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예수의 흔적을 새기자
갈라디아서6:11-18
신약성경 안에 바울 서신이 13권이 있습니다. 이 많은 서신을
직접 쓰신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대필하여 쓰신 것이고 마지막 에 바울이 자신이 쓰는 편지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친필로 서명하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눈병을 앓았고, 시력이 나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메석 도상에서 시력을 잃은 이후로 다시 볼 수 있었지만, 일생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생활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로마서는 바울의 대표적인 저작인데 이 편지도 더디오라는 사람이 대필해주고 있습니다.
(롬16:22)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 문장은 바울 서신 안에 있는 대필자의
말입니다. 고린도전서와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도 대필하였고, 바울은 마지막에 가서 친필로 한 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에서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도 친필 사인을 적고 있습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 라"라고 하셨습니다. 골로새서에도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의 친필임을 나타내는 말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갈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했습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정한 갈라디아서6:11-18의 말씀은 갈라디아서를 마치면서 종합
정리하면서 강조한 결론적인 부분입니다. "큰 글자"라는 말씀은 "긴 편지"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크기가 작은 것이 아니라, 큰 글자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은 그가 시력이 나쁘기 때문이란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편지란 적은 종이에 많은 내용을
써야 하기 때문에 눈이 좋은 다른 사람에게 대필을 시키고 자신은 나중에 자신이 쓰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 줄을 쓰 는 것으로 편지를
마무리하였습니다. "큰 글자로 쓴다"는 말은 이제부터 말하는 내용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주위 를 환기를 시키려고 하는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바울이 개척하신 교회인데, 바울이 떠난 후에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이 들어와 율법과 할례를 받으라고 하여 이단에 넘어갈
위험이 있었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급한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써서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으로 돌아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안에 유대교와의 마찰을 다룬 서신은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입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구약을 근거하고 거기에서 출 발한 종교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믿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구세 주로 믿으면서 그 동안 믿어오던 모세의 율법이나
언약, 할례를 비롯한 여러 가지 관습은 함께 가질 것이냐 아니면 버려야 할 것 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행전15장에서는 제1회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기도 하였습니다. 총회의 결의는 유대주 의 기독교인의 주장을 누르고, 믿음의 길에 어떠한 장애도 용납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떠난 후로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이 들어와서 예수만 믿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지만 모 세의 율법과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미혹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 롭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함께 교리서신입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가장 잘 나타내준 서신입 니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 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 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결론이라는 것은 언제나 종합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을 요약하고 종합하 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함으로 십자가 중심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교훈을 직접 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 아가신 주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자랑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바울 신학의 요 지입니다. 12-13절을 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 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 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갈라디아서를 관통하여 주장한 말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말로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 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이 들어와서 할례를 받으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면
갈라디아에 사는 성도들이 그 런 유혹을 뿌리치고 할례를 받지 않으면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쉬운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자기들이 편하기 위하여 할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핍박을 면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처음 예수 믿는 이들이기에 유대에서
들어온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이들과 싸울 자신도 없지만 다다익선이 좋은 것이라고 편케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핍박을 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 수를 믿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할례를 받고 예수 믿으라니 좋은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서
로마제국 하에서의 종교 제도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로마제국은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민족은 그들의 고유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기에 로마제국에서 인정하는 종교는 믿어도 좋았습니다. 로마제국은 유대교는 믿어도 좋은 종교로 인정하고 성전 예배와 제사장 제도를
승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정받은 종교가 아니었습 니다. 우리 기독교가 스스로 자라서 힘이 커지고 신도수가 많아져서 공인 받기까지는
300년이나 걸렸습니다. 기독교를 믿는다 는 것은 아주 엄청난 핍박을 각오해야 했지만, 내용으로는 예수를 믿어도, 형식은 유대교의 형식을 가지면
핍박은 면할 수 있었 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키는 무서운 함정이었습니다. 할례 받는 이유의 하나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중에는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이유로 할례를 받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할례가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어떤
학위나 관직 같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양을 낸다"는 말은 "좋은 모 양을 낸다"는 말인데, 할례 받으므로 경건의 모양을 내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기회주의자요, 속과 겉이 다른 자 들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생명으로 알고 받는 것이 아니며, 율법을
생명같이 지키려고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 할례를 받으므로 거룩한 척 하는 것입니다. (갈6: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적으로, 겉으로, 외적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 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 중에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칭찬이나 좋은 평판에 아예 목숨을 걸어 놓고 신앙생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용 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은 다 내용을 잃어버리고 외적인 조건을 갖추었다고 하는 것만 강조하려고 합니 다. 내가 믿은 연조,
나는 모태신앙입니다. 교회 내에서의 어떤 직분, 어떤 부서에 책임자, 이러한 관록을 자랑하다보니, 내적 인 충실은 찾아볼 수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의 성장을 위한 내적인 충실은 관심도 없고, 안 끼는데 없이 돌아다니 는 사람은 일평생 단 한번도 내적 충실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편해보자고 죄악을 끌어들여서는 안 됩니다. 육신적으로 좀 편해보자고 불의와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혼합종 교는 마침내 파멸하는 것입니다. 내 것을 지켜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핍박 의 절정이었습니다.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할례를 받으면 영원히 율법의 종이 되고 맙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할 례받아 구원받은
것이 되고 맙니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
씀대로 믿고,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을 가지려면 핍박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적당히 타협하고 유대교에 편승해서 신앙생 활한다면 핍박은 면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주일에 일하고, 제사 드리는 자리에 가서는 절하고, 술자리에 가서는 술
심부름하고, 세상과 타협하면 지금은 핍박을 면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영원히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감수해야 합니다. 주를 위하여 물질적인 손해도 기쁘게 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욕을 먹 고, 핍박을 받으면 하늘에서
상급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산산수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5:10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 고 즐거워하라 !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의 이단자들은 그들의 육체를
자랑하려고 했습니다. 할례 받은 것이 무슨 특별한 권리가 소유한 것처럼 기독교 귀족인 듯이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 거룩한 척하고 돋보이게 하려고 할례를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시됩니다.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 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받았으며,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서 야 하는 우리 인간들이 들어야 하는 최고 최선의 복음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 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하였습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로 말하기로 했습니다. 이것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나머지 다른 것은
모두 희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우리들의 과제이며, 우리 전 교회의 과제입니다. 옛날 사도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 것도 이 말씀은 죽은 말씀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실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 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 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라고 하
셨습니다. (빌3:4-6)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보니 그것은 자랑도 아니요, 다 배설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 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라고 했습니다. 오늘
14절에서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코"라는 말은 미래에 대 한 부정적인 소원을 나타내는 어법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능력이요, 지혜가 됩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 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죽었고, 나도 세상을 대하여 죽었다고 하셨습니다. 못박혔으니 움직이지 않습니 다. 피를 흘리고 죽으므로 완전히 활동이
끊어지고 정지되고 말았습니다. 세상과 나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며, 세상의 부귀영 화는 나에게서 멀어졌다는 말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아직도 세상 일에 분주하십니까? 그런 것은 나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 것이 좋고, 세상 여러 일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아직도 세상에서 오라는 데가 많다면 재고해야 합니다. 세상 모 든 일을 다하라고 주어진 시간이 아니라 겨우 예수 믿고 천국
갈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것이 인 생 성공입니다. 15절을 보십시다. (갈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고 했습니다 .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붙들지 말아야 합니다. 할례받은 유대인이든지 할례받지
아니한 이방인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 부터 믿었느냐 하는 것도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직분에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형식에 매일 것이 아닙니다. 요는 예수믿어 구원받은 사람, 새로 지으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거듭나야 합니다. 16절입니다. (갈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고 하셨 습니다. 이 "규례"라고 하신 규례는 곧은 막대 카논을 말합니다.
이것을 정경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규례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를 말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까? 이 규례를 행하는 자 , 곧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참 하나님의 이스라엘 사람인 것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평강과
긍휼이 따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문제를 전제로 하시면서 할례를 거부하라고 하셨습니다. 할례를 자랑하지 말고
,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로 인하여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의 흔적을 새기라"고 하십니다.
"흔적"이라고 하는 "스티그마"라는 말 입니다. 이 말을 다시 번역하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상표를 가졌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서부 평원 지대에는 각 농장마다 각기 고유한 상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OK 목장이라면 그런 영문 약자를 가지고 상표 를 만듭니다. 그래서
소들이 섞여도 자기의 짐승을 찾아내기 위하여 짐승의 머리에나 등에 화인을 새깁니다. 지금도 아프리 카에 가면 미개한 민족들은 자기의 이마나 볼에
특별한 문양을 새겨 넣어 어떤 종족인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이 발전 하게 된 것은 자유인 100만 명에 노예가 60만 명이 있어 노예를
부림으로 발전한 나라였습니다. 한번 도망했던 노예는 다시는 자유인으로 보내지 않으려고 노예의 이마에 화인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런 낙인이라는
말이 흔적이라는 말입니다. 낙인 찍혔다 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즐겨 사용한 말 중에 "그리스도 예수의 종된 바울"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된 바울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모욕과 불명예, 그리고 노예의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 '스티그마',
복수로는 '스티그마타' 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내 몸에 노예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합니다. 흔적이 새겨진 노예는 다시는
도망 갈 수 없습니다. 인권이란 완전히 박탈당하였습니다. 내 존재가 사라진 것입니다. 주인 에게 완전한 소유물이요, 영원한 복종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흔적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자랑하고 있습니 다. 이제는 도망갈 데가 없습니다. 내 것도 없습니다. 나의 명예와
자존심도 땅에 묻었습니다. 이제는 주인이신 주님의 영광에 덩달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은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내심 불쾌한 심정을 토로하는 말입니다. 그 동안 율법주의자들이 그의 사도권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것으로 충분히 사도 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괴롭게 말라"는 말은 그의 내면적인 고통이나 슬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심히 괴로웠습니다. 그가 설립한 갈라디아 교회가 이단에 물들어가고,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을 받아 넘어가 는
것을 보고 심히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더 이상 이단자들에게 미혹을 받지 말 고 든든히 서라는 의미로 하신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수 없는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죽을 뻔하였습니 다.
돌에 맞은 자국은 예수의 흔적이었습니다. 그의 등에는 채찍에 맞은 자국이 너무나 선명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세 번이 나 채찍에 맞았습니다.
(고후11:23-27)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 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 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 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여기 나오는 흔적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상처가 그대로 바울에게도 새겨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 니다. 일례로 아씨시의 성(聖) 프랜시스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흔적이 그 손바닥에 새겨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흔적이 새겨지기를 원하지 말고 주님을 위하여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이되어야 합니다.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자신을 십자가에 굴복시 켜야 합니다. 막8:34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하 셨습니다. (고전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 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구경거리가
되어도 좋습니다. 예수 믿 는 일로 인하여 나는 손해보아도 좋습니다. 나는 창피를 당해도 좋습니다. 우리 주님만 영광 받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여 러분의 가계부에 흔적이 남겨졌습니까? 헌금을 하려면 한번 휘청할 정도로 하는 것입니다. 체면치레 정도로 그치는 것은 흔적 이 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생각 속에서부터 여러분의 시간에, 여러분의 물질에, 우리 모두의 몸에 예수님의 상처를, 예 수님의 소유라는 상표를, 거룩한
흔적을 새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자기 몸의 찢긴 상처나 매맞아 멍든 자국을 볼 때에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은 깊이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말씀은 예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영원한 종임을 의미하는 것입니 다. 종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살아도 주의 것이며, 죽어도 주의 것이기에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건강, 물질, 가정, 사업 사회적인 활동, 전 삶을 동원하여 주님을 위하여 보답하면 서
이제는 돌려드리면서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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