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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호세아서 6장 1절-6절 설교자 : 성홍모 목사, 영주교회
저는 지금 진행 중에 있는 제24회 용산연합성경학교에서 호세아서를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호세아서라는 성경은 구약의 12소선지서 중의 한 권입니다. 이들 12소선지지서를 기록하신 선지자들이 에언자로서의 활동이 모자라서 소선지서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 12명의 소선지자는 저들이 남겨놓은 책의 분량이 이사야,예례미야, 에스겔, 다니엘 같은 대선지서처럼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활동량이 적어 소선지자가 아니고, 다만 책의 분량이 적다는 것으로 소선지서로 분류된 것입니다. 호세아라는 선지자의 이름의 뜻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잇사갈 지파의 사람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나서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왕 여로보암 2세 때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는 주전 721년 이후까지 활동하였으니 그의 사역의 기간은 60년이 넘을 것으로 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같은 선지자가 나와서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것과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이스라엘은 더욱더 패역해져 갔습니다. 호세아가 부름을 받을 당시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인 여로보암2세는 전성기를 보낸 왕으로 막강한 경제력과 국력을 바탕으로 해서 강력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여로보암이 죽고 나자 계속된 왕위 찬탈로 국력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는 6개월 간 왕위에 있다가 살룸이라는 사람에게 왕위를 배앗겼습니다. 그러나 살룸은 1개월 간 왕 위에 있다가 므나헴에게 암살당하였습니다. 므나헴은 10년간 왕위에 있었고, 그의 아들 브가히야는 2년간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호위대장인 베가의 손에 죽었습니다. 베가는 20년간 왕위에 올라 통치를 했지만, 그져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수리아와 동맹을 맺어 남왕국 유다를 쳐서 12만명을 죽였고, 20만명을 포로로 잡아오다고 풀어주었던 잔인한 사람입니다. 이 베가는 또 호세아라는 사람의 반역으로 죽었고, 마지막 이스라엘의 왕은 선지자 호세아와 같은 이름의 호세아였습니다. 호세아는 그의 재위 9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때가 주전 721년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253년간의 역사가 막을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에서 많이 일으키셨습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신구약 성경의 최고 선지자입니다.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돌아서지 않으니까 남쪽 출신은 아모스를 북쪽으로 보내서 외치게 하셨습니다. 선지자 아모스가 그렇게 지적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신앙은 정말 심하게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형식적이나마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던 것마져 잊어버리고, 우상 숭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이나, 이방인이나 전혀 구별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 좇기를 그쳐버렸습니다. (호4:10) "저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행음하여도 수효가 더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 좇기를 그쳤음이니라 " 이때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보내셔서 최후의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호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오죽 했으면 하나님이 친히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까지 말씀하셨겠습니까? 이렇게 한탄하시고 한탄하시다가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야 맙니다. 호세아서의 근본적인 의도는 타락한 호세아의 아내 고멜의 죄악상을 노출시키려는데 있지 않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는 것으로 그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선지 호세아는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호세아의 가정을 들어서 하나님의 말씀하시려는 뜻을 계시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나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는 여성을 데려와 아내를 삼았습니다. 이 여성은 음란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래도 호세아에게 와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하신대로 그 첫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땅의 지명인데,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은 곳입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을 섬기다가 징벌받은 아합 왕과 왕후 이세벨을 죽인 곳이 바로 이스르엘 골짜기였습니다. 호세아의 아들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하신 것은 조금 후에 이스르엘 골짜기에 흘린 피를 다시 예후 왕가에게 갚으며 이스라엘의 나라를 폐할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날에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꺽어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호세아는 다시 딸을 얻었습니다. 딸아이의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지었습니다. 그 뜻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로 "로루하마"라는 이름을 주시므로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시고 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후에 호세아는 고멜을 통하여 로암미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로암미"라는 이름의 뜻은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많은 지도자들이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바알이라는 뜻은 소유주, 주인, 남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래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주인은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이스라엘을 소유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은 마치 남편과 아내와 같이 영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남편은 하나님이시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바알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첫번째, 두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출20:3-6)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 고하셨습니다. 당 시대는 이교문화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정조를 지키려고 아니하고 이교와 타협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혼합주의라는 것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이교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문화에 젖어드는 것은 음녀의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가 타협주의 빠지고, 이교화 되면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 윤리도덕의 타락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 한분만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교도들은 신을 양성화 합니다. 그래서 남신을 섬기고 여신도 섬기게 됩니다. 무슨 신이라는 존재가 남신이 어디에 있고, 여신은 또 무엇입니까? 사람들이성적인 생활하는 것을 연상해서 남신과 여신도 성적인 결합을 통해서 인간에게 비를 내려주고, 풍요를 가져오고, 번영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남신 바알과 여신 아세라의 신전에는 신전이 아니라 온통 매음굴이었습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라는 여성은 이스라엘의 타락한 모습이요, 모형이었습니다. 바람끼가 많은 여성이었습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려면 고멜을 통하여 읽어보라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순결하지 못하였던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아이 셋을 낳더니만, 다시 결혼의 순결을 깨뜨려 버리고 바알신전의 매음굴에 들어가버렸습니다. 다른 남편을 따라갑니다. 다른 주인에게로 갔습니다. 자기가 지켜야하는 위치를 벗어나 더욱 타락의 자리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 같으면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나 집을 떠나 버렸다고 하면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이혼 처리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든다고 할 것인데, 하나님은 근심에 빠진 호세아를 부르십니다. 가서 아내를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가 된 여인 고멜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가서 여자를 찾아오려고 하니, 여간한 돈이 드는것이 아닙니다. 타락은 점점 더 무서운 타락을 가져왔고, 연애를 받아 따라갔던 아내는 어느 새 남의 종이 되어 엄청난 빚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은 열다섯개와 보리 한호멜반으로 저를 사서 도루 찾아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내에게 타이릅니다. "당신은 많은 날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신신당부 합니다. 호세아서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다시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을 주제로 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자신의 찢긴 심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의 가정은 처음부터 불안하였습니다. 그의 가정 생활을 얼마 못되어 파괴되었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의 배신으로 참을 수 없는 번민에 시달려야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민족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아내와 같이 따뜻한 사랑으로 인도하고 돌보아 주시고 있었습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메시를 전하는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외치기를 "우리의 오직 살길은 하나님앞으로 돌아오는 길뿐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쟁변하시고 있습니다. (호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라고 하셨습니다. 진실이란 진리인데 이스라엘에게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또한 인애가 없었습니다. 인애란 자비요, 친절이여 사랑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하는 깊은 지식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관한 정도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관한 정도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 여기서 호세아는 단호하게 말씀하였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스라엘은 지식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그 지식을 버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아예 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 조차 거절하여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번성할수록 하나님을 떠나고있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옵니다. 1. 오라 여호와께로 돌아가자(1절)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 이것은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즉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호세아를 포함한 하나님을 떠났던 전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의 특징은 "우리"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너"만을 강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나'는 아니고 '너'만 돌아오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있는 성목사도 부족하고 연약하였습니다. 오세요, 우리 모든 성도들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가야하는 길이 정해졌습니다. 우리의 가야할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누구에게로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호6:1)" ----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상하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살리시기만 하시고, 낫게만 하시고, 싸매어만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무골호인으로, 사랑만 강조하기 때문에 개신교회들은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사랑의 노래만 듣고 심판의 선포를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만을 강조하고 사랑의 노래를 듣지 못한다면 이 또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2) (호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 하나님은 이틀 후에 삼일 후에 우리를 살리시고, 일으켜주시고 싸매어주십니다. 이 말씀은 조속히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이 일루어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의미를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때를 따라 알맞게 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돌아오자 마자 그 아버지는 잔치를 벌이고 아들을 맞아주시고 있습니다. 며칠 후에 날 잡아서 잔치하겠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날로 짐승 한 마리 잡고 풍악을 울리고 사람을 모으면 가장 기쁜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참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즉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눈동자 아래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근원이신 우리주님과 함께 산다는 뜻입니다. 은혜의 품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3)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 1절은 돌아가자, 2절은 그 앞에서 살자, 3절은 여호와를 알자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성숙한 세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돌아가는 회개의 단계, 두번째 단계는 그와 함께 사는 생활의 단계, 마지막 가장 성숙한 단계는 그를 아는 체험의 단계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지식이 아니라 이것은 신앙입니다. 안다는 말은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요, 동시에 결혼생활이나 부부관계를 통하여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깊이 아는 것입니다. 수박 겉큪기 식으로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몸부림치면서 기도하는 중에, 온 밤을 새워가며 성경을 공부하는 중에, 어려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붙드는 중에 체험하는 지식이어야 바로 산 지식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엄위하신 진노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진노하실 수 밖에 없는 중에도 마침내 아들로 인하여 사랑하시고야 마는 그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때리시는 매를 맞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때 바로 하나님을 깊이 아는 신앙입니다. 우리 자식들을 때리기도 하고 매를 듭니다. 이것을 사랑으로 알고 고맙게 받아들이는 자식이 있다면 그는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품만 생각하고 집을 뛰쳐나가는 자식이라면 사람 못될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노하시는중에도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이들은 참으로 좋은 성품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매초리에 놀라고 이래서는 살길이 없다고 생각하시고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를 때려놓고서 그상처를 어루만지시면서 싸매어 주시고 치유하시고, 낫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의 부모님들도 저의 형제들이 어렸을 때 매를 드신 적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교편을 잡으시는 아버님이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사실 아버님은 대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여러 형제들이 있다보니 자연 싸우기도 하고 혼날 일을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호되게 매를 들고 때리십니다. 하루는 아우가 잘못하여 혼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빨리 잘못했다고 하면 좋겠는데 얻어 맞으면서도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나서 말리며, "얼른 잘못했다고 말씀드리라"고 합니다. 그래야 매를 멈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우리 부모님들이 저희들을 끔찍이 사랑하신 것입니다. 자식을 키워보니 어른들의 사랑을 조금이나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는데 "힘써" 알라고 하셨습니다. "힘써"라는 말은 "달음질 하여 따른다"는 뜻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까? 그의 나오심을 새벽 빛같이 일정하기 때문입니다. 새벽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류의 영원한 빛입니다. 빛이 일정하다는것은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진리의 빛입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하는 것은 이른 비처럼, 때로는 늦은 비처럼 은혜의 단비를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하나님의 영적인 복이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이른 비도 내려주시고, 때로는 늦은 비도 내려주시고 있습니다. 현 싯점에서 우리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상태를 점검해야합니다. 요즘에 자기 부족을 느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잘못했습니다. 나는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없다고 합니다. "다 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만이 가장 우수하고 잘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먼저 회개하고 돌아가자고 하셨습니다. 금년 한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두번째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아이작 뉴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람으로 보여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 자신은 해변에서 노는 소년같이 예쁜 조개 껍질을 들고 즐거워 하는 것과 같은 생을 살고 있다" 사실 노년에 아이작 뉴턴은 기억 상실증에 빠져서 모든 것을 망각 속에 던져버렸습니다. 그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그의 나이도 몰랐습니다. 답답해하던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선생님이 알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다만 아는 것은 두가지인데 나는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내 구주시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힘써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내어주시면서 용서하시고 사랑하실 수 밖에 없으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포로가 되어 사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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