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슬에 매인
경향(사신)(使臣)
- 에베소서 6:19-20 -
참 이상한 말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나는
사슬에 매인 사신입니다]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토한 말입니다. 지금 그는 로마의 감옥에 투옥이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이 때 그는 로마 감옥에 일차 투옥되어 있을 때였습니다. 사도행전28장 20절에 보면 그가 로마로
호송되어 갈 때 벌써 그의 손목에 쇠사슬이 채워지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로마로 잡혀 갈 미래를 내다보고 마지막 예루살렘 상경 길에 3년동안 정들었던 에베소 교회의 목회를 생각하며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 놓고 그의 에베소 교회 목회를 회상한 바 있습니다(행20:17-21). 그리고 그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거기서 내가 무슨 일을 만날른지 알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행20:22). 이 때 그는 심령이 매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성령의 사슬에 매여' 있는 자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다메섹 사건 이후에 이제 가는 것과(행13:4), 가지 않은
것도(행16:6) 성령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포로였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자신이 떠난 이후의 에베소
교회를 주님과 및 그의 말씀께 부탁하고 피차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눈물로 이별한 영적인 낭만을 남긴 일이
있었습니다(행20:32-36).
사슬에 매인 사신(使臣)! 도대체 무슨
말인가? 사람이 사슬에 매인다 함은 감옥에 있는 죄수가 아닌가? 아니면 전쟁 중 산채로 잡혀 끌려가는 포로가 아닌가?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을
[사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사'(大使)라고 하였습니다. 사슬에 매인 대사라고 하였습니다. '대사'란 한 나라를 대표하여 다른 나라로 파송을
받은 그 국가의 공식 대표자요 대변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직분은 영예로운 것이 아닌가?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에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보냄 받은 대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만 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대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리스도의 대사가 사슬에 매였다는 말인가? 이는 불명예스러운 말인 아닌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자랑스럽고 영예로운 표현입니다. 영광스러운 자기 신분의 표현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말하는 대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9절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라고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연의 뜻을 갖고 있는 바울적인 심령이,
비단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뿐아니라 전도자로서 그의 전 활동에 관계되어 있었음을 성경 여러 곳에서 보게 됩니다.
1. 그는
고통의 사슬에 매였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에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신체적 허약이나, 정신적 허약을 가리킴이 아니라 그의 영적 고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8절로 29절에 [이
외에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않더냐]고 하였습니다. 그가 세운 모든 교회 때문에 눌리는 고통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고통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날마다 바울의 삶 속에 살아 있어서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2. 부모가
된 사슬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해산한
영의 아버지요,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도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고 하였습니다(갈4:19).
다시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도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같이 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은 하나님이 자녀를 주신
자에게만 있는 축복의 이름입니다. 자녀가 없는 자들에겐 이 이름이 없습니다. 부모란 이름은 오직 자식을 위하여만 필요하고 사용되어지는 전용어로서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대신하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위하여 부모란 사슬로 인생을 묶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일을 만나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애정은 식어 버리거나, 변할 줄 모릅니다. 적어도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들에 대해서 이러한 어버이된
사슬에 묶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3. 책무의
사슬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 하기를 자기가 회계 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가 사도 바울이라고 추정할
때 그는 자녀들의 책무를 대신해야 될 사슬에 매여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자신 뿐아니고 지상의 모든 전도자들이 예외 없이 양떼들의 영혼의
책무자들로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자들은 항상 그 빚을 갚아야 되는 마음에 들려 있습니다. 바울은 또 복음의 책무자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는 헬라인에게도, 야만인에게도, 지혜 있는 자에게도, 어리석은 자에게도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하였습니다(롬1:14).
4. 중매꾼의
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영감 속에 받은 바울의
이러한 말은 실로 간절하고, 애타는 그의 심령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을 정결한 영(靈)의 쳐녀들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처녀들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남자에게 중매시켜 주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바로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켜 주고 싶은
그의 뜨거운 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 처녀를 한 남자(총각)에게 연결시키는 중매꾼은 그 일이 성사되기까지 그 일에 매여 있는 자가
아닌가?
5.
설교(전파)의 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사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속죄 고난의 불충분성을 말함이 결코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 믿는 자의 특권을 말함이 됩니다.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채운다고 함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장과 완성에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헌신적 봉사를 말함입니다. 바울의 경우 그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바로 이 전파 사역(설교) 때문에 쇠사슬에 묶였다고 한 것입니다.
6.
위주(爲主) 영광의 사슬입니다.
바울의 전 중심에는 존재 의의와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의 소산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인생 창조의 목적이고, 천지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사43:7).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36절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4장 6절에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은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4장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24절에는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 어디에 그 무슨
이유로도 하나님 자신 외에 사람이 영광을 차지할 기회나, 여유를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는
이러한 위주(爲主) 영광의 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우리 경향인들에게 이러한 영감의
표현들을 적용시켜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23년 전에 경향 교회를 허락 받았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자체
안에 어떤 내분이나, 당파나, 아니면 다른 이유들로 병앓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상 교회라고 하는 이유 때문에 부분적인 아픔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마저도 개척 교회라고 하는 성장의 과정에 있었던 성화 촉진제로 유익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교회 개척과 함께 뜻밖에
신학교 운동을 하게 되고, 복스럽게도 세계 선교 운동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단 개척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산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선교지의 교회까지 350여 교회가 훨씬 넘는 여러 교회를 해산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축복의 사슬들에 묶이고
말았습니다. 사명의 사슬에 묶이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 교회들을 위하여 겪는 고통의 사슬이었습니다. 어버이 교회로서의 해산과 양육의
사슬에 매였습니다. 그것은 꼭 대신 빚을 갚아야만 되는 책무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꼭 간절한 중매꾼의 마음과 같고, 모든 교회가 잘되기를
바라고 선교회와 신학교가 잘되기를 바라는 축복의 마음뿐이었습니다. 하나님 교회의 사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전파하며, 바른 복음의 나팔이
울려 퍼지기를 소원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이 시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영광을 그 분께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
생존 자체의 의미와 교회 사명의 본질적 목적을 두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한 사슬에 매여 23년을 좇아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또
하나의 사슬에 묶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경향교회 제 1대 당회장인 석원태 목사 그와 함께 동역하는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묶는 축복의 사슬이요
사명의 사슬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경향 교회당 건축이라고 하는 이 사명의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그 누구도 아무도, 그 무슨 이유로 이
사슬을 끊고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리고 영예롭게 여깁니다. 행복하게 여깁니다. 여기에 수반되는
우리의 진통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받은 일생 일대에 꼭 한 번만 받은 축복 인줄로 믿습니다. 또 아무나 하나님의 집을 짓는
주역들이 될 수 없는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너무 분명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전 건축의
사슬이야말로 영광의 사슬이 아닌가? 그래서 주님은 사슬에 매인 경향이라고 하지 않은가?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