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로 가야 하는 이유 |
- 그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 (마가복음 16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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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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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사흘만의 부활로
- 죽음 저편의 삶을 보여 주신 하나님!
- 여전히 질병과 고통과 거짓과 범죄 등이
- 판치는 어둠의 세상에 살던 우리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 오늘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
- 실패와 좌절에서 일어나게 하시고
- 우울함과 쓸쓸함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 막힘과 갇힘에서 놓임 받게 하시고
- 영생의 소망으로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 기둥교회에 오늘이 있게 하시고
- 연약한 종이 담임목사로 일하게 하신 하나님,
- 현재 모습에 만족하고 머무는 교회가 아니라
- 더 크게 쓰임받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 그러기 위해 성도들의 삶을 축복하시고 십일조가 늘게
하시고
- 감사의 조건이 더해 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 죽음이 끝이 아닌 것으로 보여 주시려고
-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확신의 길을 주신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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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렐루야!
- 오늘 부활절에 "할렐루야"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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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에게 오늘은 어떤 날이십니까? 어떤 분에게는
결혼기념일이고, 어떤 분에게는 첫사랑을 고백받은 날이기도 할 것이며, 또 어떤 분은 오늘이 생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이 "특별한 어떤 날"로
기억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게 기억되는 4월 15일은 "해병대 창설기념일"이고, "김일성 생일"입니다. 제가 해병대에 있었을 때 4월
15일이면 해병대 창설기념일이라고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김일성 생일'이라고 매번 "무찌르자 김일성"이라고 외치고 대회에서 1등을
하면 상으로 휴가를 얻어 집에 갈 수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 그러나 오늘은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
천국에 소망을 가진 사람들, 영생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기뻐해야 할 [죽음이 극복된 날], 죽음이 이 세상의 끝이 아닌 것이 선포된
부활절입니다. 이 부활절이 여러분의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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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하나님의
법이지만(히9:27), 그 죽음이 끝이 아님을 예수님이 몸소 보여 주신 날이 바로 부활절입니다. 오늘은 절망과 죽음의 무덤 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신 날입니다.
- 그러므로
- • 오늘은 절망을 말하는 날이 아닙니다.
- • 오늘은 죽음을 말하는 날이 아닙니다.
- • 오늘은 소망을 말하는
날입니다.
- • 오늘은 승리를 말하는 날입니다.
- • 오늘은 부활을, 영생을 말하는 날입니다.
- 그 모든 복된 것이 여러분의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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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 돌문을 굴려 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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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여년 전, 오늘 아침에 예수님을 찾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째 되던 날 새벽, 주일 새벽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무덤을 향하여 가면서
여인들은 걱정이 앞섰습니다.
-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문을 굴려
주리요?"라는 이 질문은 슬픔에 잠긴 온 인류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 •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을 열어
주리요?
- • 누가 우리를 위하여 막힌 것을 열어
주리요?
- •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갇힌 것을 풀어
주리요?
- • 누가 우리를 위하여 캄캄한 것을 밝게
하리요?
- 라는 물음은 모든 사람의 질문입니다.
- 인간의 행복을 가로 막고 있는 것, 인간의 소망과 기쁨을 가로 막고
있는 그 돌문을 누가 열어 줄 것인가하는 것이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걱정이었습니다.
- 오늘 여러분들도 "누가 이 돌문을 열어 주리요, 누가 내 삶의 돌문을
열어 주리요, 누가 내 기쁨의 문을 열어 주리요"하며 그 문을 열지 못해 근심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 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정하심으로 이미 열려진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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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돌문을 누가 옮겨 놓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절망의 문을
누가 열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철학이나 인간이 만든 어떤 종교나 사상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수없는 시도를 해 보았으나 결국은 모두 비참하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이 아침에 그 무거운 돌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문을 여셨을 뿐 아니라 죽음을 극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죽음이 이 세상의 끝이 아님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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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 곳이 있는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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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여기 저기
떠도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갈 곳이 있는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잠시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고 있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닙니다. 아직도 목적지가 없이,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이 이 세상의 나그네로 끝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의 나그네로 만족하고, 이 세상이 나그네길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오늘 이 시간에 목적지가 있는 나그네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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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 인간이 모두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고 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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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가운데 자녀를 먼저 하나님 나라에 보내신 분이 계십니까?
마음이 아프고 슬프시겠지만 오늘은 울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부모를 먼저 보내신 분이 계십니까? 그러나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남편, 아내, 형제들을 잃었습니까? 아직도 그 슬픔을 잊지
못하고 계십니까? 이 부활의 아침에 그 눈물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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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제사장들의 간계와 음모로
무죄인 상태에서 로마 병정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불의와 죄악과 권력의 대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정의와 진리를 십자가에 못박고 돌무덤을 이용하여 묻어 버리려고 했습니다. 얼핏보면 죄와 세상의 권력들이 승리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승리한 것처럼 보여졌을 뿐, 부활의 아침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이긴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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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로 막을 수 없는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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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문으로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사람들에게 하나의 큰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성공한 사람들은 3일 만에 예수님이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감춰 두고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돌로 무덤을 막아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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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여전히 물량적인 힘으로 진리를 막아보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돌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량적인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로 막았다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이 막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는 그 돌을 굴리시고 다시 사셔서 의의 승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 진리는 물질의 힘보다 강하기 때문에 반드시 진리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진리를 돈으로 막으려 하고 의를 돈으로 사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아도 정의와 진리가 물질의 힘, 인위적인 힘에
의하여 가려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정의와 진리는 물질의 힘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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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봉으로
-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큰 돌로 무덤을 막았을 뿐 아니라 거기에
'가이사'의 권력을 표시하는 "인봉"(印封)을 하였습니다. 만약에 그 돌을 움직인다면 로마 "가이사"의 권력에 반항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봉했다"는 것은 국가에서 하는 일이고, 제도와 권력의 표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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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권력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아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리를 막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넓고 깊게 복음이 전파되어 왔음을 우리는
압니다. 세상의 권력이 십자가를 막지 못했습니다. 이 지구상에 어느 곳이든지 갖은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전파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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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으로
-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문을 돌로 막고, 인봉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여 파수꾼까지 세웠습니다. 사람의 힘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파수꾼의 힘을 가지고도, 파수꾼의 정찰하는 능력과 파수꾼이 가진 무기를
가지고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막아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막힌 것 같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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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로 가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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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덤은 반대자들을 가두는 영원한 감옥이 되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마지막때에 선악의 심판이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이 땅위에 언제나 의와 진리가 최후 승리를 거둔다는 확신을 안겨
준 것입니다. 돌문을 걱정하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문을 열어 주리요"라는 생각을 가지고 무덤에 다가갔던 여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무덤문이 열린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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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무덤은 땅속에 관을 묻고 흙으로 덮어 작은 봉우리를 만들고 그
위에 표시를 해 놓습니다. 그런데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무덤의 형태는 그 곳이 사막지역이기 때문에 땅에 묻고 돌로 표시를 해 놓습니다. 그리고
좀 넉넉하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돌무덤을 만들어 놓고 죽은 후에 무덤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무덤을 예수님께 제공했던 것입니다. 그 무덤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무덤문이 열린 것을 보고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무덤문이 엄청 큰 돌로 막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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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도 엄청난 일에 몹시 슬퍼서 어쩔 줄 모르는 여인 앞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너희가 찾는 예수는 다시 살아나셔서 갈릴리로 가셨느니라"(눅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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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곧잘 살아 계신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무덤에서 찾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무능한 곳에서 찾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물을 파괴시키는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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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면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던 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혼쭐이라도 내실 것이지,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죽어서 장례를 지내고 무덤에 묻혀 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날 잡아서 죽였던 놈들이 어떤 놈들이냐"고 한다면,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이 나타나기만 해도 아마 모든 사람이 기절할 것입니다.
- 우리 교회에도 다른 봉사는 잘하는데 초상난 집에는 절대 가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가지 않는 이유는 무섭고 겁나서 가기가 두렵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게 하는 말이 "그런 곳은 목사님이 가시는 것
아닌가요? 저는 잔치집에나 가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잔치집에는 못가더라도 장례식에는 가라고 했습니다(전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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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출발의 상징 "갈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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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도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의 옷차림을 아실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이 그 옷차림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로마의 병정들 앞에 나타나셔서 "이놈들아~"하면서 못박히셨던 손이라도
드셨더라면, "천국을 믿어라, 나를 믿어라"는 말씀을 하실 필요도 없이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 정치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자신들이 누구를 왜 죽이는 줄도 모른
채 십자가형을 집행했던 그 사람들이나, 예수는 죽이고 바라바를 살리라고 말했던 무지한 많은 백성들 앞에 나타나셔서 멋있게 보여 주지 않으시고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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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처음 만났던 [갈릴리]는 새 출발의
상징이었습니다.
무덤이 끝이라면 갈릴리는 시작입니다.
무덤은 과거요 갈릴리는 미래입니다.
무덤은 정지요 갈릴리는 움직임입니다.
- 예수님은 그런 갈릴리에 가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하시고
사람들을 만나셨던 그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셨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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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신앙은 2천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회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 오늘 부활절은 그 기념식도 아닙니다. 부활신앙은 현재의 확실한 삶의
현장에서 "나는 예수 믿음으로 죽어도 다시 산다"는 소망을 갖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신 것은, 사람들의 삶의 현장으로 가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일터에, 마음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셔 들이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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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속에 함께 계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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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갈릴리에서 목수였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고
기적을 행하셨던 그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런 것에 얽매여 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던 그 갈릴리에서 일하셨던 그분을 추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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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과 죽음을 우리들의 삶 속에 그대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음으로
고난 당하고, 손해 보고, 빛되고 소금된 삶을 살기 위해 때로 눈물도 흘리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포기하고, 예수
믿음으로 이 세상이 터전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아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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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돈 때문에 예수를 판 가룟유다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돈 때문에 예수를 팝니까? 돈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고,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다고 합니까? 우리가 가룟유다를 향해서 손가락질 하기도 하지만 때로 우리가 가룟유다처럼 돈 때문에 예수를
팔 때도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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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신변의 안전 때문에 예수를 모른다고 대답한 베드로 같은
신자는 아니어야 합니다.
- 우리는 때로 신변의 안전 때문에, 죽을까봐, 위험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와 같은 때가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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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종교적인 교권 때문에 예수를 감옥에 가둔 가야바와 같은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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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정권유지 때문에 무죄인줄 알면서도 예수를 고발하고
반역자로 몰아 사형에 처하는 빌라도가 아니어야 합니다.
- "나는 아무 상관없다"고 했지만 자기의 권력의 힘을 포기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빌라도의 모습은 우리의 삶 속에서 없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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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직업에 충실하기 위해, 질서와 치안 유지를 위해 단지
명령에 따른 것 뿐 자신의 의지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할 수 있는 당시의 군인이 아니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군인들처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적은
없습니까?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 드렸던 것을 회개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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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겁에 질려 숨어 벌벌 떨던 제자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 우리는 때로 숨어서 벌벌 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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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의 탄생을 알고 찾아간 동방박사들은 왕궁에 가서
예수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어 버리고 아는 집과 친척에게서 예수를 찾아 헤맸습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들은 무덤에서 예수를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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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은 어디에서 예수님을 찾고 계십니까?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나려
합니까? 어디에 계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부활은 지금 우리의 현재적인 사건이요, 우리들 가슴 속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채 들어 있어야
합니다.
-
-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권력과 부와 명예의 상징인
성(城)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아름답게 치장한 당시의 성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삶의 현장, 사람들을 만났던 곳, 사람들이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땀흘리고 애쓰는 삶의 현장인 갈릴리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가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현장 갈릴리에
계십니다.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운 때에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이 우글거리는 우리의 생활 중에
부활의 주님, 승리의 주님이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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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끝... 하나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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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끝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끝이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끝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인간이 끝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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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이드 포스트]지에 킬링거 부인의 간증이
실렸습니다. 이혼한 지 만 1년이 되던 날, 그녀는 친구, 가족, 경제생활 등 모든 것이 먹구름에 싸여 정말 자살 일보 전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딸의 책장에서 딸의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숙제물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여덟 쪽인데 매 쪽에 한 살부터 여덟 살 때까지의 사진 한 장씩을
붙이고 자기의 삶을 기록한(설명한) 숙제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쪽에 End(끝)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의 글씨 옆에
담임선생님의 'Your beginning'(너의 시작이다)이라는 글씨가 'End'라는 글씨를 내리 누르듯이 크게 적혀 있었습니다.
- 이것이 킬링거 부인이 새 출발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여덟 살 난 아이가 사진 이야기의 끝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마흔이 된 자기도 결코 끝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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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믿고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여덟 살의 어린아이가 자신의 숙제에 "끝"이라고 썼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던 것처럼 마흔살이지만 내 삶은 이제 시작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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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지금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끝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이지, 하나님에게는 시작점입니다.
- 부활을 증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세상의
삶속에 빛되고 소금된 삶을 살려고 애쓰는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부활을 믿는 사람, 헛된 생활이 아닙니다.
- 부활을 믿는 사람,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 부활을 믿는 사람,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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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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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 이 거룩한 주일, 부활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 왕궁에 계시지 아니하고, 권세자들과 함께 앉지 않으시고
- 갈릴리로 가셨음을, 왜 가셨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 우리 삶에 오신 주여, 우리들 가슴 속에 계신 주여
- 믿음을 가지고 부활의 소망을 가진 우리들,
- 우리가 함부로 끝을 선언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 우리들의 삶 속에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주시는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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