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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좇아 사는 삶

갈5:16-26

 

우리는 요즘 거의 매일같이 TV나 신문을 통하여 연정희, 배정숙, 이형자 이 세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현 김태정 법무장관의 부인과 전 통일부 장관 강인덕 씨의 부인이며, 신동아 그룹 최순영 회장의 부인입니다. 우리 나라가 외환위기를 맞아 우리 나라는 IMF관리체제 하에서 구조조정이라는 미명하에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거나 감봉을 당하였고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거의 180만 명의 실업자가 생겼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우리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은 예외였습니다. 이들은 국민은 고통을 받는데 그 부인들은 몇백만원하는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신자들에게 허탈감을 주는 것은 이들 모두 신자였고 정기적으로 횃불선교회관에서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사를 대할 때 도대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들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과연 성령님이 그 속에 내주하는 신자라면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하는 의아심을 가지게 만듭니다. 헛된 세상의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이익을 누릴 수 있는 수단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한 만민중앙교회 문화방송 난입사건을 통하여 그 교회의 실상을 접할 때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모습이 과연 그러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신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을 확인하고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세워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책을 "자유의 헌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전에는 죄의 종이 되어 율법의 정죄 가운데 있었으나 지금은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 기본적인 이 책의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회에서 이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두 가지 방향으로 잘못된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참된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에 예속되어 할례를 받기도 하고, 여전히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갈5:1). 또 하나는 이 자유가 방종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갈5:13). 자유와 방종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갈라디아 교회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절제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의 봉사와 율법에 복종하는 가운데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였습니다(갈5:13-15). 어떤 사람은 자기를 절제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율법에 복종하는 생활이 어떻게 자유인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무엇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테두리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릴 때 부모님이 간섭한다고 하여서 부모님의 곁을 떠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까? 부모님의 곁을 떠나면 그 때부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면 그 때부터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질서 안에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참된 자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의지로가 가능한 것일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믿는 자 가운데 항상 내주해 계시는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성령은 우리 육체의 소욕을 반대하고,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는 성령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성령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본문의 주제는 성령은 육체의 욕심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잘 이해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상을, 두 번째로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방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상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육체의 욕심과 성령의 소망 사이에 갈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6-17에서 그 갈등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육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NIV성경에는 "죄성을 가진 본성"(the sinful nature)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러한 육체와 대조하여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육체가 하기를 원하는 욕망은 무엇이며, 성령이 하시기를 원하는 소망은 무엇이기에 서로 대적하며 갈등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을 서로 대조하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육체의 일

바울은 육체의 일은 현저하다고 하였습니다. 현저하다고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잘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본성이 나타나는 일들을 갈라디아서 5:19-21에서 하나씩 열거하고 있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죄악된 본성에 따라 행하는 일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눈다면 성, 종교, 사회생활, 음주문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성 범주에 드는 것은 음행, 더러운 것과 호색입니다. 여기에 음행은 결혼을 하지 않은 사이에 일어나는 일과 결혼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반적인 모든 성범죄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더러운 것"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행하는 성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호색(aselgeia)은 남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쾌락을 즐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두 번째 범주에 드는 것은 우상숭배와 술수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숭배하는 일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가나안에는 바알, 아스다롯, 몰랙, 맘몬 등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 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아주 다양해졌습니다. 자신의 욕망이 신이 되어 섬기기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9에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 속에 있는 이기적인 욕망이 신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부와 탐욕도 우상입니다. 그리고 술수는 우상숭배의 구체적인 행위로 우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서 고전어와 헬라어를 가르쳤던 유명한 라이트풋(J. B. Lightfoot) 교수는 이 말을 약령의 권세와 교제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 범주에 드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도발적인 성격)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eritheia, 이기적인 야심)과 분리함과 이단(hairesis,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거짓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파, 파벌, 당파를 의미임, faction)과 투기(질투)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반사회적인 행동으로서 모든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동들입니다.

네 번째 범주에 드는 것은 음주와 관련된 것인데, 술취함과 방탕함입니다. 둘 다 무절제하고 무질서한 생활과 관계된 것입니다. 성경시대에는 주로 술을 아주 약하게 음료 대신에 마셨습니다. 그런데 술이 취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무절제하게 마셔서 술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결과 방탕하게 됩니다. 방탕(kōmos)이라는 용어는 도시의 거리를 휩쓸고 다니는 시끄러운 술주정꾼의 한무리를 의미하게 단어입니다. 세상의 풍조에 밀려서 목적없이 이끌려 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무절제하고 무질서한 생활은 타락한 육체의 전형적인 특성입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일들이 바로 타락한 본성이 지배를 받아 행하는 육체의 일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들은 절대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이러한 일은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21) 여기에서 "하는 자들"(hoi prassontes)는 헬라어 성경에 현재분사형입니다. 이것은 습관적으로 계속하여 한다면 절대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이러한 생활을 행한다면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계속 행한다면 완전한 나라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8에서는 이러한 자들이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2) 성령의 일

그러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특성은 어떤 것일까요? 바울은 타락한 본성의 지배를 받는 일과 반대하여 성령의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특히 여기에 열매라고 하였을 때 성령이 지배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열매들은 신자라면 당연히 나타나야 할 덕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아홉 가지 열매를 세 범주로 나누었습니다. 저는 이 구분이 참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범주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덕목들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사랑은 특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새로운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가운데 기쁨이 있고,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두 번째 덕목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입니다. 이것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덕목들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무례함과 불친절에 대하여 보복하려는 정신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고 인내하며(오래 참음), 다른 사람이 곤경 가운데 있을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자비), 실제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양선)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범주는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입니다. 여기서 충성(pistis)은 원문으로 믿음, 또는 신실함이라는 뜻입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신실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영어 번역에 보면 faith라고 번역하지 않고, fidelity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특히 절제는 우리의 말과 행동, 욕망과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열매들을 맺게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 대하여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로운 행동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참된 신자라면 다 이러한 열매를 맺기를 원하지만 실제 우리의 육신은 너무 연약합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우리의 몸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마음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언급한 육체의 욕망과 성령의 욕망이 얼마나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참된 신자라면 이러한 갈등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욕심과 성령의 소망이 함께 공존하며 갈등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갈등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의롭다함을 얻고 성령이 내주한다고 할지라도 갈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구원함을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어떠한 육망이나 유혹에도 이끌리거나 흔들리지 않는 나무나 돌이 아니다." 그래서 이 육체와 성령, 죄악된 인간의 본성과 성령이 지배하는 본성은 항상 대립적인 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많이 갈등하였습니다.

그가 쓴 다른 편지인 로마서에 보아도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21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중생한 우리 신자에게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과 악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함께 공존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세력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새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여전히 옛성품과 새성품이 공존하면서 갈등을 일으키고 충돌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이러한 두 가지 현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현실은 신자가 육신으로 살아가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가 성화의 정도가 깊어갈수록 하나님의 법을 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죄의 법이 지배하는 현실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워하고 갈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갈등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2. 참된 자유를 누리는 방법

바울은 갈등을 극복하고 참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습니까?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한 가지 기초를 제시하고 난 뒤에 성령으로 갈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5:24-25) 여기에 약간 번역이 원문과 뒤바뀐 것이 있습니다. 우리 번역에는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원문은 "그 정과 욕심과 함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의 죄악된 본성의 욕구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십자가에 못을 박는다(e-staurōsan)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과거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NIV 성경은 현재완료형으로 번역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상태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같이 우리도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점을 이미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은 우리가 절대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새사람이 되어 더 이상 육체를 따라 행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새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자의 삶의 아주 중요한 기초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이론적인 지식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뻔히 알고 있는 교리를 실천적으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이 법을 지킬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성령님이 내주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기초를 놓아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인 표현으로 인디카티브(indicative)라고 말합니다. 이 기초 위에 하나님의 명령인 임퍼라티브(imperative)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윤리의 특이성입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바울은 이 본문에서 5:16에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하였고, 5:18에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라고 하였으며, 5:25에서는 "성령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을 통하여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으로, 또는 성령을 좇아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으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폭넓게 적용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건의 방법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기도의 실천, 성경의 묵상, 우리에게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믿음의 사람들과의 교제와 주일을 주님의 날로 지키는 데서, 그리고 성찬과 공예배의 출석 등이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방법이 너무 단순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한 방법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평범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기도하고, 순종하며, 부지런히 예배에 참여하여 성도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우리 속에 항상 내주해 계시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들을 잘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방법들을 잘 사용한다면 모든 믿는 자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이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신자가 헛된 영광을 바라고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러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에만이 이러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매는 어느 누구에게 안수받는다고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자연스럽게 열매들을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러한 열매를 맺는 일을 자유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의 삶을 제한하는 것으로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는 방법입니다. 헛된 영광에 사로잡혀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아도 되고, 비겁해지지 아니하고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어 주셔서 우리 가운데 항상 내주해 계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연약한 인간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속에 끊임없이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일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 속에 내주 해 계시는 성령을 좇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이러한 열매를 맺음으로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헛된 세상의 영광에 사로잡혀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게 하시고, 비겁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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