어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의도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자리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합니다. 그런 욕심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낮은 자리와 높은 자리를 구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리의 높고 낮음을 구별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상좌,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서,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디든지 가면 자리가 있잖아요. 손님들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서 자리가 정해져 있잖아요. 귀한 모임일수록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겸손하게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하십니다. 유대인의 연회석은 보통 U자 형으로 되어 있는데, 상좌는 중앙부분 윗자리를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잔치에 초대를 받으면 유독 윗자리에 앉으려고 암투적인 경쟁을 했습니다. 낮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를 않아요. 낮은 자리에 앉으면 자신의 위치와 권위가 낮아지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앉아서 자기를 과시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보고서 예수님은 자리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에 자신이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자기보다 더 귀한 분이 오게 될 경우에는 자리를 내 주어야 하지만, 반대로 끝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이 청하여 윗자리로 오게 되는데, 그것이 낫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공식석상에서의 예법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윗자리를 좋아합니다. 자리에 대해서 상당히 신경을 씁니다. 윗자리에 앉아 있으면 그 자리가 자신의 인격과 지위와 명예의 모든 부분을 말해 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착각이지요. 자리가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으로 말해 주어야 합니다. 인격으로 말해 주어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인격적으로 생활에서 뒤떨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히려 그 자리에 앉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 자리가 그 사람을 더 망치는 경우를 봅니다. 자리에 맛을 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자리에 맛을 들이다가는 큰 일 납니다. 자리에 만족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자리에 얽매이지 않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자세를 낮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윗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혼동합니다. 예수님이 윗자리에 앉지 말라고 했으니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랫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윗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신 것은 윗자리가 좋지 않기 때문에 앉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윗자리에서 권세를 부리지 말고 자세를 낮추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윗자리에 앉지 않으면 세상을 어떻게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습니까?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리는 아랫자리보다 윗자리가 훨씬 더 좋고 파급효과도 빠릅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중요한 자리, 윗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크게 사업도 해야 하고,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대통령도 해야 하고,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교수도 해야 합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이 대중 가수도 해야 돼요.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골고루 포진해 있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자세를 낮추고 일할 때에 사회가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윗자리에 앉지 말고, 자기를 높이지 말라고 하신 것은 자세를 높이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지 실력을 높이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력도 높이고 자세도 높이는 사람이 있고, 실력은 없는데 자세만 높이는 사람이 있고, 실력은 높은데 자세가 낮은 사람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실력은 높이고 자세는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실력은 상관하지 않고 자세만 낮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낮아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무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 바울은 자세를 낮춘 사도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회심 한 후에 얼마 되지 않아서 자신을 가리켜서 말하기를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 15:9)”고 했고, 5년 뒤에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라고 하였으며, 자신을 가리켜서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실력이 없는 사도가 아닙니다. 정말로 실력이 형편없는 줄로 아세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의 바울의 서신을 보면 알 수가 있듯이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복음을 전하는 열정을 보세요.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 바울 사도가 자세를 낮추어서 말하는 것을 보세요. 실력이 있는 바울이 자세를 낮춘 것입니다. 바울은 은혜가 많은 사도였습니다.

알래스카에 매킨리라는 봉이 있습니다. 이 산은 북미에서 제일 높은 산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세계적으로 제일 높은 봉우리는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에베레스트입니다. 높이가 29,028피트(8,848m)이니까 굉장하지요. 이 매킨리 봉은 20,320피트(6,194m) 밖에 안 되거든요. 그러니 에베레스트 산보다 훨씬 작습니다. 한 9,000피트가 작아요. 그런데 등산가들이 매킨리봉에서 많이 죽는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매킨리 봉을 얕보기 때문입니다. 29,000피트가 넘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했기 때문에 이쯤이야 하고서는 덤빈다는 거예요. 세계 최고봉을 오른 분들이니 등산실력이 대단하지요. 그런 분들이 매켄리 봉을 보고서 자세를 낮추지를 못하는 겁니다. 자세를 낮추었으면 그래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공부하는 실력이 있어서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저는 공부를 잘 하지 못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겸손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실력도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저는 공부를 잘 하지 못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말할 뿐, 겸손의 자세는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교만의 말이기도 합니다. 공부를 잘 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모든 것이 겸손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실력이 있는데도 겸손하게 <저는 열심히 부족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실력도 없으면서 기도생활도 하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고 예배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서 <저는 열심히 부족해요>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 겸손은 아닙니다. 이것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실력이 있으면서 낮아지는 것하고, 실력도 없으면서 낮아지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수준이 다른 것입니다. 아무리 착각이 자유라고 하지만. 착각하면 안 됩니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불성실해서 실력이 없으면서 그것이 마치 겸손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을 하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실력을 낮추라고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자기를 낮추라고 하신 것은 자세를 낮추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 실력은 높이고 자세는 낮추는 겸손한 신앙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자신을 낮추면 높아집니다.
자리나 명예나 권세는 내가 스스로 높인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서 높여주어야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잘 몰라요. 자신이 높이면 높아지는 줄로 알아요. 후진국일수록 자신을 높이는 지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력으로 권력을 쟁취하고 백성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합니다. 백성들은 힘과 권력을 가진 자 아래에 있기 때문에 머리를 숙이고 높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진정한 높임이 아닙니다. 권력자가 그 자리에서 떠나면 백성들은 더 이상 그를 높이지 않습니다. 진정한 높임은 자신은 낮아지고 다른 사람들이 높여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진정한 높임은 자신이 낮아지고 하나님이 높여주실 때에 높아지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10절 중간에 뭐라고 합니까?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주인이 자리를 높여줍니다. 그리고 11절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세요. 전에 외웠던 말씀인데요 다시 한번 외워보십시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할렐루야.

이 말씀을 가지고 송명희 자매는 이렇게 찬양하고 있어요. 기쁨으로 찬양 78장에 나와 있어요.
1. 자기를 위하여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주님을 위하여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2. 자기를 위하여 구하는 자는 잃어질 것이요.
주님을 위하여 버리는 자는 채워지리라
3. 목숨을 위하여 일하는 자는 빼앗길 것이요
주님을 위하여 숨지는 자는 살게 되리라. 아멘.

여러분, 자기를 낮추면 낮출수록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면 낮출수록 주님께서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대하게 쓰시는 큰손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이 높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러한 사람을 봅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당시의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돈을 주고 사려고 애쓰는 로마시민권을 태어나면서부터 소유한 사람입니다. 또한 학문적으로도 남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지식의 소유자였으며, 혈통 있는 가문이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바울을 높이셔서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에서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높아지고 싶으세요. 그러면 낮아지세요. 실력은 높이고 자세는 낮추세요.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낮아지는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낮아질 때에 더 존귀하게 되고 낮아질 때에 더 큰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이 아침에 주님이 주시는 말씀에 귀를 귀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고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리라” 이 깊은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낮아짐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를 믿는 실력은 높이고 자세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리에 맛들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하여 주시고, 언제나 변함없이 어떤 자리에서든지 주님께 충성하는 신앙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