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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공생애 청사진(눅 4:16-30)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2월에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취임사에서 “국민에 의한, 국민이 주인 되는 정부”를 만들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균형있게 발전시키겠다고 했다.
1932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자본주의가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 있을 때 그 불황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뉴딜(New Deal)정책을 발표했다.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은 뉴프론티어 정신(New Frontier Vision) 즉 새로운 개척자 정신을 내세워 미국의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다.
이처럼 취임사에는 공적 활동을 시작하려는 사람의 기본 정신과 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치적을 알려고 한다면 당연히 그의 취임사부터 분석하는 일이 첫 순서라고 하겠다. 그래야 그가 추구한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30세에 천국복음을 전하시며 공적인 삶을 시작하셨다. 이것을 공생애라고 부른다. 예수님께는 비록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공적인 지위도 없었지만, 가장 이상적인 공생애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로서는 마땅히 예수님이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셨을 때의 취임사를 분석해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취임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을까? 본문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행하신 첫 설교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취임사에 해당된다. 대통령들이 취임식에서 자신의 통치이념과 정치철학을 밝히듯이, 예수님도 나사렛 회당 설교에서 자신의 선교활동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먼저 고향 나사렛에 도착하신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펴드시고 자신의 선교활동의 청사진을 제시해 주는 말씀을 읽으신다. 사도행전의 청사진이 사도행전 1장 8절인 것처럼, 누가복음의 청사진은 4장 16절에서 30절까지이다. 누가복음의 나머지 부분은 바로 이 계획의 실천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번째 부분(4:16-22)에서는 예수님의 역할이 회당에 들어가 서서 성경을 펴서 읽고 성경본문에 대해 간단히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했느니라”(4:21)고 설명하는 것에 국한되고 있다.
두 번째 부분(4:23-30)에서는 예수의 역할이 무리의 반응으로 말미암아 좀더 공격적인 데로 발전하고 있다. 그는 열왕기에 나오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로부터 자료를 끌어다가 이사야 본문에 대해 좀더 확대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무리가 예수님의 설교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고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인 데 반해, 두 번째 부분에서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메시지에 대해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예수님을 산벼랑 끝에서 밀어 떨어뜨리려고 했다. 이 두 부분을 나누어 다루면서, 이 본문이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과 관련해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자.

1. 해방자이신 그리스도(16-22)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공적인 선교활동을 맡기기 전에 먼저 성령과 능력을 보내시어 준비시켰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회당에서 읽으신 성경 본문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본문은 구약 이사야서에서 나온 것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18-19).
본문은 이사야서 61장 1에서 2절을 인용하면서 58장 6절의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라는 구절을 포함시킴으로써 약간 수정되어 있다. 이사야서 61장에서 예언자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날, 곧 “주의 은혜의 해”인 “희년”(레25:10)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다. ‘희년’은 ‘복’ 희(禧)와 ‘해’ 년(年)으로 쓴다. 이것은 ‘길한 해’, ‘좋은 해’라는 말이다. 희년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요벨’인데, 이 뜻은 ‘숫양의 뿔’을 가리킨다. 희년을 알리기 위해서 분 숫양의 뿔나팔에서 유래한다. 하나님께서 희년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레위기 25장에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지파별로 공평하게 땅을 분배받게 된다. 그런데 살다 보면 어려움을 만나 땅을 잃게 되거나, 종으로 팔려가게 된다. 바로 이 때를 위해서 희년은 필요했다.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나고 그 다음 해, 즉 희년은 50년마다 돌아오게 된다. 이 해에는 ‘전국 거민에게 자유’가 공포된다.
레위기의 희년 규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땅을 경작하지 않고 쉬게 해야 한다. 둘째,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한다. 셋째, 빚을 갚지 못해 노예가 된 자를 해방시켜야 한다. 넷째, 노예가 갖고 있던 재산을 각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희년은 모두가 다 처음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해이다. 똑같은 조건과 똑같은 자격으로 다시 시작해서, 실패가 계산되지 않고 잘못도 추궁받지 않고, 약함도 가난함도 없이 다시 시작하는 경주의 시작의 해가 희년이다. 사회적, 경제적 불균형을 없애고, 평등과 공평을 실현하는 해이다.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이 희년이 얼마나 좋은 제도인가?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는 내용은 성경 내외 어디에도 없다. 다만 예레미야 34장 8절에서 22절에 동족 유대인을 종에서 풀어주었다가 그들(주인)의 마음이 바뀌어 다시 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부렸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이스라엘 사람들(남유다인)을 보고 그들을 원수들의 손(바빌론)에 넘겨주신 것이다. 인간의 사유(私有)욕, 이기심 때문이다. 인간이 지키지 못하는 희년법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께서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하시자, 사람들은 은혜로운 말씀에 모두 감탄하고 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 하고 의아해 했다.
본문은 예수께서 공식적으로 하신 첫 설교이다. 설교 내용은 희년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께서 오셨다는 말씀이다. 희년은 해방의 해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에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주기 위해서, 눈먼 자에게는 다시 보게 함을 주기 위해서, 눌린 자에게는 자유를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 분은 해방자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은 다른 사람을 억압해서는 안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방시키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2. 지역과 인종을 초월하시는 그리스도(23-30)

사람들은 예수께서 나사렛이 고향인 줄을 알고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23) 하고 말하려고 했다. 이 속담은 ‘먼저 자기 고향에서 행해야하지 않느냐?’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는 말씀으로 자기를 배척하는 나사렛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시지만, 이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 예언자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는데, 그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배척함으로써 예수님이 바로 예언자임을 역설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이렇게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 당한 예수님은 예언자로서 활동하다가 끝내 자기 백성들로부터 배척 당해서 예언자로서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다음에는 이 본문 가운데서 열왕기에 나오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가 나옴으로써 또 다른 중요한 신학적 관심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즉 엘리야가 흉년 때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들에게 보냄받지 않고 이방 나라 페니키아의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과부에게 보냄받아 큰 은혜를 베풀었고(눅4:25-26;왕상17장), 또한 엘리사는 이스라엘에 문둥이들이 많았음에도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음을 강조함으로써(눅4:27;왕하5:1-19), 이방인들에 대한 큰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구약시대에 이미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이방인들에게 베풀어진 이런 전례들을 언급함으로써, 이제부터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게 될 것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는 이미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시므온의 찬양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만민 앞에 베푸신 구원”(새번역,2:31)이며, “이방을 비추는 빛”(2:32)임을 밝혔다. 예수님은 만민을, 즉 이스라엘과 함께 이방인도 구원할 구원자이시다.
이방인에게 베풀어졌던 은혜의 메시지 때문에 사람들이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4:28-29).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냈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산 벼랑에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가운데를 유유히 지나가셨다.
누가가 아시야 본문의 인용을 통해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의 특징을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들을 위한 해방활동으로 강조했다면, 열왕기 본문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는 이방인들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국경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져 있고, 영남과 호남이라는 동서로 나뉘어져 있다. 이념으로 갈라지고, 지방색으로 나뉘어져 있다. 분열은 마귀가 하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종을 초월하고 지역을 초월하여 하나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종과 지역을 초월해야 한다. 인종 차별, 성 차별, 지역 차별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뜻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하나 되게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그리하여 남북통일과 동서화합을 이루는 일에 앞장서서 일해야 한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어떻게 사실 것인가를 보여주는 청사진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은 해방자이시며, 지역과 인종을 초월하여 하나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본 받아 인간으로 인간답게 사는 일에 앞장서고, 하나되게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하겠다. 이같은 삶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