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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

 

히4:14-16

우리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신앙의 본질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교제하시며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의 관계를 원하셨습니다. 이 때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즐기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불순종함으로 이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이 후로 죄의 결과인 죽음과 고통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이 상태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이 관계를 다시 회복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친히 우리가 지은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하여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마다 다시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기쁜 소식, 곧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이 생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영생을 정의하시기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 가운데 하나도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는 일은 신앙생활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많이 만나고 체험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문제를 살피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첫 번째로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의미가 무엇이며, 두 번째로는 은혜의 보좌로 나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세 번째로는 은혜의 보좌에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네 번째로는 왜 나가야 하는지의 문제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제사법이 기록된 레위기와 성막을 만드는 일이 기록된 출애굽기 25장부터 40장까지의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구약적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본문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본문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히4:14)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구약에서 대제사장의 직무는 아론의 자손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로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가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참고. 레16:15-17). 인간은 지은 죄로 인하여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죄를 대속하는 방법으로 대신 그 죄를 대신하여 동물을 죽여 그 피를 가지고 나가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사는 아무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으로 통하여 나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자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자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대제사장이 되실 뿐만 아니라 자기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지성소에 들어가신 분으로 설명하지 않고, "승천하신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승천하신 자"는 단순히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하면 "하늘을 통과하신 분"(who has passed through the heavens)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표현을 쓴 것은 구약의 제사법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늘로 들어가신 사건을 설명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약의 제사법에 따라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자기 피를 가지고 들어가신 사건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늘보좌로 가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늘을 통과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보좌로 나갈 수 있는 자유와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믿는 도리"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신앙고백"(homo-logia, confession)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만도 성경에 관한 교리에서부터 최후심판에 관한 교리까지 33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매 주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만도 12가지 믿어야 할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시고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일,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실, 하늘에 오르사 지금 현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다가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신다는 사실 등입니다. 그 외에 성령이 우리 가운데 내주하시며 역사하신다는 사실과 교회의 중요성을 믿고,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일의 중요성 등도 믿습니다.

하지만 때로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생활의 어렵고 힘든 부분을 만날 때마다 내가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생활, 다른 말로 하면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갈등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서 저자가 이 편지를 쓸 당시의 성도들도 그들이 믿는 바의 도리를 붙잡고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 회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히브리서 전체 문맥 속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1에 보면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3:12에는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그들이 믿고 붙든 교리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갈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고 하늘을 통과하여 들어가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믿는 바의 신앙고백을 굳게 잡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15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하늘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시며 우리의 사정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인간의 연약한 본성을 가지셨고, 때로는 배고픔도, 때로는 고난도, 때로는 아픔도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이나 갈등, 고민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시고 실제로 모든 것을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주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항상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바의 교리를 꼭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교리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2.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항상 은혜의 보좌에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혜의 보좌에서 우리의 실제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본문의 결론으로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은혜의 보좌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구약의 성막의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성막이나 성전의 가장 중요한 사상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하나님의 임재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시면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지으라."(출25:8)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막을 짓게 하신 본래 목적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며 교제하시기 위함입니다. 구약의 성경은 이 사상을 아주 분명하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출25:21-22). 그리고 구약의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있었고, 그 언약궤의 뚜껑에 하나님께 만나 주시고, 은혜를 베푸는 장소인 속죄소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곳을 은혜를 베푸는 장소로 이해하여 KJV는 시은소(mercy seat)라고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이곳이 이 본문에서 말하는 은혜의 보좌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 휘장이었습니다. 이 휘장은 아무나 이곳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 당시에 휘장 안으로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대제사장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마저도 자기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죄를 속하는 속죄의 피를 가지고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두 마리의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백성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백성의 죄를 이 염소에게 전가시키는 의식입니다. 이 일 후에 한 마리는 자유롭게 풀어주고, 또 한 마리는 죽여서 대제사장은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가지고 법궤 뚜껑에 있는 속죄소 위에 뿌렸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공적으로 용서함으로 받았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은 죄인이 죄를 용서받기 전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소에 휘장이 있었던 이유는 죄를 가지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주셔서 이 휘장을 열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5:37-38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의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가장 실제적인 이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없도록 가로막혀 있었던 휘장을 예수님 자신의 피로 찢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만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은 하나님께 나올 수 없다고 하는 표시로 휘장으로 막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가 지은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로 인하여 나갈 수 없도록 막았던 휘장을 찢으시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 동물의 피를 가지고만 들어갈 수 있었던 시은소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담대히"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파레이시아"(parrēsia)라고 하는 말인데, 용어는 "확신," "보증," "담대함," "자유" 등 여러 가지 의미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내용적으로 가장 적절한 말은 "자유"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은 예전에는 지은 죄로 말미암아 그 앞에 자유롭게 나갈 수가 없었으나 이제 자유롭게 나가자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제한 사항이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 종교개혁자요 유명한 신학자였던 마틴 루터(M. Luther)는 이 사상을 정리하여 「독일귀족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책에서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하였습니다. 루터는 사람에게 관리, 상인, 농부, 혹은 노동자 등의 직책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다 동등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며, 평신도나 제사장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부들만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믿는 모든 신자들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로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 교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신앙의 핵심은 은혜의 보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동물의 피와 대제사장의 중보를 통하여 은혜의 보좌인 시은소에서 제한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만나주셨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인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3. 은혜의 보좌로 나가는 방법

그러면 은혜로 보좌로 나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앞서간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인데 정한 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금식하고 때로는 밤을 새면서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자의 생활에 이러한 일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로 은혜의 보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 교제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는 것과 그 하나님의 만나고 체험하는 문제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주로 바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조정하여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위하여 삶의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모든 좋은 것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만나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지 않는 분이 있다면 고정된 가치개념을 바꾸어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에서 만나는 일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한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서울의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목사님과 같이 공부하던 한 독일학생이 자기가 쓰던 타자기를 주고 갔습니다. 그 타자기는 새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마음에 이왕 줄 바에야 새 것을 주지 않고 헌 것을 주고 갔다고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방 한쪽 구석에 넣어두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학교에 레포트를 쓸 일이 있어서 그 타자기를 가지고 어떤 한인 가정에 가서 식사를 하면서 타자기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집에서 공부하던 한 학생이 목사님이 쓰시던 그 타자기를 보고 스위스제 최고급 타자기이며, 당시에 나오는 새 타자기 몇 대보다 더 가치있고 좋다는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타자기를 보니 스위스 제품이라는 브랜드가 붙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독일친구가 쓰던 타자기라고 하여서 별로 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방 한편에 밀쳐 두었던 타자기를 그때부터 닦고 아주 소중하게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타자기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목사님의 가치개념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 전에 그 타자기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가치개념이 바뀌고 난 뒤부터 타자기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은혜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가장 중요한 가치개념을 체험하게 된다면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일이 필요없다고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은혜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만나 교제할 때 주시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은혜를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 은혜의 보좌로 나가야 할 이유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는 왜 당시의 성도들에게 은혜의 보좌에 나가라고 권하였을까요? 이 본문에 보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복음을 믿는다는 이유로 환란이나 핍박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믿음생활에 회의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질병들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녀들의 문제로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일에 대하여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인간 관계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경우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은혜의 보좌로 나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해결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퀘이커 교도였으며 나중에는 영국으로 이주하여 유명한 말씀 세미나인 케직 사경회를 창설하게 된 한나 스미스(Hanna Whitall Smith, 1832-1911)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녀의 가까운 친구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말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한 부인의 친구가 그녀의 집을 방문한 일로 인하여 큰 시험거리가 되었는데, 그 사람의 방문을 받을 때마다 많은 기도로 준비하였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그 상황을 바꾸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예를 든 것은 우리가 어떤 문제든지 은혜의 보좌로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가 은혜의 보좌에 나갈 수 있는 근거로 구약의 제사법에 따라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기의 피로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주님의 피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을 통하여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방법이 아니라 예배생활에 힘쓰고 규칙적으로 성경읽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은혜의 보좌에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은혜를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즐거움과 신비는 바로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우리의 기도)

살아 계셔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으나 우리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나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보좌로 나갈 수 있는 자유와 특권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자유롭게 나아가 교제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전에 우리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정한 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으며 때로는 금식하고 때로는 밤을 새워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가 믿음생활 하는 가운데 회의가 생기거나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낙심하지 말고 은혜의 보좌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은혜의 보좌에 나아와 이 모든 문제를 아뢸 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만나주시고 문제들을 풀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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