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 massge internet:www.imr.co.kr |
일어나 걸어가라
본 문 : 요한5:1-16 오늘 본문의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가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질병에서 낫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까? 바로 연못가에 누워 "물이 동하기만"기다린 지 38년이 된 환자는 얼마나 물 속에 뛰어 들어 치료받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물으셨습니다. 마음으로 원하고 있다 할지라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때 그 말씀을 들은 환자는 자기의 깊은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되돌아보고, 표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환자가 말하였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은 본문으로 바로 들어가서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에게 잘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형통하려면 먼저 여러 성도님들 안에 그런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주간 저는 [당신의 말 속에 성공이 들어있다]는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환경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기 스스로 자승자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며, 인생의 의미를 진실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가장 감명 깊은 부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고 하신 사도 바울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저주를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 율법의 저주에는 가난과 질병, 그리고 영적인 죽음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주장이었습니다. 아주 큰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로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 대로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잠13:12을 보았습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고 했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다른 성경을 보았습니다.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는 말씀은 우리의 소원이 성취됨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에서는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병들지만 소원이 이루어지면 생명나무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이 이루어질 때 그것을 생명나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갈망하는 마음이 우리들 안에 있을 때 그것은 곧 생명나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갈망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 갈망 자체가 생명나무라"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것들이나,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것들이 우리 안에 갈망하는 일들을 말하기도 하고, 간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더 귀하고 좋은 환경과 은총을 사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없다면 하나님에게 무엇을 얻을 것입니까?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이며, 하나님은 은혜입니다. 우리 사람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는 것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른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주시고 우리는 그 소원으로 갈망하게 되고, 하나님은 그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을 소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러한 간절하고 거룩한 소원을 주시고, 우리로 그 소원을 사모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그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모하지도 아니하는데 주시는 분이 아니시고, 사모하는 영혼들에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97:9)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사모한다"는 말씀이 수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14:12)고 하셨습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며,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 신령한 직분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이요,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큰 명절이 있을 때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전에 성경을 해석하던 옛 사람들은 이 명절을 유월절이었다고 보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이라고 할 때 요한복음 5:1의 명절은 유월절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가능한 것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전국에 흩어진 유대인들과 해외에서 오는 순례자들을 합쳐서 때로는 최대의 인파로 기록되고 있기는 260만명까지 운집하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주위 32km 이내에 사는 유대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명절을 지켜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의 전통적인 예배와 절기나 제도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전통적인 예전을 답습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그 명절을 지키면서 새로운 의미를 주셨고, 점차적으로 새로운 제도를 제정하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통하여 성만찬을 제정하셨고, 오순절을 통하여 성령강림절을 주셨고, 장막절을 통하여 교회는 감사절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장막절에 광야에서 마신 물을 생각하면서 예수님 자신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되심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번 명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에는 분명히 혼자이셨습니다. 이 부분에는 제자들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피하여 조용한 못으로 다가가셨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찌들린 영혼들이 모여 있는 곳, 38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병과 싸우고 있었던 38년된 병자가 있는 베데스다 못으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살펴보면 언제나 사랑하시는 마음,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동정하시고,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에서 치유 이적을 행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수백만의 사람들이 운집하여 즐기는 떠들썩한 잔치를 뒤로 하고 가장 소외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시고 있습니다. 2-4절을 읽어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예루살렘에는 '양문'이라는 문이 있었고, 그 문 곁에는 당시 통용어인 아람어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따라 가면서 '모퉁이 문', '에브라임 문', '골짜기 문', '분문', '샘문', '마문', '어문', '양문' 등이 있었습니다. 즉 '양의 문'이라는 문은 성전 제사에 사용되는 양들을 들어오는 문으로 그 성문 안에 양을 사고 파는 시장이 있었습니다.(느3:1.32등) 현재의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많은 문들 중 '스데반 문'이라고 하는 문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느혜미야의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에는 어문 곁에 양문이 나 있었으며 양문을 통하여 기드론 골짜기를 내려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기드론 골짜기를 내려가려면 스데문 문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 성벽은 후대에 사라센 제국을 이룬 오스만 터어키에서 성축한 것입니다.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었습니다. 히브리 말이라고 했지만 당시의 사용되고 있었던 현대화된 히브리어 즉 아람어로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에는 で베드자다と라고 했는데, 고대 사본들에는 で베데스다と라고 했고, 고대 사본들에는 괄호( )안에 있는 말들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 )안에 있는 설명문을 채택하고 있는 사본에서는 이 연못의 이름을 で베드자다と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연못의 이름은 고대 사본의 이름을 채택하였고, 설명문은 후대의 사본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 연못은 간헐천이라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뜨거운 지하수와 수증기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가스가 함께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분출하는 온천을 말합니다. 이러한 간헐천은 화산 지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옐로스톤 공원에는 간헐천이 많은데, 200여 개의 간헐천이 있으며 가장 큰 자이언트 간헐천은 물줄기의 높이가 75m까지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고대 사본의 발음대로 で베데스다と라고 하는 것이 좋은 발음입니다. 이 연못의 이름은 で은혜의 집, 자비의 집と이라고 합니다. 우선 이름이 좋습니다. 베데스다 자비의 집, 은혜의 집, 이 얼마나 은혜스러운 이름입니까? 관청만 즐비하고 경찰서만 늘어간다고 해서 좋은 세상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각박한 세대에 자비의 집이 있어야 합니다. 찌들린 영혼들이 쉬어가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용기를 낼 수 있는 바로 오늘의 교회들은 자비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가 바로 베데스다와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 지역 사회의 자비의 집이어야 합니다. 은혜의 집이어야 합니다. 지치고 피곤한 나그네가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고 쉬어가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 연못은 가끔 지하수가 깊은 땅속에 여러 가지 천연가스와 함께 끓어 올라오는 간헐천이었습니다. ( )의 부분은 고대 사본에는 기록되지 않는 것인데 후대의 삽입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 성경의 뜻을 잘못 이해할 것으로 염려가 되어서 옛날 사본에 추가해서 기록하여 놓은 것입니다. 가끔 물이 부글부글 올라오기도 하고 , 물이 솟아오르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물이 동한다고 할 때 천사가 내려와서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전설적인 이야기가 들어왔습니다. 옛부터 이곳에 온천이 터져 나오는데, 계속 물이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간헐적으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면서 물이 움직이고 소리를 냅니다. 이때에 제일 먼저 이 못에 뛰어들어가는 사람은 어떠한 병이 걸렸던지 나을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지금 온천욕을 통해서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하는 것처럼 신경계통의 병이나, 피부과 질환이든지, 마음의 병이든지 하는 것은 잘 나았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나라에 유일한 의료 기관이 되었고, 난치의 병을 치료받을 수 있었기에 이 못 가에 아예 행각을 짓고 그곳에서 숙식을 하면서 물의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행각에는 많은 병자들,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들이 못에 뛰어들어가기 위해 모여 있었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 등 많은 환자"라고 부드럽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모두 난치의 병이며 불치의 병으로 비참하고 무능한 인생의 종국을 바라보는 처절한 광경입니다. 유대 나라가 큰 나라도 아닌데 이곳 베데스다 못에는 각색 병을 가진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병자들은 유대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세 종류의 환자를 특별히 말씀한다고 하는 해석을 붙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눈먼 사람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진리를 보지 못하고 , 주님을 앞에 두고도 하나님의 아들인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리 저는 사람들은 바로 걷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살지 못하고 자꾸만 곁길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혈기 마른 자 중풍병자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무기력해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병자를 통하여 유대인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상태를 미루어 짐작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는 다리를 저는 절뚝발이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무능한 혈기 마른 자들이었습니다. 세계인구의 약 2%는 항상 병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 중에 1%는 노쇠현상이고, 또 나머지 1%는 자신의 부주의 때문이라고 합니다. 노쇠한 때문이든지, 아니면 자기 부주의 때문이든지, 질병이란 인간에게 불행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생은 짧다고 하는데 많은 시간을 질병에 빼앗기고 보니 안타까운 현실이요, 아무리 큰 포부와 계획을 가지고 있어도 몸이 성치 못하면 아무 일도 추진하지 못하고 소심해지고 자연 자신감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환은 도적이라고 경제적인 손해와 더불어 긴 병 장병(長病)에 효자가 없다고, 다른 가족들까지도 침울하게 되고 정신적인 피해 역시 막대한 것입니다. 혹시 사랑하는 남편이 좀 아프다고 해보세요, 처음에는 이 약 저 약, 이 병원 저 병원하고 다니지만 별로 차도가 없고 언제 회복될지 모른다고 하면 , 짜증스러운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가족들 모두가 함께 정신적인 환자가 되어버립니다. 이 분 38년 된 병자도 역시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가족들이 기다려 줄 수 없습니다. 38년씩이나 어떻게 옆에서 기다리고 간호하고 도와줄 것입니까? 처음 한 몇 년은 곁에서 지켜주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처참한 한계 상황 속에 겨우 연명하고 있는 이 곳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행각에서 38년된 병자를 보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라고 할 때 아주 절망적이요, 그 연수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랑한 기간과 같으며, 불 신앙으로 곪아 터져 가는 오늘 시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 사람은 가족들까지도 돌아보지 않는 외로운 사람으로 연못이 동할 때마다 그저 마음뿐이지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힘쓰고 애써서 가다보면 자기보다 다른 사람이 먼저 뛰어 들어가서 고침 받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허구한 세월, 반평생을 연못가에서 살아왔다니 가히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보람있는 인생이라는 이미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라든지, 인생의 의미라는 것은 너무나 거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연못가에 모여 있는 이들은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나만 살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만 꽉 차 있습니다. 사실 병든 육신도 문제이지만 병든 마음들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병든 육신은 병원에 가서 고치지만 병든 마음들은 교회에 와서 고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총체적으로 부패 타락한 이 세대의 마음은 어디서 고칠 것입니까? 오늘의 교회는 과연 이 세대를 고칠 능력이 있습니까? 더 악화시키는 것은 아닙니까? 능력을 상실한 오늘의 교회는 더 큰 질병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가 뜨겁지 못하고 누구를 뜨겁게 할 것이며, 내가 죽어가면서 누구를 향하여 살라고 할 것입니까? 환자에게 예수님이 묻습니다. ぢ네가 낫고자 하느냐?っ 어떻게 보면 이러한 질문은 대단히 유치해 보이고, 어리석은 질문 같아 보입니다. 환자가 낫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물음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환자의 대답 역시 동문 서답 격입니다. ぢ예 낫고 싶습니다.っ라고 하든지, ぢ한번 걸어본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っ 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 환자는 ぢ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내려가나이다.っ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ぢ내가 도와줄터이니 기다립시다っ고 하지 않고 ぢ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っ하시었습니다. 38년 동안이나 누워 있던 환자에게 지금 당장 일어나 걸어가라 하시는 것은 잘못하면 조롱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납니다. ぢ그 사람이 곧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っ고 하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찾아보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대답을 어디에서 얻어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처음 질문에서 찾아야 합니다. ぢ네가 낫고자 하느냐?っ 이 질문은 대단히 의미가 있고 깊은 내용을 가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누워 앓다보면 체념하게 될 수 있습니다. ぢ 평생을 있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지 ,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야, 내 팔자에 무슨 병을 낫는다는 말인가!っ 이런 마음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은혜를 귀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역사하시기를 좋아 하십니다. 주님의 능력을 힘입는 중요한 비결은 그 은혜에 대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ぢ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っ 우선 안타깝게 소원해야 합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에게는 먹일 수가 없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 입을 넓게 열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ぢ너는 참으로 은혜를 받아야 하느냐? 너는 진정 변화되기를 원하느냐?っ고 물으십니다. 여리고 성의 맹인 바디메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ぢ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っ ぢ예 보기를 원하나이다.っ라고 했습니다. 문둥병 환자에게 ぢ네 소원이 무엇이냐?っ ぢ예, 낫기를 원하나이다.っ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소원도 있을 것이지만, 제일의 소원을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찾아와서 ぢ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っ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ぢ 예 저는 잘 살기를 원합니다.っ 무엇을 말씀드리겠습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그가 낫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의 표현이 다소 잘못되었다고 하여도 그의 말속에는 낫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하시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나를 보려고 하지 말고 주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일어나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선생님 내가 38년이나 누워 있었는데 어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더구나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니요?" 우리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축복이 되고, 우리가 할 수 잇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대로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무조건 순종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기도하면 소원대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까? 예 좋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내 뜻대로 아닌 것으로 응답하실 때도 있습니다. 나는 가지고 싶은데 주님은 주라고 하십니다. 나는 가고 싶은데 주님은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응답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 어떻게 그것을 어떻게 기도의 응답으로 받아들일 것입니까? 연못에 들어가는 것만이 응답입니까? 우리는 나음을 얻으면 되는 것입니다. 일어날 때 우리는 일어나지 않으면 영영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 우리 앞에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무서운 난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소원을
내어놓고 아뢰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고 생각지 않은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려운 상황에 우리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더욱 크게 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믿음의 사고와 언어를 사용하면서
살아가서 지금의 더럽고 추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영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으로 걸어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은혜목회정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