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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우선 순위 (마태복음 6장 25절-34절) 오늘날을 ‘가치관 혼돈의 시대’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우선 순위를 바르게 정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순위란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정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올바른 우선 순위를 따라 살아가는 삶 속에 있습니다. 반대로 불행은 우선 순위를 혼동하는 것에서부터 인생의 불행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우선 순위를 바르게 정하지 못한 사람들은 허무한 일에 귀중한 인생의 날들을 허비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잘 정돈된 가치관을 가진 인생, 즉 삶의 가치관이 분명한 사람, 삶의 우선 순위가 분명한 사람은 그 삶이 넉넉하며 혹시 삶의 위기가 닥쳐올지라도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방향과 가치관이 분명히 서 있다고 한다면 어떤 위기에서도 담대하고 넉넉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때로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일들 때문에 인생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인생, 가치 있는 인생은 그저 시간을 따라 바쁘게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인생의 올바른 가치관과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하는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크리스천은 무엇이 인생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 삶의 가치관이 분명히 세워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즉,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가치 있는 인생이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궁극적인 가치에 인생의 우선 순위를 두고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어떻게 삶의 가치관과 우선 순위를 분명하게 세우고 살수 있을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따라 잠시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염려를 버려라 27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염려 자체가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비생산적인 것이며 때로는 그 염려가 우리의 인생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염려함으로 나아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다 커버린 성인의 키를 크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해결될 없는 일에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의미 없는 걱정, 해 봐도 소용없는 걱정에서 해방되라는 말씀입니다. 염려 자체는 우리 인생에 전혀 생산적 도움을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제시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염려’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merimnao-메림나오’ 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은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merizo-메리조(나누다, 분리하다)와 nous-누스(마음) 그래서 염려한다는 말의 본래의 뜻은 ‘마음을 나눈다’라는 뜻입니다. 염려란 마음을 분산시키는 일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지면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음으로 기대하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염려의 가장 큰 부작용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8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의 집에 초청 받아 들어가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소망이고 생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을 초청한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밖에서 여러 가지로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다’의 봉사를 잘못된 것으로 해석하면 큰 잘못입니다.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 수고하는 ‘마르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문제가 무언가 하면 봉사를 하다가 그만 지쳐서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마리아’는 나를 도와주지 않고 무엇을 하는가? 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지 우왕좌왕 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르다야 너는 너무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구나”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몇 가지만 하든지 차라리 한가지만 하는 것이 어떠냐? 꼭 필요한 일 한가자만 하거라” 그렇습니다. 나누어진 마음으로 여러 가지 일에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황하기 보다 한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이 생산적인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나누어진 마음으로 염려하는 일은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는 우리의 생각을 분산시킬 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감하게 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신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31절-32절의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衣食住의 문제 이것은 이 땅 위에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나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의식주의 문제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관심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자체는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의식주의 문제를 거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선 순위의 문제를 거론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정도의 염려는 극복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때문에 염려하고 방황하는 인생 이것은 이방인들-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의식주의 문제는 모든 것의 으뜸입니다. 삶의 전부입니다. 지금 이 나라의 모습을 잘 보십시오. 먹기 위해 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온통 사람들의 생각이 어디가면 잘 먹을까? 하는 생각만 있는 것 같습니다. 한해 음식 쓰레기가 8조원이 넘는다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그뿐입니까? 입는 것은 어떻고요. 바자회 때문에 천안에서 옷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작년이 비해서 별 것 없지만 집안마다 옷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고 철이 되면 옷을 또 삽니다. 집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의식주가 시작이 아닙니다. 의식주가 전부가 아닙니다. 의식주보다 우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의식주를 해결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 핵심,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면 우선 순위는 저절로 세워지는 것입니다(사냥하다 실족한 왕자를 구해준 나무꾼의 지혜).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하는 염려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방황을 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이 문제로 똑같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며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의 짐의 무게에 눌려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면 도대체 예수 믿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 된 의미가 어디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그 분은 나의 아버지시다’ ‘그 분은 나의 주님이시다’라는 우리의 고백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신앙이 염려에서 우리를 해방할 수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 염려를 극복할 수 없는 신앙이라면 신앙의 의미가 어디 있습니까? 염려를 멈추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궁극적인 가치에 인생의 우선 순위를 두고 살기 위해서 염려에서 자유로와 지시기를 소원합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하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주님은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비유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핵심은 바로 인간이 염려하는 그 바탕에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8절 마지막 부분을 잘 읽어보시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누구를 향해 쓰신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염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 염려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인생의 가치관을 바르게 정하고 살지 못하는 이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 날마다 절망을 끌어안고 낙심하는 이유들이 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본다고 하면서 평안이 없는 이유가 다 무엇입니까? 믿음이 적어서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그것은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교양과목 선택과목일 뿐입니다. 염려가 필수과목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우선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참새와 물새의 대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청교도들이 자기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 한 이야기입니다. [물새가 참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기 지나가는 사람들 봐라. 밤낮 염려하고 걱정하고 허둥대고 사는 모습을 봐라’ 그러니까 참새가 물새보고 말하기를 ‘쟤들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없는 모양이지?’] 우리의 인생이 우선 순위가 바르게 정해진 인생으로 바른 가치관과 올바른 삶의 방향을 가지고 살려면 하나님은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나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 분은 오늘 이 시간도 분명히 살아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섭리하십니다. 그분은 내 인생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나쁜 상태를 있게 하시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늘 여러분 곁에 동행하시고 여러분을 지키시고 여러분을 도우시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 합니다. “너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여기서 권고하신다는 말씀은 ‘care한다.’ ‘주님이 돌보아 주신다.’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분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여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신뢰감이 떨어졌을 때,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기억도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의 경험에 비추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십시오. 주님께서 다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돌보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아무리 큰 삶의 위기와 시련의 폭풍우가 닥쳐올지라도 “하나님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나의 주인 되시고 나의 구원이 되시고 나의 능력이 되시는 주님을 내가 믿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책임져 주시고 돌보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창조주를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이 믿음이 충만하다면 우리의 인생은 진정으로 가치 있게 또 능력 있게 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3.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내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시기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지금 염려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다스리시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중심에 계시기를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염려할 수밖에 없고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 속에서도 염려는 주께 맡기고 주의 다스리심을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를 다스리신다. 주께서 나를 인도하신다. 주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다스리심으로 하늘의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친다면 이 세상의 그 무엇을 다 소유하고 산다고 해도 그는 불행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구원의 문제입니다. 영생의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기념비를 수십 개 세워놓는다고 할지라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영원한 시간을 지옥에서 보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로 정결하게 되면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천국, 영생의 축복이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은 행복을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 외에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가 더 있겠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삶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 생애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오늘은 무엇을 하며 살까요?”라고 하나님의 뜻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 34절의 말씀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오늘이 귀중합니다. 오늘 이 순간 내 생애에 가장 중요한 것, 하나님께서 나를 통치하시는 삶, 지금 이 순간도 주께서 나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께서 기뻐하시는 그 삶을 위해 내 인생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살 때, 우리의 인생은 가치 있고 행복한 승리의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의지, 우선 순위를 바로 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의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들이 쓸데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저 들의 풀도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저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땅속 깊이 뿌리를 박고 영양분을 흡수하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나태하게 만드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적극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긍정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온전한 신앙이란 삶에 최선을 다하게 만드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지금 이 시간 우리 인생의 우선 순위를 바르게 할 때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의지를 가지고, 우리 인생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하나님으로 정함으로 고난과 시련의 폭풍우 속에서도 불꽃같이 빛나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