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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마2:13-20

 

사도신경에서 고백하고 있는 믿음의 내용은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인 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사함의 중요성과 부활, 영생이 있다는 것과 그것의 중요성에 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의 내용 가운데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가장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신앙내용 가운데 예수님의 위치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고, 이것으로 인하여 수많은 교회의 회의들이 있었습니다. 회의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하는 문제들이었습니다. 그 회의가 니케아 회의(325),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에베소 회의(431), 칼세돈 회의(451) 등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1980년 독일의 뵐머슨에 있는 새생명 센터에서 열렸던 유럽 복음주의 신학자 협의회의 주제도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 기독론에 대한 현대의 도전들"이었습니다. 현대에도 이러한 주제로 논의가 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하는 주제가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고,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 지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첫 번째로는 이름의 중요성, 두 번째로는 예수님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 주라는 이름의 의미, 세 번째로는 예수님과 우리와의 연관성 문제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름의 중요성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 지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성경에 나타난 이름의 중요성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름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계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나 대상을 알리는 수단이요 매체입니다. 사람일 경우에 이름을 통하여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합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쓰는 이름의 기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이름의 기원에 대하서는 문헌을 찾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럽 사람들의 이름이 나타난 것은 불과 2-300년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독일의 축구 선수였던 프란츠 베켄바우어(F. Beckenbauer)라는 이름은 항아리 굽는 사람의 프란츠라는 뜻입니다. 독일의 옛수상인 헬무트 슈미트(H. Schmidt)라는 이름은 대장장이 집의 헬무트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직업에 따라서 구별하기 위하여 지은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귀족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성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어 불렀습니다. 그들은 이름 앞에 "…출신" 또는 "…의 성 사람" 영어로 from인 van(화란), von(독일), De(프랑스)를 붙였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아는 악성 베토벤의 이름은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인데, 화란계 귀족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이름은 베토벤 성의 루드비히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금세기 최고의 지휘자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은 카라얀 성의 헬베르트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름은 단순하게 사람을 구별하기 이름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름은 단순히 구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성경에 이름이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담과 하와인데 아담은 남자 또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와(히. ࠄࢯࣉ)는 아담이 지은 이름인데 그 이름의 뜻은 "생명있는 자의 어미"라는 뜻입니다(창3:20). 이 이름은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에 하나님의 벌과 약속을 받은 후에 지은 이름입니다. 아담이 이 이름을 지은 것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게 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이름이었습니다. 그 후에 아담은 아벨이 가인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은 후에 낳은 아들의 이름을 셋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을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창4:25)는 뜻으로 불렀습니다. 이러한 이름의 뜻은 역시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구원자를 보내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지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처음으로 사람이 이름 지은 것을 보면 그 이름에 의미를 담아 지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을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을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출2:22)는 뜻으로 불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나라의 이름도 그 이름에다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짓는 것과 비슷한 연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이름은 아담이나 모세와 같이 사람들이 지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표현하거나 자기의 소망을 담아 지은 이름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시거나, 사람의 이름을 바꾸라고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려는 계시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히. ࠄࠅࠄࠉ)라고 알려 주실 때에는 "스스로 있는 자"(출3:14)라고 알려 주시고,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실 때에는 특히 이 이름으로 말씀하셨습니다(출6:2-9). 우리가 앞에서 연구한 "전능한 하나님"(히. 엘 샤다이 ࠉࢆো ࠌࡑ)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시고 그 뜻대로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특히 선지서에 자주 나타나는 이름인 "만군의 여호와"(히. 야웨 처바오트 ࠛࢫࠀ࡚অ ࠄࠅࠄࠉ)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 이름은 온 우주와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계시하시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하신 일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인데, "높은 아버지" 또는 "높임을 받는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뜻은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이름을 주신 후에 창세기 17:6에 보면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지금은 자녀가 없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후손을 통하여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 이름으로 바꾸어 주신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주셔서 큰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이 이름에 담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이름을 연구할 때 두 가지 방향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한 방향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이름을 알려 주시거나, 사람들의 이름을 바꾸게 하셨을 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알리는 계시적인 수단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한 방향에서는 사람이 이름을 지어 부를 때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름으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기울이고 보아야 할 이름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름입니다. 이것은 이 이름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2. 이름의 의미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역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계시하시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이 점을 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의 뜻을 이해하므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더 많이 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 예수

예수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여호와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이 이름이 여러 번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호세아, 예수아라고 번역된 말이 모두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흥미있는 부분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1세기경에 대제사장 가운데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다섯 명이나 있었고, 그 외에도 20여명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이름들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구원을 앙망하며 지은 이름인 것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 자체는 그렇게 독특한 이름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를 통하여 이름을 "예수"(헬. הՇՏՕՒ)라고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기사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18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요셉과 그와 정혼한 마리아가 결혼하여 동거하기 전에 처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끊으려고 할 때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천사는 말하기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0-21)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알려주시고, 그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의 뜻은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이 사건 뒤에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것은 예수라는 이 이름으로 태어나실 분은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역사상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분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적 실재 인물인가, 아니면 신앙의 대상으로 신격화시킨 인물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역사상 실제로 존재하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많은 목격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들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후에 영지주의라는 이단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완전히 환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요한1서에서 "눈으로 본 바와 손으로 만지 바요, 귀로 들은 바라"(요1서1:1-2)고 하였습니다. 요한의 이 주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역사적 인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을 부를 때 우리 인간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믿는 예수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메시야입니다.

(2) 그리스도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헬라어이고, 이 말의 히브리어는 "메시야"(히. ࣉࠉৌन)입니다. 이 이름은 "기름을 붓는다"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왕(삼상9:16; 10:1; 삼하19:10), 제사장(출29:7; 레4:3)과 선지자(왕상19:16; 시105:15)를 임명할 때 기름을 머리에 부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 드려진 자에게 성령주심을 나타낼 때에 기름을 붓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메시야가 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임명을 받고 하나님께 드려진 자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메시야가 오시면 완전한 나라를 건설하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메시야를 정치적 메시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는 나사렛 사람,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어떻게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가 어떻게 십자가에 죽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1:23). 하지만 신약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때부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요1:41; 막16:16).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리스도, 곧 메시야라고 하셨습니다(마16:7, 20; 막9:41; 눅24:26, 46).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전 한국신학대학의 안병무 박사는 "그리스도는 사랑을 의미한다. 사랑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지어서 말한 것이 아니고 초대교회에서부터 있었던 영지주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구분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하는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그의 유명한 책 "역사적 예수의 탐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라는 책에서 예수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신앙의 그리스도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메시야로서 공적으로 나타나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선포하고, 지상에 하늘 나라를 설립하고, 자신의 사역을 죽음으로 성별시킨 나사렛 예수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합리주의에 의해 설계되고, 자유주의에 의해 생명이 부여되고, 현대신학에 의해 역사적 옷을 입은 인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고 하였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의의는 예수의 역사성에 있지 않고 그 정신에 있다고 말하므로 역사적 예수가 종교에 장애가 된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슈바이처는 결국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예수의 정신"에서 절대적인 진리를 찾은 것입니다. 그의 생애가 봉사적이고 희생적인 것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그의 이러한 신학적인 영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고 해서 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영지주의 사상에서는 그리스도가 더 이상 하나님의 유일하신 독생자가 아닙니다. 대신에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의식의 상태를 알려주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그 목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음으로 사람들 자신이 "그리스도들"이 되거나, 혹은 "그리스도 의식"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신과 삶을 모방하면 그가 곧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입니다.

(3) 주

"주"라고 하는 의미는 성경에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절대적인 충성의 의미로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종이 주인을 부를 때, 그리고 백성들이 왕을 부를 때 사용되었습니다(마8:2; 20:33; 막7:28). 두 번째로는 소유권과 권위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막2:28; 마11:3; 24:42). 예수님이 주라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개념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주"의 개념이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데서 잘 볼 수 있습니다(행2:36; 고전12:3; 빌2:11). 특히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에 설교의 결론을 맺으면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2:36)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온 세상의 주가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주의 개념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의 주가 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구속"이라는 용어는 원래 상업적인 용어인데 값을 주고 산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노예를 돈으로 사고 팔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 노예가 죄를 지어 죽게 되었을 때 착한 사람이 사서 풀어주면 그는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지불한 돈을 가리켜 "속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속전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시고 우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단순히 세상의 주인 개념처럼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기의 피로 구속하셔서 우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 주님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모든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다 복종케 하실 것입니다(빌2:10-11).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의 만물을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3.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두 가지의 연관성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사도신경,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자기의 소유를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에게만 순종하고, 그에게만 삶의 우선권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는 것은 믿는 사람들만의 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주요 모든 만물의 주요, 역사의 주요, 학문의 주요, 우리 인생의 주가 되십니다(빌2:10-11).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섬기지 않으면 안됩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섬기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적인 사역을 거의 마감하시고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하는 곳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유명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관점에 따라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볼 때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엘리야로, 세례 요한으로, 예레미야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이해할 때 자기의 관점에 따라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믿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이렇게 믿는 자에게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본문은 로마 카토릭과 이해하는 관점이 다릅니다. 로마 카토릭은 초대 교황으로 이해하는 사도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질 것이고, 그 교회가 천국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토릭은 교황권이 절대적이고, 면죄부와 고해성사같은 부정부패가 여기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에 대한 해석 때문입니다. 이 본문에서 베드로의 이름의 의미는 "반석"입니다. 반석은 헬라어로 "페트로스"(헬. ՐՅՔՑՏՒ)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름은 남성 단수 명사 페트로스(헬. ת ԰ՅՔՑՏՒ)이지만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리라고 한 베드로의 의미인 "반석"은 여성 단수 명사인 "테이 페트라이"(헬. Քذ ՐՅՔՑ؛)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워 교황이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이고, 그 신앙고백을 하는 자가 천국의 열쇠를 가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만약에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고,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면 반석은 남성, 단수 명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졌거나,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이고,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가 결정될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무엇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만 섬기고, 예수님에게만 삶의 우선권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그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산다면 음부의 권세가 결코 틈타지 못할 천국의 열쇠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천국의 열쇠를 통하여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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