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을 존경하라
베드로전서 2:17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리고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을 흔들리지 않는 가치 위에 세워 가기 위해서 오늘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존경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우리가 무례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점점 세상은 무례한 행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일이 점점 드물어 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뿐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기관에 대해서도 심지어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자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경애심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요즘은 그런
풍조를 점점 더 찾아보기 힘든 세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오히려 정부의 지도자나 사회의 지도층을 풍자하는 것을 즐기는 세상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건전한 가정과 안정된 사회가 세워져 가기 위해서 존경심이 사회 전반에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무엇보다 부모를 존경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십계명 가운데 제 오 계명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첫 계명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명하고 있는 계명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첫째 자리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십계명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고 명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부에
봉사하는 사람들, 국방에 종사하는 사람들, 공공 기관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성경은 또한 교회의 지도자들을
존경하라고 명합니다.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히 13:17)고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우리를 인도하던 자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지금 인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도록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은 부부가 서로 존경하도록 명합니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을 존경하고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남편들도 자기 아내를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존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베드로 전서 2장 17절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람을 존경하라"고 명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기에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적절한 존경심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도록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누구나 존경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먹고 싶어하고 자고 싶어하는 욕구만큼이나 기본적인 것입니다. 신체적인 욕구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 받고 사랑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고, 존경하고 존경받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함부로 대하는 대신 예의를 갖추어 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왜 우리는 먼저 다른 사람들을 존경해야 하는지 네 가지 이유를 잠깐 살펴봅시다. 한 사람의 생활 스타일이
어떠하든지, 행동이 어떠하든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결단을 내리든지 어떤 신앙을 가지든지 상관없이 성경은 모든 사람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모든 사람을 존경해야 할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8편 5절은 증언합니다. 주께서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고 동시에 존귀와 영광으로 관을 씌우셨다고 증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고상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을 받은 존재이며 존귀와 영광을 관 씌우셨고 하나님을 대리해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으로서 하나님께서 존귀와 영광을 덧입혀 주셨다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하나님은 한 사람도 쓸모 없이 비천하게 만들지 아니했습니다. 무가치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무가치한 짓을 하는 사람이 종종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전혀 사랑스럽지 않는 사람까지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존경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주님은 모든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주고 값을
치룰 만큼의 가치를 우리 안에서 보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18, 19절은 증언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값을 지불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과시된 장소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드러내셨습니다. 믿지 않고 거부하고 불순종의 길을 걷는 자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가치 있게 여기시고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존경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나타내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일서 4장 8절은 말합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무엇을 말합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사랑할 줄 모르고 친절하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닮았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긍휼하게 여기는 인생을 불쌍하게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사람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람들을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비록 저주받을 행동을 하고 있는 순간까지라도 용서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충만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사신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하셨듯이 사람들을 대할 것입니다. 가치 있게 그리고 존귀하게 대할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이 좋은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학습을 받고 세례를 받은 기간이 오래되면 좋은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까?
산삼은 오래 묵을 수록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신앙은 그렇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신앙이 좋아지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을 존경하게 됩니다. 신앙의 첫 번째 테스트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우리의 신앙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5절은 말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례하다는 것은 상대방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무례하다는 것은 여러분에 대해서 상관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상처를 입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든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화나게 하는 무례한 일은 무엇입니까? 어떤 일을 여러분은 무례한 일로 여깁니까? 전화를 걸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누구세요?"라고 묻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길이 막혀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크락숀을 울려 대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그런다고
막힌 길이 열리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금연이라고 지정된 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남의 얼굴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뱉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예배 시간에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해도 신경을 쓰지 않는 부모는 무례한 사람입니다. 예배가 전부 끝나기도 전에 일어서
걸어나가는 사람도 무례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존경해야 할 네 번째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이 갚아 주기 때문입니다. 가는 대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 원하면 다른 사람들을 먼저 존경하십시오. 대우받기를
원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면 먼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미소를 짓기를 원하면 여러분이 먼저 미소를 보내어
보십시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리는 여기에서도 통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존경해야 하는지 다섯 가지 실제적인
방법을 살펴봅시다. 첫째는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에 사실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실을 어떻게 재치있게 말할 것인가 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통로는 우리의 말입니다. 물론 표정으로도 나타낼 수 있지만 말은 더 분명한
방법입니다. "따뜻한 말은 생명 나무와 같고 가시 돋힌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잠언서 기자는 15장 4절에 관찰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말은
생명 나무와 같고 사람들을 소생시키고 사람들을 새롭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가시 돋힌 말은 사람들을 찌른 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만큼 중요합니다. 말하는 방식에 따라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거부당하기도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억양에 따라서도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치 있게 적절하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의 윤활유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삶에 중요합니다. 적절한 말은 행복한 결혼 생활의 열쇠입니다. 행복한 가정 생활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교우 관계나
사회생활에도 적절한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재치 있게 말한다는 것은 생각하지만 모든 것을 말로 내뱉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점은 살리면서 입장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 않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제는 바꾸면서 마음은 바꾸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랑 가운데서 진리를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무례한 것과 솔직한 것을 혼돈합니다. 솔직한 것과 무례한 것은 서로 다릅니다.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른 말은 해야 한다"라고 큰소리치는 사람들 중에는 목숨을 걸 만한 중요한 일도 아닌데 무례하게 나오기도 합니다.
종종
듣는 사람의 기분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행동하는 무례한 경우를 우리는 봅니다. 듣는 사람의 기분보다는 말하고 싶은 자신의 기분이 중요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전부라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결코 솔직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무례한 행동일 뿐입니다. 그런
태도는 솔직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모멸하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진리를 말하기를 원하면 다른 사람을 존귀히 여기며 존경심을 가지고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솔직한 사람입니까? 솔직하게 말하고 싶을 때마다 "왜 나는 이 말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자문해야 합니다. 듣는
사람을 세우게 될 것인가 넘어뜨리게 될 것인가를 질문해 보십시오. 이웃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상대방을 비난하고 결과적으로
파멸시키려는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솔직한 말은 한다고 하면서 여러분은 자기 기분만 중시하고 화풀이를 하지 않는지 심지어는 그렇게 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을 때 나는 그 사람을 잘 이해 해 줄 필요가
있지 그 사람에게 당당하게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제시하는 것은 그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섬길 때 여러분은
어떻게 그들을 대합니까? 여러분의 사람됨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음식점에 갔을 때 여러분에게 봉사하는 사람들, 사업체에서 여러분이
고용해서 일을 맡긴 사람들, 여러 가지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에게, 집에서 남편에게,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여러분은 그들을 이해하는 사람입니까?
당연한 권리로 요구하는 사람입니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1). 다른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나온다고 해서 여러분이 대단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길을 양보해 주는 사람을 향해서 손을 들어 감사를 표시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비천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지적하듯이 무례함은 연약한 자가 강한 자를 흉내내는 것일 뿐입니다. 마땅히 표할 예의조차
나타내지 않고 지나 간다고 해서 굉장한 인물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사실 무례한 것을 배우는 데는 노력도 필요치 않고 아이큐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을 명령하는 대신 이해하는 일에는 고도의 인격과 성숙과 능력이 요구됩니다. 섬김의 비결은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음식점에 갔을 때 종업원들에게 대하는 모습은 여러분의 사람됨을 나타냅니다. 식당의 종업원을 대할 때 그녀가
불친절하더라도 그녀가 받는 많은 스트레스를 이해해 주십시오. 어쩌면 집에 가서는 세 아이의 어머니 노릇을 해야 하며, 어쩌면 혼자서 아이 양육을
책임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막 시중든 고객들이 연달아 무례한 사람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음식을 빨리 내어 오지 않았다고 폭언을 하고
갔지만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숙한 사람이라면 동정심과 이해심을 가지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연약한 사람들을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72편 말씀을 묵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이여 왕에게 공평한 마음과 의로운 마음을 주십시오."라고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어지는 현장을 보니 왕이 힘없고 약한 백성들을 잘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사람은 연약한 사람들을 대할 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합니다. 자기보다 힘이 없거나 비천하다고 해서 무시하는 사람들을 잘 보십시오. 그런 사람은 자신보다 더 가진 사람에게는
비굴하게 고개 숙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 한 분 앞에 무릎 꿇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위를 막론하고 존경을 해야
하지만 비굴하게 처신해서는 안됩니다. 그가 누구든 가치 있는 사람으로 존귀히 여기는 것이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물론 이것을
잘 실천할 수 있는 곳은 음식점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수많은 결혼 생활이 파괴되는 원인이 무례한 언행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무례함이 건강한 결혼 생활을 병들게 하는 최대의 요인입니다. 무례함이 판을 치는 곳에는 결혼 관계가 쉽사리 무너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왜 가장 존경하지 않는지 정말 이상합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하지 않는 태도로 무례하게 가족을 대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가족 관계에서도 우리는 이해심을 가지고 존경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세 번째로 여러분과 입장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비판하지 말고 온유하게 대하십시오. 오늘 날 우리는 신자로서 살아갈 때 서로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누가 보아도 분명하게 바른 것이 있고 잘못된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다 분명하고 누구나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 이웃일 수도 있고 친척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그런 경우에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모든 인간은 자신의 태도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한 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밝히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답해야 합니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대해서 궁극적인 책임을 질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었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조차도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요구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자리하기 전에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처럼 행동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를 신자답게 행동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가
아닙니다. 그들의 생활 스타일을 바꾸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로마서
14장 12절은 밝힙니다.
진리를 말해 주는 것은 비판하는 일이 아닙니다. '술 먹고 운전하면 위험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임신한 여자가 마약을 복용하면 태아에게 치명적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위협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법칙을 따르지 않으면 여러 가지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은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위협하고 판단하고 저주하는 것입니까?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게 처신하지 않습니다. 내 아이가 무슨 일을 만날 때 그것은 위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어떤 경우에 진리를 말하는 것이 비판하는 것이 됩니까? 진리를 선포하고
즐기는 것은 비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보다 더 나은 사람입니다'라고 만족해하면 그것은 비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불화하지 않고도 의견을 달리 할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 그 어떤 바른 소리도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너무 진리에 집착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문제에 관한 여러분의 입장은 백 번 옳을 수 있습니다만 만약 그것을 다루는 여러분의 태도가 무례하다면 여러분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교리적인 정통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주님이 위해서 돌아가신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때로는 그들의 행동이 잘못될 수도 있지만 그들을 위해서 주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비판적이 아니라 온유하게 대해야 합니다. 특히 가족 관계에서 우리는 이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가정은 사람을 존경하는 법을 배우는 기본
터전입니다.
거기서 배우지 못하면 여러분의 삶에 여러 가지 문제가 연속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부모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배우자와 올바른 관계를 갖고 있지 않는 분은 없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결코 늦지
않습니다. 너무 늦지 않도록 지금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관계를 허비하지 마십시오.
네 번째로 여러분의 신앙을 나눌 때
그들을 존경하십시오. 결코 거부하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충고합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함와 두려움으로 답하라" 다른 번역에는 온유한 마음과 존경하는 태도로 답을 할 준비를 항상 하도록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천당에 갈 때 너희는 지옥에나 가라"고 선언하는 사람은 전도자로서 기본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전도자는 전도를 받는
사람을 마음에서 불쌍히 여길 뿐 아니라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시기를 원하시지 온 세상을 불태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로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무례하게 대할 때에 공손하게 반응하십시오. 달리 말해서 무례하게 받아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불에다가 휘발유를
끼얹는 격입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인용했습니다만 성경은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7, 12)
언제든지 여러분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을 존귀와 존경으로 대하면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여러분이 잘 한 것입니다. 어디서 그런 존경하는 마음이 나올까요?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서 텔레비전을 본다고 될까요? 그럴 리 만무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관계 속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오래 살고 잘되리라"고 약속합니다. 제
5계명입니다. 맨 먼저 존경심을 배우는 곳은 가정이어야 합니다.
권위에서 순종하는 것을 부모를 순종하는 데서 배워야 합니다.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어디서 성공을 기약할 수 있습니까? 학교에서 직장에서 결혼 생활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가정에서 부모에게 존경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도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할 수 없어"라고 말하면서 자라는 어린이는 내일이 없습니다.
그는 실패자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협력하고 존귀함으로 상대방을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비참합니다. 왜냐하면 씨는 뿌린 대로 거두듯이 상대방에 대해서 존경하는 태도로 대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존귀하게 여기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부모 두 분을 모두 존경하라고 말합니다. 문제가 있는 가정일수록 한 쪽에만 존경심이 치우쳐 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두 분 모두를 존경하라고 합니다. 부모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느냐 않느냐 상관이 없이 그들이 부모이기에 존경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좋은 부모인지 아닌지를 논하지 아니하고 존경하라고 성경은 명합니다.
그 두 분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들은 여러분의 존재의 근원입니다. 그들이 부모라는 신분 때문에 여러분은 존경해야 합니다. 훌륭하든 말든 상관이
없습니다. 마치 군대에서 상관에게 복종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상관의 인격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입은 군복에 달린 계급장 때문에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 두 분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지금 여기 존재할 수 없었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 여러분은 자녀로서 존경을 표해야 합니다.
어떤 연유로 여러분이 태어났던 상관이 없습니다. 하여간 그 분들은 자녀인 여러분의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계획에 없이 태어난
자녀도 있을 수 있습니다. 불법적인 관계에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비합법적인 부모는 있을 수 있지만 비합법적인 아기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부모가 생각조차 하기 전에 여러분을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강간의 결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태어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낙태는 잘못입니다.
부모에 의해서 상처를 입으신 분들은 없습니까? 여러분은 버림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자란 분은 없습니까? 심한 분 엄격한 분을 부모로 두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학대를 당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이 상처를
받을 때에 함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들이 버림당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자가 받을
심판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고 바다에 던지우는 편이 낫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제 5계명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어떻게 부모를 대하며 살아왔습니까? 무시하며 살아 왔습니까? 아니면 적당히 지내왔습니까? 심한 상처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변명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 서야합니다. 사실 부모답지 못한 분들도 많습니다. 존경받을 만 하지 못한 분도 많습니다. 자녀를
소홀히 한 분도, 가혹하게 취급한 분도, 학대를 한 부모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러분의 의무를 감해 주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러분이 여러분의 부모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생의 많은 영역에서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우정 관계, 결혼 관계에까지 깊은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부터 존경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 유익은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십시오. 용기를
가지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돌아가신 지 오래된 부모님이 여러분의 현재를 좌우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비난하기를 멈추시고
문제에서 도망하지 말고 직면하십시오. 부모를 존경하는 것은 그 분들께 정직하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시고 말씀드리십시오. "저는
부모님이 하신 좋은 일들로 인해서 부모님을 존경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십시오. "하지만 제게는 이런 아픔이 있어서 그 일이 어렵습니다".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존경하는 관계의 시작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부모에 의해서 버림받은
사람은 없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시편 27편에는 아픈 다윗의 상처가 어떻게 치유되었는지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없는 자들에게 아버지가 되시고 어머니가 없는
자들에게 어머니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 부모는 우리를 버릴 수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어떤 상처를 입었더라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순간을 지켜보신 하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귀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존귀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늘 아버지는 여러분을 당신의 가족으로 영접하십니다.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가족을 일컬어서 우리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영적으로 결속된 형제 자매들입니다. 서로를 귀히 여기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특권을 누리십시오.
물론 지상의 모든 가정처럼 불완전한 부분이 있지만 우리 울산교회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
여러분을 영접하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여러분의 상처가 치유 받고 새로운 안식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거기서도 여러분을 보시고 태어나게 하셨으며 존귀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로 끝맺기 전에 복음 송
하나를 들어볼까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다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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