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성경본문 : 마태복음 5:5


 

우리는 두 주일에 걸쳐서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가 받을 복에 관해서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팔복 가운데 세 번째인 ‘온유한 자가 받을 복’에 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알아둘 점은, 온유한 자, 마음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사람이라야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팔복의 여덟 가지 덕목은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고귀하면서 동시에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온유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말에 “온유”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합니다. 영어성경에는 “meek"라는 단어를 쓰는데, “유순한, 온순한, 부드러운”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로 번역한 헬라어 “프라우스”는 이 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의 의미를 한 두 마디로 설명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 이라는 구절이 처음 나오는 시편 37편을 읽어 보면, 이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낭독할 터이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2)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4)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5)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6)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7)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8)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9)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10)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이 시편은 ‘온유한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줍니다. 첫째로, 온유한 자는 행악자로 인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행악자나 불의한 자를 보면서 분노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는 그런 경우에도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이 성공하고 형통하는 것을 보면 화도 나고 불의한 사회에 대하여 불평이 터져 나오기 쉽지만, 온유한 자는 화를 내고 불평하지 않고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고 자기의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온유한 자는 감정을 잘 조절해서 쉬 화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실수를 너그럽게 보아주며 겸허하고 온화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둘 것은 마음이 가난한 것과 애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적인 상태 곧 심령 상태를 말하나 온유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유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및 우리 자신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온유함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진면목을 나타내기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온유함은 천국 시민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성품입니다.

시편 37편에 보면, 온유한 사람과 대조적인 사람을 일컬어 악행자 또는 악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악행자나 악인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계십니까? 시편 103편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다”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를 항상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며, 우리 죄를 따라 처지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시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한히 온유하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거만하고 악한 심성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수제자였던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온유하심에 대하여 이 같이 증언했습니다. “22)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

이는 주님께서 용기가 없어서 온유하게 처신하신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를 보면, 당시 유대 사회의 유력한 계층인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하시고 “화 있을진저, 회칠한 무덤이여” 라고 책망하셨고, 대제사장들과 공회원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셔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이와 같은 언행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용기 있는 분이신가를 잘 보여줍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당장이라도 하늘의 천군천사들을 동원해서 대적들을 멸하실 수 있지만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수모와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억울한 일을 참아 견디는 것, 욕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향해 욕하지 않고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은 온유함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주님을 올바로 따르려면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 이름을 사울이라고 했는데, 자타가 인정하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유대교에 대하여 특별한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를 이단의 괴수로 알고 기독교인들을 증오하여 이 땅에서 없애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할 때 거기 가담해서 증인 노릇을 했습니다. 그 정도로 성이 차지 않은 그는 팔을 걷어붙이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예루살렘의 집집마다 다니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서 옥에 넘겼습니다. 사도행전 9장 1절 이하에 보면, 이같이 증언합니다.

“1)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는 표현은 그 당시 사울이 얼마나 온유함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러했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영광중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나서는 그가 그토록 핍박하던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자기의 삶을 다 바쳤습니다.

그 때로부터 사도 바울은 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시작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는 말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사도 바울 자신에 대한 고백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 서신서를 읽어 보십시요. 그러면 그가 얼마나 자상하고 친절하고 오래 참으며 희생적인 인물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드디어 그는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실이지, 다른 사람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하여 ”나를 본받으라“고 한 것은 그만큼 그가 주님을 본받는 데 힘썼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에게서 위협과 살기를 찾아볼 수 없고,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고 약한 자들을 동정하고 실족한 자들을 보고 애타하는 온유한 모습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도 바울을 온유한 사람으로 변케 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도 온유한 사람으로 변케 하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의 능력으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기 위해 힘쓰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 우리의 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에베소서 4장 21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이같이 권면합니다.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 31)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 권면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라”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이므로 주님의 온유하심을 닮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습을 좇는 육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본받기 위해 결심하면 얼마든지 옛 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공보다 실패를 더 많이 하겠지만, 어린 아기가 무수한 넘어짐을 통해서 걸음마를 배우듯이 언젠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온유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때로 연단을 사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는 애굽의 모든 학문을 다 익혔으며 모든 방면에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모세는 자기의 역량을 가지고 애굽에서 압제받는 동족 히브리 민족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살이 되었을 때, 어느 날 강제 노역 현장을 나갔다가 애굽인 감독이 히브리인을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그 애굽인을 쳐 죽이고 모래에 감추었습니다. 그 이튿날 모세가 다시 노역 현장에 나갔더니 이번에는 히브리인끼리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약한 동포를 치는 사람에게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이 어제 애굽인을 죽인 것 같이 오늘은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 모세는 어제 일이 탄로 난 것을 알고 바로를 피해서 미디안 광야로 도주했습니다. 모세는 한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한 결과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대제국 애굽의 왕자였던 모세가 광야에서 양치는 목자가 되어 40년을 보낸 것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요. 그가 겪었을 고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릴없이 황량한 광야에서 양떼를 먹이는 일로 4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했던 모세의 심정이 얼마나 허탈했을까요? 그러나 사실인즉 그 40년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연단하신 기간이었습니다. 혈기를 참지 못하고 사람을 쳐 죽이기까지 했던 격정적이었던 모세가 오랜 연단을 통해서 지극히 온유한 사람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보니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0세의 젊고 능력 있는 모세를 들어 쓰지 않으시고 80세의 늙은 노인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세우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온유한 사람이 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부터 가나안까지 인도하는 일은 온유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모세의 경우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에 쓰임 받으려면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일은 대접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진정한 일군이 되려면 온유한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꼭 기억하십시다. 온유함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세 번째로, 온유한 자가 받을 복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에게 어려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으냐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땅을 많이 차지한 사람들을 보면 온유한 사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은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 일간지에 난 기사를 보니까, 필리핀에서는 1%의 부유층이 국가의 부 가운데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상위 7%가 전 국토의 90%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상류층은 그 어느 나라 부자 부럽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만 80% 이상의 국민은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소수의 부유층이 나라 전체의 경작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대부분의 국민이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넓은 땅을 차지한 지주들이 과연 온유한 사람들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나라도 비슷합니다. 우리나라의 상위 1%가 전체 사유지의 51.5%를, 상위 5%가 전체 사유지의 82.7%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수십만 평이 넘는 막대한 땅을 차지했습니다. 자, 이처럼 많은 땅을 차지한 사람들이 다 온유한 사람들일까요? 그리고 땅을 갖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온유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요?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하신 주님의 말씀은 매우 난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기업으로 받을 “땅”의 의미를 올바로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상의 땅이 아니라 장차 성도들이 들어가서 살게 될 새 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인물들에 대하여 그들이 지상의 본향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고향을 사모하였으며, 이에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해서 하늘에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했습니다(13-16).

그리고 계시록 21장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1)고 했습니다. 바로 이 새 하늘과 새 땅이야말로 장차 성도들이 들어가 살 곳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약속하신 천국이나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기업의 땅은 다 같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같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온유한 자가 받을 복은 장차 천국에 가서야 누리게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미래적인 의미와 더불어 현재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장차 구속받은 성도들이 들어가게 될 천국이 있지만, 성도들은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온유한 자는 이 땅에 살면서도 땅 곧 천국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찬송가 495장은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는 성도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3)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 찬송가와 같이 온유한 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을 기업으로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11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나라의 복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다스리실 미래의 왕국에 대한 예언이지만, 동시에 영적으로는 이미 이 땅에 이루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이리와 표범과 사자와 곰과 독사는 잔인하고 악독하고 사납고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인간들을 상징하고, 어린양과 어린염소와 송아지와 어린아이는 선량하고 순진하고 이타적인 인간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두 부류의 인간들은 타고난 본성이 너무나 달라서 서로 화합할 수 없고, 항상 후자가 손해를 보고 맙니다. 그러나 이리와 표범과 사자와 곰과 독사와 같은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심령이 변화를 받게 되어서 그 본성적인 악함이 제거되고 선량한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만하고 사나운 사람이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진실로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주님의 온유하신 마음을 본받는 것입니다. 내가 온유한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나의 심령과 가정을 기업의 땅인 천국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마다 예수님을 본받아 온유한 자가 되셔서 이 땅에서 천국의 복을 받아 누릴 뿐 아니라, 장차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