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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 (1) "나와 함께 멍에를 메자!"
 
운명 - (1)
            "나와 함께 멍에를 메자!"
              (마태복음 11:28-30)

인간은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목숨이 붙어있는 한 요람에서 무덤까지 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적인 짐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분에게는 자녀 때문에 또 부모 때문에, 어느 분은 가난 때문에, 어느 분은 앞날을 위한 공부와 직업 때문에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합니다.  

그런데 이 운명적인 짐을 어떤 사람은 수고하며 무겁게 지고 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쉽고 홀가분하게 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8-30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운명적 짐을 지는 인생에는 세 가지 삶의 태도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운명에 맡겨 사는 태도입니다.
* 어떤 성도는 매일 손가락으로 집혀지는 말씀을 그날의 양식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눈을 감고 성경을 펴고 손가락으로 짚어 보니, "가룟유다가 예수를 팔더라"는 말씀이 나오더래요. 이상해서 다시 눈감고 짚어 보니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는 말씀이 나오더랍니다. '이건 아니야!' 생각하고는 다시 눈감고 짚어보니 "속히 하라"는 구절이 나오더라나요. 이렇게 우연에 운명을 맡겨서는 안됩니다.

* 또 어떤 목사님이 성경은 읽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그저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설교를 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주간의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설교제목과 내용을 열심히 기다렸지만 영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직 월요일이니까 하면서 수요일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하며 또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수요일 저녁까지 아무 영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목요일이 되었습니다. 역시 아무 설교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금요일이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하나님이 좀 늦게 주시나 보다 하며 또 기다렸으나 아무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금요일 밤 철야를 했으나 아무 설교도 생각나지가 않았습니다.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할텐데!" 하며 기다렸으나 밤까지 무엇을 설교해야 하는지 영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예배 전까지 주실거야!" 하며 기다렸지만 예배시간까지 아무 제목도 영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예배시간이 되었고 드디어 설교시간이 되었습니다. "단상에 올라가면 분명히 주실거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단상에 올라가니 정말 신기하게도 딱 영감이 내려왔습니다.
"애야, 설교준비는 미리미리 해야 하느니라!"  

이 우스운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되는대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해야할 것은 꼭해야 우리 인생을 재미있고 보람있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우들의 삶에도 하나님께 맡기고는 될대로 되라고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둘째는, 운명을 바꿔 사는 태도입니다.

백범 김구의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상놈의 집에 태어나서 과거에 합격하면 아버지를 출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김구 소년은, 열심히 서당에서 공부하였으나 번번히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당시에 부정이 많았고, 돈이 과거시험을 결정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상놈 김구는 합격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실망한 김구에게 하루는 아버지가 "풍수쟁이가 되거나 관상쟁이가 되면 밥은 먹고 살 것이라" 하여 그 말에 관상쟁이가 되기로 하고  마의상서 라는 책을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얼마 동안 공부한 후에 자기 얼굴을 그 관상에 비추어 보니, 천하에 흉칙한 상이었습니다. 가난, 살인, 풍파, 불안, 비명횡사, 감옥살이, 이런 것이 김구 청년에게 해당된다고 했으니 관상 책에 따르면 자기의 운명은 하지하(下之下)였습니다.
그래서 관상 책을 집어던지면서 한탄하였습니다.
"내 관상이 이 모양인데, 누구의 관상을 보아준단 말이냐?"
그런데 집어던진 관상 책 마지막에 이런 글귀가 보여 그는 정신이 번쩍 들게 되었습니다.
"얼굴 잘 생긴 관상(觀相)은 몸이 튼튼한 신상(身相)만 못하고, 몸이 좋은 것은 마음이 좋은 것인 심상(心相)만 못하다. 심상(마음)만 좋으면 관상(얼굴)이나 신상(몸)이 좋은 것보다 낫다."
이 구절에서 용기를 얻은 16세의 김구 청년은 어떻게 하여야 심상을 기를까 생각하다 이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자고 결심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교회학교 교사와 결혼하였고 감옥에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 예배도 드렸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바로 운명적인 삶의 태도를 탈피하고 민족의 이름으로 운명을 바꿔서 인생을 사는 모습을 가르친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님과 함께 운명을 일궈 가는 태도가 있습니다.

스티브 헤리스라는 목사님은 "아픔을 간직하고서"라는 글을 썼습니다.  
"아픔을 간직하고서"
"나의 아들 매튜는 태어나자마자 척추 파열로 인해 일시 호흡을 정지하는 까닭에 한시간에 한번씩 발작을 하였다. 호흡이 정지되면, 짧게는 15초 길게는 3분에 이르며, 죽음과 사투하는 아이를 볼 때 나는 마음이 너무 아파 하나님께 항의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교인은 80명 정도였고 나는 부임한지 6개월뿐이 안된 상태였다. 우리의 생활은 매튜의 일로 완전히 마비되었다. 언제 호흡이 정지될 지 몰랐고, 예배드리는 뒷좌석에서, 장난감 가게에서, 비행기안에서, 식당에서, 교인들과 상담하는 중에도 매튜는 계속, 계속, 또 계속 호흡을 멈추곤 하였다.
생각해 보면, 아들 매튜가 죽음의 문턱까지 간 적이 2,700번은 넘는 것 같다. 내가 처한 상태에 대한 분노로, 나의 감정 에너지는 고갈되었고, 활기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는 고통 가운데서도 축복을 주신다는 설교를 해야하는 위선을 느끼기도 했다. 절망과 분노와 고독감과, 교인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죄책감들이 뒤 엉켰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한 자세로 내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시인할 때, 그리고 하나님이 제공해 주시는 갖가지 도움들을 발견하여 활용할 때, 주의 사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고, 누구보다 훌륭하게 감당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내 아들의 호흡정지로 인해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교인들이 하나가 되어 완벽하게 협조하여 교회 일을 처리해 갔고, 격려하는 친구들과 더 가까워 졌으며, 이 일로 인해 욥기 등을 위시해서 말씀에 파묻혀 살게 되었으며, 고통받는 자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주와 함께 운명을 일궈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힘들게 살면서 신앙생활도 힘들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참 사는게 힘들고 목회가 힘이 들 때, 그 때 예수님은 함께 살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꼭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에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혼자 인생의 짐을 지지 말고 함께 지자고 하시면서 함께 멍에를 메자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첫째는 바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면 됩니다.
(마태 11:29)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이스라엘에서 소들에게 멍에를 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소 한 겨리는 소 한 쌍 두 마리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소 한 쌍에 서로 멍에를 메어서 밭을 갈게 하는데 거의 대부분 한 놈은 농사 경험이 많은 큰놈으로, 한 놈은 풋내기 작은 놈으로 멍에를 메게 합니다.
때로는 어미와 새끼소로 멍에를 메게 합니다. 그리고는 밭을 가는데 작은놈은 그저 큰놈이 음직이는 대로 음직입니다. 좌로 우로 그저 큰놈이 음직이는 대로 자기도 음직이면 아주 힘이 들지 않고 쉽고 가볍게 농사를 짓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멍에를 메라"는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큰 소에 붙은 송아지처럼 예수님에게 멍에를 메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에 예수님과 같이 멍에를 메고 우리의 삶의 밭을 갈아나간다면, 쉽고 가볍게 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멍에와 짐은 어떠하다고 했는가요?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바로 예수님처럼 멍에를 메면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멍에를 메고 힘든 짐을 지셨는데 어떻게 지셨을까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마태 11:29)하며
예수님은 온유하게 즉 따뜻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즉 낮은 자세로 멍에를 메신다고 합니다.
* 영국경찰이 어린아이들과 대화하는데 보니 무릎을 꿇고 어린 아이의 키에 맞춰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그러합니다. 우리 인생의 밭을 함께 갈아주시는데 우리의 높이에 맞추기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분명히 그 멍에의 높이가 다르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냉냉한 이 세상을 온유하고 따뜻하게,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키높이에 맞추기 위해서 낮고 낮은 자세로 멍에를 메고 일하십니다. 그러니 그 일이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소가 멍에를 메는데 두 놈 다 큰 것으로 하면 서로 댕기고 서로 밀어내기 때문에 농사가 잘 안됩니다. 그래서 작은 소와 큰 소를 붙여 멍에를 메는데, 이때 작은 소는 자기를 철저히 부정하고 고집 부리지 말고 큰 소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의 짐은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이 져야할 운명적인 짐은 누가 뭐라고 해도 무겁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길을 편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과 멍에를 함께 메는 일은 십자가 고난의 가시밭길이요,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미워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일에 나선 사도들은 자신의 고난에 찬 역정을 피력하면서도 "그 모든 힘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함께 이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편하고 가볍게 살면서 신앙생활도 편하고 가볍게 할 수 있는 비결은 세상의 목에 걸려있는 운명적인 멍에를 벗어놓고 예수의 멍에를 메고 배우며 함께 더불어 손잡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고 쉽고 평안한 인생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  다 내게로 오라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