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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리석은 거래

 

본 문 : 마태16:24-28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

인류의 문명이 시작될 때부터 상거래는 시작되었습니다.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다. 나에게 가치 있는 물건을 내놓는 대신에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어 나의 필요한 물건과 바꾸는 물물교환의 거래가 시작되었습니다. 물물교환이란 화폐의 매개 없이 직접 물질과 물질을 교환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부락과 부락의 경계 지대에 서로 교환하려는 물건을 쌓아놓고 바꿔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물물교환이란 교환 가치의 비교나 수량에 있어서 불편한 점이 너무 많기에 차츰 소금이나, 면포, 쌀, 밀가루 등등 공통된 가치가 있는 물질을 교환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공통된 가치의 물질이 발전하여 오늘의 화폐가 되었다고 합니다. 화폐는 인류의 문명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화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① 가치척도로서의 기능 ② 교환수단으로서의 기능 ③ 지급수단으로서의 기능 ④ 가치보장수단으로서의 기능이 있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화폐를 가지고 가치의 척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살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모두다 "돈,돈 돈"하는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도 돈을 주면 싫어하는 아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에도 돈을 보여주면서 "아가야, 돈 줄 테니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빨리 나와라"고 하면 쉽게 태어난다고 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대만의 타이페이에 가면 중국 청나라 시대의 작품이라고 하는 서태후의 옥병풍이 있습니다. 서태후는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이었으며 동치제의 생모였습니다. 동치제가 6살의 나이로 어리기 때문에 왕을 앉혀놓고 뒤에서 섭정을 하였는데 전면에 나서지 않기 위하여 병풍을 가려놓았습니다.

서태후는 병풍 뒤에서 어린 아들 동치제에게 "이래라, 저래라"고 하였습니다. 그후 아들 동치제가 죽자 누이동생의 아들을 왕위에 올려 광서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계속 섭정을 베풀었습니다. 서태후가 사용한 옥으로 만든 병풍이 얼마나 정교하며 우아하고,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오는지, 하여튼 중국 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그 서태후의 병풍을 구입하려고 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값을 메길 수가 없어서 흥정이 되지 않았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모재벌에서 구입하려고 하였지만, 흥정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가치 있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가치를 말할 때는 사용가치와 효용가치, 주관적가치를 말합니다. 사람은 경제적인 가치가 인정되는 경우에만 돈을 내고 사는 것입니다. 경제학의 창시자라는 아담 스미스는 가치를 말할 때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하나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입니다. 경제학이 발전되면서 가치를 말할 때 주관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주관적 가치는 그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크면 클수록, 또 그 물질의 수량이 적으면 적을수록 커진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사람은 누구나 가치 있다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가치 있는 것이지만, 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가치를 주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치를 말할 때 다만 물질만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본문의 말씀 중에 26절의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한 사람의 목숨은 온 천하의 가치보다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생명이라는 것은 값으로 환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치 있는 물건을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저는 원래 욕심이 없어서 그런지, 무엇 가치 있다는 것을 소장해본 적이 없습니다. 금붙이 하나라도 집에 있으면 부스럼이 나는 줄 알았고, 그런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한 친구 목사님은 골동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데 관심도 없고, 지금까지 값나가는 무엇을 소장한 적이 없지만, 앞으로도 어떤 골동품도 소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무슨 골동품이나 수석 한 점이라도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며, 무슨 물건이든지,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져야 할 자리에 있어서야, 저는 아닙니다.

우리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과 생존한다는 것은 전혀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살아간다는 것과 생존한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말입니다. 생존한다는 것은 먹어치우고, 허파는 숨을 들이쉬고 있고, 심장은 고동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가치가 있으며, 영혼은 평안하고, 마음에는 기쁨과 감격이 넘쳐나고, 순간순간 감격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교훈은 생존을 위한 교훈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교훈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안전만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삶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25절의 말씀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주후 80-90년 경의 기록입니다. 이 때는 엄청난 박해에 직면하여 신앙을 버리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고, 신앙을 지키려다 보면 죽어야 하는 박해와 순교의 시대였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참된 삶을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참 생명을 붙잡는 것입니다. 안전을 구하고, 살아남기 위하여 자기의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은 좀 더 살아남을지 모릅니다. 그러한 그는 영원한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삶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순교와 같은 극단의 결단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평안을 추구하고, 안이하고 안락한 생활만을 영위하고 있다면 과거 신앙의 정절을 지키다가 순교하신 선배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살아가는 날에 해야하고 가지는 삶의 결심이 세속적인 지혜의 지배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 다 적당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무사안일한 동기에 지배를 받는다면 가치 있는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육신의 지배를 받기만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는 가치 있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한 주간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한 주간 살아가는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감사하면서 정말 구원받은 감격이 있었습니까? 나 중심적이고, 육신의 정욕에 매여 있지는 않았습니까? 한 주간 동안 하늘을 향하여 뻗어나가야 할 우리의 생명이 이 땅위에 매어 있지는 않았습니까? 우리 주님을 위하여 어떤 위험도 감수하겠다고 하는 용기를 가져야만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욕을 먹겠다는 각오를 해야만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일생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명예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까?

한국교회는 인기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돈이 오고가는 자리도 있습니다. 누구나 선호하는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는 순교의 신앙이 아니라도 다 감당하는 자리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에 인생 전부를 걸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에게 그의 인생 전부 송두리째 드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도 물질도 건강도 다 소비하고, 다 바닥내고 가겠다는 각오로 살아가야 합니다. 남겨두지 않으며 가지고 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을 얼마 살지 못한 사람이지만, 3분의 2는 살아간 사람입니다. 소위 평균 나이를 볼 때 50세가 되었다고 하면 3분의 2는 사라진 사람입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살아간 시간이 더 많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인생을 논하고, 삶의 본질을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나의 인생관이다'하면서 일생을 살아오다가 홀연히 어느 날 아침에 깨어나고 보니,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을 놓치고 살아왔음을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나는 헛되고 헛된 인생을 살아왔다"고 후회합니다. 그 동안 신기루와 같은 허상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움켜쥐어야 성공한 것으로 알고 헛된 일에 분요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과도하게 잘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난 그 자체가 미덕이 아니고, 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삶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물질이란 마지막에 가져갈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하나만 가져가는 것이지, 돈 일원 한푼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직 일생을 그런 물질을 얻기 위해서만 허비하였다고 하면 얼마나 비통한 인생을 살아간 것입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물질 보다 더 귀한 것이 있고, 인생을 결코 물질로 비하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질은 인간의 극한 상황에서 하나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물질이 많기 때문에 상한 마음이 치료를 받는 것 아니고, 고독한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만물의 영장인데 왜 동물로 내려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도덕이 왜 이렇게도 땅에 떨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모두 세기말적인 현상이요, 우리 주님이 곧 오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은 r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여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우님들은 물질을 열심히 벌되 정직한 방법으로 벌어야 합니다. "아, 목사님은 돈을 안 벌어서 그렇지, 돈 좀 벌어보세요, 거짓말 안 하고 돈을 벌 수 있나요"라고 하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으니라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여 공평한 길로 다니나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공평하십니다. 정직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소득과 열매는 정직한 중에 열리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장구한 재물입니다. 일시적인 재물이 아니라, 오래 가는 은총입니다. 이제 부정하게 돈을 벌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과도하게 돈을 모으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것이 지나놓고 보면 빠른 길이요, 정도라는 것입니다. 천천히 가도 완전하게 가야 합니다. 부정을 해서라도 빨리 가다가 얻어맞은 것입니다.

저는 한 업체를 알고 있습니다. 장안에 소문이 난 업체입니다. 도대체 그 업체는 어떤 업체이기에 그렇게 사람이 모이느냐, 도대체 돈을 어떻게 벌어들이고, 어떻게 모아 챙기고 있구나, 분명히 뭔가 잡을 것이 있다고 하면서 세무서에서 십여 명이 감사가 나왔습니다. 일주일동안 사무실 한 칸에 진을 치고, 장부 하나 하나를 훑어 내려갔습니다. 매일같이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감시합니다. 영수증 발행하는 것, 컴퓨터에 기록하는 것 하나 뚫어지게 살피고 있습니다. 일주일동안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이 "세상에 이렇게 정직한 사람 처음 보았다"고 하면서 두 손들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책을 잡거나, 흠을 들춰낼 것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바른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셔야 하고, 하나님이 손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바르게 사는 가운데 주시는 복이 진정한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거래를 하는 사람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온 천하의 가치는 돈을 환산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우주 안에 태양의 가치가 얼마며, 달의 가치가 얼마며, 이 공기, 땅, 바다 산과 들의 가치를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한 사람의 생명은 그보다 더 귀합니다. 내가 없는 이 땅이 무엇이 유익하며, 소용이 있을 것입니까?

내가 있고 나서야 가정이 좋은 것이며, 아내와 남편이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있고 나서야 산과 바다며, 이 온 우주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은 정말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생명이 고귀한 것입니까? 이 목숨, 우리의 생명이란 단 한번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잃으면 영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재물 즉 돈의 가치가 물론 중요하고, 귀하지만, 그것은 잃었다가도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고 해도 망가지면 고치거나 새로 제작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과 관계되는 건강이라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요, 건간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합니다. 한 번 잃어버린 건강을 다시 회복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가 왜 어리석은 부자라고 하였습니까? 그는 죽는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그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문 앞에 엎드리고 있습니다. 인생을 가장 어리석게 낭비한 사람입니다.

지난주간 가슴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15일 밤 경찰의 검문에 불응하며 달아나다 경찰이 쏜 실탄에 맞아 숨진 절도 용의자가 있었는데 중학교 3학년생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모군이라고 하는데 이 군은 훔친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중 검문에 걸리자 검문에 불응한 채 그 오토바이를 타고 도주하다가 골목 안에 와서는 오토바이를 버리고 도망하다가 경찰관이 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공포탄을 쏘면서 쫓아오는 경관이 그 자리에 서라면 도망가지 말고 서야 합니다. 중학생 정도의 아이가 남의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난다는 것은 아주 죄질이 나쁜 아이입니다. 죽은 학생을 보고 정말 안 되었다고 하지만, 싹이 노란 아이입니다. 인생에 있어 중학생 때부터 남의 오토바이를 훔친다고 하면 커서는 무엇을 훔칠 것입니까? 자기의 것을 소중히 여기고 남의 물건도 소중히 여기는 훈련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 학생은 자기의 그 소중한 목숨을 오토바이와 거래한 아이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어의 원문을 보면 "사람이 생명을 얻기 위해 무슨 안탈라그마를 주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안탈라그마]란 재미있는 말입니다. 외경 집회서에 보면 "교양있는 아내는 돈으로도 살 수 없다" "교양 있는 아내를 얻기 위해서는 안탈라그마가 없다"는 말입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한 가치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한 번 사람이 물질적인 욕망 때문에 자기의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다시 회복하기 위해 지불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 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어 담을 수 없습니다.

옛날에 어떤 귀중한 보석류를 무척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막 너머에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보석을 찾으려고 사막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는 그만 길을 잃고 뜨겁게 타는 사막 속에서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떤 모래언덕으로 기어가고 있을 때, 그는 자기 앞에 반쯤 묻힌 물통을 보았습니다. 그는 강한 기대를 가지고 물통을 집어들고는 마개를 열고 물을 마시려고 자기 입에다 가져다 대었습니다. 마실 물 대신에 청백색의 아름다운 다이아몬드가 물통에서 주르륵 쏟아졌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그 다이아몬드를 담은 물통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 아름다운 보석들을 불타는 사막 위로 흩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절망과 갈증 속에서 죽었습니다. 다이아몬드란 한 모금의 물보다도 못한 가치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이란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한 모금의 물보다 못한 가치일 뿐입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또한 남들이 나에게 대해서 무엇이라 하느냐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알아야 할 자기 자신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라도 생각을 돌려서 '나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을 솔직하게 우리 하나님 앞에서 혹은 자기 자신 앞에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묵상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떠들썩하게 살기 때문에 자신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과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은 쉽게 알게 되나 나의 허물은 알기가 어려우며 남의 자식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이 되나 내 자식에 대해서는 어렵습니다. 언제나 내 쪽이 어둡고 항상 불투명합니다. 거짓과 불의를 보더라도 밖에 있는 것보다는 안에 있는 것이 더 크고, 더 고질적이며 본질적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알기도 어렵지만 자기를 다스린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나아가서 자기를 믿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실망 중에 가장 큰 실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다. 그래도 무엇을 좀 할 수 있는[나]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에게는 다소나마 의지가 있고, 선이 있고, 진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닙니다. 형편없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속았으면 원망할 말이라도 있지만 나에게 속았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비참한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써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더도 말고 조금만 있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지만, 우리의 욕심은 한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정말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의 물, 하늘의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먹이고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모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을 살아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참 생명, 영생을 소유해야 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지 않는 연합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그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면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생명을 바꾼다고 하는 것은 사랑 중에 가장 귀한 사랑입니다. 우리 사람은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생명을 바꿔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더러운 죄를 다 사해주셨습니다.

주님 앞에 서실 때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생명을 다 바쳐서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면서 구원받은 감격과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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